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선고 모리스 블랑쇼 선집 1
모리스 블랑쇼 지음, 고재정 옮김 / 그린비 / 201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는 병리의사입니다. 사례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필자가 내리는 병리학적 진단은 진료의사를 통하여 환자에게 통보될 때는 죽음을 선고하는 근거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런 생각이 이 책을 읽어보도록 이끌었던 것 같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모리스 브랑쇼가 쓴 <L’arrêt de mort>죽음의 선고인 동시에 죽음의 중지로도 해석될 수 있다고 합니다.


옮긴이는 죽음의 선고는 이상한 이야기일 뿐 아니라, 모든 것 속에서 이상함을 깨워내는 이야기이다(106)”라고 하였습니다. 옮긴이의 말대로 책을 읽고 나서는 물론 읽어가는 중에 저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상한 이야기를 읽었다는 느낌이 겨우 남았을 뿐입니다.


옮긴이에 따르면 1부와 2부로 나뉜 이 책의 1부에서는 J라는 여인이 죽어가는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어서 병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병과 이상한 죽음이 중첩된다는 것입니다. 2부에서는 자신이 만나고 바라보는 모든 것에 죽음의 기호를 덧씌웠다고 했습니다. 현실세계와 중첩되어 죽음의 공간이 생성되며, 그는 그 열린 무덤에 거주한다고도 하였습니다.


그나마 1부에서는 질병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 피상적으로 이해되는 대목들이 있기는 했습니다. 예를 들면, “그녀는 지나치게 병과 싸웠다. 보통의 경우라면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어야 했다. 그런 그녀는 아직 죽지 않았을 뿐 아니라 마치 병이 건드릴 수 없는 사람처럼 변함없이 살고, 사랑하고, 웃고 시내를 돌아다녔다.(16)”라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녀의 주치의가 작가에게도 한 말이 있습니다. “당신은 이미 이 년 전에 죽었어야 할 사람이므로 앞으로 남은 수명은 모두 덤으로 사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대목도 있습니다. 육 개월 시한부를 선언했는데 칠 년을 넘게 살고 있다고도 했습니다. 사실 중증환자가 얼마나 살 수 있는지는 담당의사의 개인적 경험이나 교과서에 나오는 통계자료를 바탕으로 산정하고는 있지만 딱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환자측 요인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대목도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병이 깊어 가면서 공포는 낮을 밤으로 바꿔 놓았다. 나는 그녀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죽는 것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더 심각한 그 무엇에 대한 것이다.(19)” J가 의사에게 하는 이런 말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 대목입니다. “당신이 나를 죽이지 않는다면 당신은 나를 죽이는 겁니다.(28)” 카프카가 그 비슷한 말을 했다고 합니다.


2부의 경우는 이야기의 전개가 모호하고 상식 밖의 행동을 하기도 해서 혼란스러웠습니다. 작가가 거주하는 파리의 호텔방은 죽음의 공간이자 가장 큰 삶이 거주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화자는 낮에는 삶을 지속하지만 밤이 되면 죽음의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입니다. 그런 대목입니다. “나는 들어가서 문을 닫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칠흑 같은 공간이 내 앞에 펼쳐졌다. 나는 그 어둠의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에 있었다. 이 어둠이 무서운 것임을 나는 인정한다. 그것 안에는 인간을 경멸하고 인간이 정신을 잃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무엇이 있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다.(87)”


블랑쇼가 말하는 죽음은 종말이나 소멸이 아니며, 언제나 죽음으로의 접근이다. 종말이나 소멸을 선언하지 않는 죽음이 어째서 공포를 가져다주는지 의문이 들 것이다.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종말이 아니라 불가능성(세계의 불가능성, 존재의 불가능성)으로 인한 영원한 고통 때문이다. 그러니까 자아가 쥘 수 있는 확실성을 무너뜨리고 박탈당하는 기이함의 경험 때문인 것이다.’라는 대목도 새겨봐야 할 대목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