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혹
엘리아스 카네티 지음, 이온화 옮김 / 지식의숲(넥서스)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이달 초에 불가리아를 여행한 인연으로 읽게 되었습니다. 1905년 지금은 러시아 영토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불가리아였던 루스추크에서 태어난 엘리아스 카네티는 1911년 가족들과 함께 영국으로 이주했다가 이듬해부터 오스트리아, 스위스, 독일 등 여러 나라를 전전하였다고 합니다. 1921년에 이주한 독일에서 김나지움을 다녔는데, 1차 세계대전이후 혼란한 사회와 인플레이션 등으로 빚어진 대규모 소요사태를 체험했다고 합니다. 1924년에는 빈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면서 군중의 사회-심리학적 현상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현혹(Die Blendung)>의 초고인 <칸트 불에 타다(Kant fängt Feure)>1931년에 완성했습니다. 영어와 프랑스어로 번역되면서 <화형(Auto-da-fé)>, <바벨탑(Tower Babel)> 등의 제목을 붙였습니다. 독일어 제목 <Die Blendung>어둠 속에서 갑자기 밝은 불빛이 비치면 일어나는 순간적인 실명상태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신을 빼앗겨 해야 할 것을 잊어버리거나 그렇게 되게 함을 의미하는 우리말 제목 현혹에 해당하는 독일어는 Die Verblendung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말 번역본의 제목을 현혹(眩惑)으로 정한 이유를 1. Die Blendung에 딱 맞는 멋진 우리말 제목을 찾지 못했고, 이 소설의 중심주제가 현혹된 정신’, 그리고 문화, 물질과 권력에 현혹된인간들의 행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Die Blendung’을 영어로는 ‘The blinding’으로 번역되는데 일시적인 실명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통상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빛은 간상세포가 인식하여 전기자극으로 전환시켜 뇌에 있는 시신경중추로 전달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둠 속엣 갑자기 밝은 불빛을 보게 되면 간상세포가 만들어내는 전기자극이 갑자기 증폭이 되면서 마비상태에 빠지면서 시각중추로 전달되지 못하는 상태, 즉 실명상태에 빠지게 되는데, 빛이 꺼지고 조금 지나면 회복이 됩니다. 따라서 순간적 실명, 혹은 일시적 실명상태를 의미하는 우리말 가운데 멋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은 쉬이 이해되지 않는 대목입니다.


<현혹>의 주요 등장인물은 자칭 현존하는 가장 유명한중국학 학자 페터 킨, 그리고 그의 가정부로 들어왔다가 두 번째 부인이 된 테레제, 그리고 킨이 집에서 쫓겨난 뒤에 만나게 되는  ‘체스의 천재라고 부르는 포주인 꼽추 피셜레 등입니다. 킨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변하는 상황에 따라 1세계가 들어있지 않은 머리’, 2머리가 없는 세계그리고 3머릿속에 있는 세계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1세계가 들어있지 않은 머리에서는 25천권에 달하는 책을 소장한 집에서 연구에 몰두하고 지내던 페터 킨의 집에 새로 들어온 가정부 테레제가 8년에 걸쳐 책들을 소중하게 관리하는 모습을 본 페터 킨이 그녀와 결혼하게 됩니다. 하지만 테레제는 결혼과 함께 180도 달라진 모습을 보이는데, 가정부일 때 하던 일보다 안주인으로서의 권리 챙기기에 열중할 뿐 아니라 침대를 사러갔을 때 만난 직원과 일탈을 보이기도 합니다. 나아가 킨이 유산도 없는 상태라는 것을 알고는 집에서 내쫓기까지 합니다. 그런가하면 킨은 위험한 테레제를 집에 가두었다고 생각합니다. 옮긴이는 이러한 테레제의 행태가 물질에 현혹된 인간의 전형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세계가 들어있지 않은 머리라는 작은 제목은 세상물정을 모르고 사는 페터 킨의 정신세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2머리가 없는 세계에서는 집에서 쫓겨난 페터 킨이 지금까지는 피상적으로 접촉해오던 외부세계와 직접 만나게 됩니다. 2부에서는 외부세계에서 자유를 즐기던 킨이 이상적인 하늘이라는 카레어서 자칭 체스의 천재라고 하는 포주 피셜레를 만납니다. 2부는 킨과 피셜레가 함께 움직이면서 겪는 일들을 적고 있는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속임수를 쓰고 폭력까지 난무하는 세계입니다. 그러니까 머리, 즉 이성이 없는 세계인 셈입니다. 여기에서 킨은 테레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테레제는 킨이 자신의 돈을 훔쳐갔다고 경찰에 신고를 했기 때문에 이를 자백하라는 압박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킨은 자신이 테레제를 죽인 살인범이라고 자백합니다.


3머릿속에 있는 세계에서는 피셜레로부터 전보를 받은 킨의 동생 게오르크가 형을 구하기 위하여 독일로 옵니다. 테레제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형의 잘못된 생각을 되돌리고, 경비원과 테레제를 내쫓고 형을 집으로 돌아오도록 조치하고 파리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킨은 극도의 불안 속에서 자신의 도서관에 불을 질러 책들과 함께 불에 타 죽고 맙니다. 그러니까 머릿속에 있는 세계는 옳고 그름을 떠나서 자신이 옳다고 믿는 세계를 이르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현상을 군중적 현상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작가가 추구하던 군중의 심리연구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데 등장인물들이 보이는 행태는 굳이 군중심리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어 보입니다. 읽어내기가 아주 어려웠던 것은 죽었던 등장인물이 다시 나타나는 등 서로 다른 시점이 뒤엉키는데다가 등장인물이 생각하는 바를 마치 현실에서 일어난 것처럼 적고 있는 까닭이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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