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 6 - 팍스 로마나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6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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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이어 아우구스투스의 시대로 넘어갔습니다. 그는 카이사르의 누나 율리아의 외손자로 살아가면서 몇 차례 이름이 바뀌게됩니다. 태어났을 때는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였는데, 카이사르 사후에 공개된 유언에 따라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면서 후계자로 지명되자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고 개명하였습니다. 기원전 40년 무렵에는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입니다. 그러니까 로마 공화정의 마지막 프린켑스 세나투스(원로원 수장)이던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제정의 문을 열고 초대 황제가 된 것입니다.


사실 카이사르가 예기치 못한 죽음을 맞은 것은 공화정을 종식시키고 제정으로 로마의 정체를 바꾸려는 의도를 적나라하게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카이사르의 뒤를 이은 아우구스투스는 이런 분위기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공화정을 유지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면서도 내막적으로는 제정의 토대를 놓아갔던 것입니다.


사실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 등 이전의 로마를 이끌던 지도자들과 달리 군사적 능력이 부족했다고 합니다. 카이사르는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아그리파라는 걸출한 군사 지도자를 붙여 보좌를 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우구스투스는 정치가로서는 카이사르보다 완벽하고 적절할 자질을 가졌다는 평가받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핏줄에 대한 애착이 심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혈육으로 하여금 대를 잇게 하려고 애를 썼지만 운명은 그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아서 그의 피를 이은 후계자들이 모두 단명하게 결국은 피가 섞이지 않은 티베리우스가 제위를 잇게 됩니다.


기원전 1세기 들어 로마사회는 아이를 적게 낳는 풍조가 드러나더니 아우구스투스 시절에는 아예 결혼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났다고 합니다. 최근 우리 사회의 분위기와 흡사했던 모양입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아우구스투스는 두 가지 법안을 성립시켰습니다. 첫 번째는 간통 및 혼외정사에 관한 법으로 간통을 공적인 범죄가 된 것입니다. 간통 당사자 뿐 아니라 알고도 눈감아 준 경우에는 간통방조죄를 물었습니다. 우리 사회는 간통을 사인간의 문제로 보아 처벌을 하지 않게 되었는데, 아우구스투스와는 반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법안은 정식 혼인에 관한 법으로 남자는 25세부터 60세까지, 여자는 20세부터 50세까지 결혼을 유지하지 못하면 독신에 따른 불이익을 받아야 했습니다. 홀아비나 과부의 경우도 1년 안에 재혼을 해야 했습니다. 출산에 이은 육아와 교육, 그리고 자립 등에 대한 사회적 부담이 커서 결혼을 기피하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는 우리사회에서도 적극 검토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만사가 당근만으로는 최상의 효과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당근과 채찍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것처럼 출산에 대한 지원의 범위를 키우는 것만으로는 효과를 거두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인 이야기> 아우구스투스 편의 제목이팍스 로마나로 정한 것은 정복사업을 통하여 국경을 확장시키는 일보다 그동안 확보해온 국경을 안정시키는 것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국경을 침범하는 적에 대하여 로마군단을 동원하여 격퇴시키거나 외교적 해결방안을 모색하기도 했습니다.


아우구스투스가 이룩한 업적으로는 원로원의 규모를 줄여 원로원이 주도하던 공화정의 폐해를 줄인 것을 꼽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제를 정비하여 군사의 규모와 군비를 축소한 것과 세제를 개편하여 재정을 건전하게 운영한 것 등이 꼽힌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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