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중지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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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은 인간이라면 한번쯤은 품었을 희망사항이지 싶습니다. 하지만 죽지 않는다 할지라도 삶의 질까지 담보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주제 사마라구의 <죽음의 중지>는 이런 고민을 해보는 책읽기였습니다.


책을 열면 다음 날, 아무도 죽지 않았다.(11)”라는 소식을 전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 다음 날이란 새해가 시작되는 날이었습니다. 대체로 이런 사건은 당일 확인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나라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만, 정부에 죽음을 알리면 당국에서는 매일 집계하여 통계처리를 할 것입니다. 당연히 매일 일정한 숫자만큼의 사망신고가 되기 마련인데 하루 종일 사망신고가 없었다면 하루 일과를 마치는 저녁 무렵에서야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터이고, 특히 새해 첫날을 법정 공휴일로 지정한 나라의 경우는 이튿날이 지나야 뭔가 이상하다는 감이 오기 시작할 것입니다.


어찌되었거나, <죽음의 중지>에서 이상한 현상이 나타난 나라의 관료들은 일단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러나 장의업계가 먼저 심각한 상황임을 인지하게 되었고, 이어서 병원계에서도 중증의 환자가 죽음을 맞지 않고 병상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환자에게 배정할 수 있는 병상이 모자라는 사태를 걱정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죽은 뒤에 부활을 이야기해온 종교계에서도 큰 문제가 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처음에는 환호하던 사람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였습니다. 결국 죽음을 목전에 두었으면서도 죽지 못하는 사람들을 여전히 죽음이 일상적인 이웃나라로 모셔가는 일이 생겼습니다. 이 소문은 금세 사람들 사이에 확산되면서 중증 환자들을 국경으로 모셔가는 일을 정부가 나서서 막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우리가 고민해야 할 점은 영생을 얻더라도 삶의 질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죽는 것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특수한 상황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등장하고 정부는 여전히 제대로 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허둥대기만 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리고 이런 상황은 언제까지 지속될까요? 죽는 사람이 사라진지 7개월이 지나면서 죽음이 목전이나 명만 유지하는 사람이 62,580명에 이르렀습니다. 그런 시점에 죽음이 방송사 사장에게 연락을 해왔습니다. 죽을 사람들이 다시 죽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 그동안 죽음이 태업을 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나를 그렇게 혐오하던 사람들에게 언제까지나 산다는 것, 영원히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맛을 좀 보게 해주려는 것(133-4)”이었다는 것입니다. 죽음이 할 일을 다시 시작하자 이번에도 대혼란이 일어납니다. 죽음을 미루었던 사람들이 갑자기 죽음을 맞으면서 이들의 장례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래저래 세상은 모든 일이 원만하게 돌아가는 것이 최선이란 생각이 드는군요.


이야기의 뒷부분에서는 죽음과 첼리스트와의 관계를 집요하게 뒤쫓고 있어 이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첼리스트는 이틀 전에 죽음을 맞았어야 하는데 무슨 일일지 여전히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몇 년 전에 방영된 연속극 <쓸쓸하고 찬란하-도깨비>에서도 저승에서 죽음이 예정된 자의 명부가 도착하면 저승사자들이 현장에 출동하여 죽은 자의 영혼을 인도하는 것인데, 간혹 이런 원칙에서 벗어나는 일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중지>에서도 죽음을 관장하는 여성이 명부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아 죽어야 할 첼리스트가 명을 이어가게 된 셈입니다. 심지어는 그 첼리스트의 삶에 깊숙하게 간여하게 되는데, 결국 첼리스트는 죽음을 맞지 않게 됩니다. 예외 없는 원칙이 없다는 원칙이 지켜진 셈인가요?


흥미로운 것은 2009년에 번역 소개된 <죽음의 중지>에서는 사람들이 죽음을 개딸이라고 부른다고 했는데, 그것은 개자식에 빗댄 표현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최근에 우리나라에 등장한 개딸들과 차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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