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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가고 나는 남아서
김원석.남궁인.오흥권 외 지음 / 청년의사 / 2018년 5월
평점 :
환자진료로 하루하루를 숨 가쁘게 살아가는 의사들이지만 특히 몇 명 정도의 환자들은 기억에 갈무리해두고 있을 것입니다. <그는 가고 나는 남아서>는 기억에 남는 환자들에 관한 이야기들을 모아 엮은 책입니다. 한미약품이 후원하는 한미수필문학상은 의료계의 신춘문예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가고 나는 남아서>에는 15회, 16회, 17회 입상작들 42편 가운데 40편을 수록하였습니다.
입상작들은 횟수와는 무관하게 글의 성격에 따라서 1. 환자가 의사를 만든다, 2. 아픈 이들에게도 삶이 있다, 3. 죽음 앞에 서서 묻다, 4. 더 나은 세상 속 우리이기를, 5. 그대로 희망은 있기에 등으로 묶었습니다. 한미수필문학상에 응모한 사연들은 대부분이 환자를 직접 진료하는 임상과 의사들의 경험담을 담고 있는데, 저처럼 환자를 직접 만나지 않는 병리과의 경우는 특별한 사례는 기억에 남기도 하지만 환자와의 구체적 이야기까지 발전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에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없은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는 가고 나는 남아서>라는 제목을 보면 진력을 다했지만 환자를 구하지 못한 의사의 안타까움이 느껴집니다만, 이 책에 사연을 담은 환자들이 모두 안타까운 결과에 이른 것은 아닙니다. 전문 과목은 제각각이지만 비슷한 과정을 거쳐 제 몫을 다하는 의사로 성장해왔기 때문인지, 이야기를 읽으면서 공감이 되는 사례들이 많았습니다.
제가 암환자가 많은 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까닭인지 암환자에 관한 이야기들이 특히 눈길을 끌었습니다. ‘오기로 똘똘 뭉친 사나이’라는 제목의 글은 최근에 전립선암으로 수술을 받은 저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뇌암으로 수술을 받고 3년 시한부판정을 받은 40대 남성에게 쌍거풀 수술을 해주게 된 사연입니다. 수술하기 전부터 쌍거풀 수술을 하려던 환자였는데 시한부 판정을 받고서는 오기가 생겨서 쌍거풀 수술을 하기로 작심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30대 남자는 MRI검사에서 소세포암으로 확진되는 순간 쓰러져 영영 일어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쌍거풀 수술을 한 남자는 수술하자마자 토하면서도 밥을 먹기 시작했고, 강원도 산골에서 요양을 한 끝에 3년 넘게 활기차게 살아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알코올 중독자에 관한 이야기는 심각하게 다가왔습니다. ‘알코올 중독자에세 술을 자제하라고 말하는 것은 전 세계에서 가장 극심한 설사병에 걸린 사람에게 똥을 자제하하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일이다’라는 스티븐 킹이 <유혹하는 글쓰기>에 적은 구절을 인용하고 있는데, 대체로 알코올 중독증 환자를 진료하는 정신건강의학과에서는 술에 관한 이야기보다는 취미생활 등에 관한 이야기로 환자의 관심을 돌리는데 주력한다고 합니다. 저 역시 관심을 쏟을만한 일을 찾아봐야 하겠습니다.
담도암 말기인 환자와 얽힌 기묘한 운명도 생각할 거리가 많았습니다. 반복되는 치료에 지쳐 삶을 포기하기로 하였지만, 그의 선택은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기묘한 운명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가는 “우리는 이 생명들이 얼기설기 위태롭게 엮인 우연으로 삶과 죽음이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그렇게 이해하고서도, 실은 우리는 어떤 죽음에 관해서도,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라고 적었습니다.
제가 가끔 부닥치는 골치아픈 사례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난소암이 복강 내로 퍼진 환자에서 복강 내 장기를 뭉텅이채로 절제하는 경우에는 장기별로 구분하여 병소를 찾아내고 보고서에 적어야하는 병리과의사로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례를 수술했다가 세 차례나 수술을 해야 했던 외과선생님은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만약 거만하고 바쁜 척하던 의사가 어느 날부터 사랑에 빠진 듯 밝은 표정으로 환자 앞에서 시간을 오래 쓰고 하루에 두 번 이상 회진을 돌고 있다면, 그 환자는 합병증으로 고생하고 있는 게 거의 확실하다”
매년 봄에 공모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한미수필문학상에 저도 응모해볼만한 이야기 거리를 찾아봐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