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
헤르타 뮐러 지음, 윤시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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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지난달에 발칸지역을 여행하면서 23일의 여정으로 루마니아의 몇 곳을 돌아보았습니다. 수도 부쿠레슈티, 드라큐라의 무대가 된 마을 브란, 옛 트란실바니아의 수도였던 시비우, 그리고 작은 비엔나라는 별명이 있는 티미쇼아라 등입니다. 수도 부쿠레슈티에서는 독재자 차우셰스쿠가 만들어낸 괴물 같은 인민궁전을 보았고,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혁명이 일어난 장소이며 희생자들을 기리는 기념비도 보았습니다. 챠우세스쿠 독재를 무너뜨리는 움직임이 시작했다는 티미쇼아라에서는 승리광장, 자유광장, 그리고 통일광장 등을 둘러보았습니다.


루마니아를 여행하면서 루마니아 출신 독일 작가 헤르타 뮐러가 차우셰스쿠 독재 정권 시절의 사회분위기를 소개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귀국하자마자 찾아 읽은 책이 <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입니다. 작가는 티미쇼아라에서 남동쪽으로 36떨어진 니츠치도르푸(Nițchidorf)에서 독일계 소수민족인 부모로부터 태어났습니다. 주로 차우셰스쿠 정권 시기의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을 썼다고 합니다. 주로 루마니아의 독일 소수민족의 관점에서 이야기되며, 바나트와 트란실바니아의 독일인 현대사를 다루었다고 합니다.


<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에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황폐하고 쇠락한 도시의 변두리에 살면서 희망이라고는 한 줌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사고를 당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야기는 여교사 아디나와 어렸을 적부터 그녀의 절친 클라라를 중심으로 이어집니다.


아디나는 학생을 토마토 수확 작업에 동원하는 것은 미성년자 노동 착취라고 말했다는 혐의로 교장에게 불려가 성추행을 당하고 비밀경찰에게도 요주의 인물로 찍힌다. 비밀경찰은 그녀의 집에 깔린 여우 모피에서 꼬리와 다리를 차례로 잘라내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알립니다. “그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안전 면도날 하나를 꺼낸다. 그리고 안전 면도날을 싼 포장지를 풀어 무릎 옆에 놓는다. 그는 여우의 오른쪽 뒷발을 자른다. 그는 혀끝으로 검지에 침을 묻혀서 잘린 털을 바닥에서 훔쳐낸다.(199)” 언제라도 그녀의 사생활에 침입할 수 있음을 은밀하면서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지요.


클라라의 애인이 비밀경찰의 간부 파벨이라는 사실을 아디나가 알게 되면서 두 사람은 서먹해진다. 하지만 클라라는 아디나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쪽지에 적어 알려줍니다. “사람들이 체포될 거야 리스트가 있어 넌 숨어야만 해 우리 집에서는 아무도 널 찾지 못할 거야(300)” 차우셰스쿠 정권이 권력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시도로 집단 체포를 계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클라라의 통지를 받은 아디나는 남자친구 파울과 함께 국경마을에 사는 친구 리비우에게로 서둘러 피신했습니다. 하지만 리비우의 집에서 지내는 것도 불안한 나날의 연속입니다. 도나우 강을 건너 다른 나라로 도망을 쳐야 할까 생각하는 사이에 차우셰스쿠가 실각하는 장면을 TV에서 보게 됩니다. 그 장면을 본 리비우는 화면에 입맞춤을 하면서 널 먹어버리겠어라고 말합니다. 파울은 리비우와 함께 화주를 마시면서 금지된 노래를 부릅니다. “깨어나라 루마니아여 네 영원한 잠에서(334)”


<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라는 제목은 희생자와 가해자를 구분할 수 없다라는 뜻을 담은 루마니아의 속담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합니다. 차우셰스쿠 정권이 붕괴되었더라도 독재자의 추종 세력과 그 체제에 익숙해진 탓에 정치나 사회적 분위기가 근본적으로 변화할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을 암시한다는 것입니다.


등장인물들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을 아주 세밀하게 묘사하다보니 이야기의 중심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가늠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작가가 이런 방식으로 이야기를 끌어간 것은 독재정권의 감시와 통제를 비껴가기 위한 방식일 것으로 추측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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