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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파는 남자
주제 에두아르두 아구아루사 지음, 이광윤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0년 1월
평점 :
절판
기억을 화두로 삼고 있으면서도 기억이 예전 같지가 않습니다. <기억을 파는 남자>도 분명 꼬리를 잇는 책읽기였는데, 어떤 책에서 읽고는 읽어보려고 했는지 기억이 전혀 나지 않습니다. 제목만으로는 자신의 기억을 누군가에게 판다는 것인지, 그렇다면 어떤 형태로 파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책을 읽어 보니 과연 생계를 위해 다른 사람의 과거를 만들어주는, 그러니까 기억을 파는 일을 하는 사람이 등장하는 것이었습니다. 백피증을 가진 흑인 남자 펠릭스 벤투라의 이야기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한때 사람이었다고 전제를 하고는 있습니다만, 지금은 펠릭스 벤투라의 애완 도마뱀 에울랄리우가 펠릭스 벤투라에게 일어나는 일을 관찰하고 서술하는 화자의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도마뱀이 사람의 말을 이해할 뿐 더러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일을 판단한다는 것이 가능하겠느냐는 의문을 가지고 본다면 특이한 인간이 아닌 생물이 화자로 등장하는 특이한 소설로는 처음인 듯합니다.
얼마 전에 백반증을 앓던 흑인 여성이 2번의 뇌졸중을 겪은 후에 피부색깔을 일부 되찾은 일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백피증과 백반증이 어떻게 다른지 찾아봤습니다. 저도 의사입니다만, 모든 의학적 사실을 꿰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백반증은 피부의 색소를 만드는 멜라닌 세포가 후천적으로 파괴되면서 피부에 다양한 크기의 백색 반점이 생기는 질환입니다. 반면 백피증은 태어날 때부터 백색 반점이 생기는데, 유전적 소인에 의한 것이며 성장하면서 크기와 모양이 더 커지거나 변하지 않는 것이 백반증과의 차이점이라고 합니다.
이야기 초반에 나오는 「강을 위한 위로」라는 노래가 1970년대에 앙골라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는 것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가사는 가슴에 와 닿습니다. “그 어느 것도 지나가지 않고 / 그 어느 것도 사라지지 않네. / 과거는 잠들어 있는 강이요. / 추억은 다채로운 거짓말이라네. // 물은 강에서 잠자고 / 세월은 나의 가슴에서 잠을 자네. / 아, 슬픔과 고통도 / 나의 가슴에 쓰러져 잠을 자네. // 그 어느 것도 지나가지 않고 / 그 어느 것도 사라지지 않네. / 과거는 죽은 듯이 숨쉬지도 않고 / 잠을 자는 강이라네. 나는 강을 깨워 / 그를 소리치게 하리라.(13쪽)”
기억을 파는, 그러니까 고객의 신분을 세탁해주는 일을 하는 펠릭스 벤투라에게 어느 날 이방인이 찾아와 새로운 신분을 만들어주면 만 달러를 낼 의향이 있다고 제의합니다. 자신은 사진 기자로 전쟁과 기아, 자연재해 등 끔찍한 사건들을 사진으로 담아왔는데, 이제 한 나라에 정착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끗하고 떳떳한 과거와 대가족을 원한다고 했습니다. 가족은 두세 명의 귀족부인을 포함해서 삼촌과 숙모, 사촌, 조카들, 조부모로 이뤄져야 하며 가족의 초상화나 가족과 관련된 일화도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당연히 새로운 이름과 법적으로 자신의 신분을 확실하게 증명해줄 수 있는 문서가 필요하다고도 했습니다. 펠릭스 벤투라는 결국 의뢰자를 사진작가 주제 부슈만이라는 인물로 재창조해주고, 관련 자료까지 완벽하게 제공해줍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말미에 그의 진면목이 드러나게 됩니다.
아주 인상적인 대목들이 적지 않습니다. 태양과 빛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기자의 피라미드에서는 “태양의 빛은 마치 빛나는 안개와 같이 모든 것 위에 장엄하게 내려앉는 듯 아주 생생하게 세상을 비춘다!(67쪽)”라는 에사 데케이로스의 말이 나오는데 사실인지 확인이 필요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느 소설가가 한 말도 있습니다. “나는 직업적으로 거짓말쟁이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기꺼이 또 즐겁게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문학이란, 거짓말쟁이가 사회적으로 인정되고 허락될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방법입니다.(8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