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고통과의 화해
스펜서 내들러 지음, 이충웅 옮김 / 이제이북스 / 2004년 9월
평점 :
새로 회원이 된 동네 도서관에서 우연히 만난 책입니다. ‘어느 외과병리학자의 눈에 비친 일상의 영웅들’이라는 부제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아마도 제가 병리학의 전공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병리학은 기본적으로 신체가 정상의 범주를 벗어났는지 여부를 밝히는 학문입니다. 여기에는 동물실험에서 형태학적 변화를 관찰하는 실험병리학, 병원에서 수술이나 시술을 통하여 얻은 조직을 조사하여 진단을 결정하는 외과병리학, 독성물질이 생물체에 어떤 효과를 나타내는지를 관찰하는 독성병리학, 혈액, 소변, 체액을 대상으로 이상소견을 밝히는 임상병리학(지금은 진단검사의학으로 바뀌었습니다) 등의 세부 분야가 있습니다. 혹은 장기별로 분야를 세분하기도 합니다.
<고통과 화해>의 저자 스펜서 내들러는 뉴욕의 브롱크스에 있는 앨버스 아인슈타인 대학에서 병리학 수련과정을 거친 뒤에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25년 이상 외과병리학자로 일하는 한편 다양한 글쓰기를 해오고 있습니다. <고통과 화해>의 원제목은 <The Language of Cells: A Doctor and Patients>입니다. <세포의 언어: 의사와 환자들> 정도의 의미입니다. 옮긴이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말 번역서의 제목을 정할 때 옮긴이는 ‘고통’을 편집자는 ‘화해’라는 단어를 각각 제시하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옮긴이가 제시한 ‘고통’은 저자가 오랜 세월 병리진단을 내려왔지만 그것으로 인한 환자의 고통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대목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편집자가 제시한 ’화해‘라고 할 대목은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병리의사는 세포가 보여주는 질병의 신호를 해독하는 사람이지만 직접 환자를 만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병리검사를 의뢰한 진료과 의사에게 진단 결과를 알려주는 것으로 일이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저자의 경우는 자신이 진단한 한자와 만남을 이어가는 독특한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모두 9개의 장으로 구성된 글들은 ‘하퍼스’, ‘리더스 다이제스트’ 등 다양한 잡지에 실렸던 것이라고 합니다. 저자가 병리학을 전공하게 된 계기라던가 병리학자가 어떤 일을 하는지 손에 잡힐 듯 쉽게 설명한 대목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사실 그동안 제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묻는 분들이 묻는 분들이 적지 않았지만 이렇게 쉽게 설명해본 기억이 없습니다. 앞으로는 저자의 설명을 잘 정리해서 답을 해드려야 하겠습니다. 저자는 비만, 파킨슨병, 심장질환, 알츠하이머병, 낫적혈구증, 척수마비, 그리고 암 등으로 진단받은 환자와의 만남을 통하여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 특히 질병을 이해하고 화해하는 모습에 중점을 두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처럼 병리학이라고 하는 특별한 의학의 분야에서 하는 일을 건조하게 설명하지 않고 영화, 소설 등 다양한 분야의 사례들을 인용하고, 환자 사례를 들어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어 해당 질환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1장의 첫머리를 인용합니다. “사람의 조직 생검을 해석하는 나의 일은 넓게 보면 미술에 가깝다. 나는 색깔의 변화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섬세하게 조직(texture)의 변화를 느끼며, 그것들의 형태와 인상적인 장면을 연구하기 위해 세포들을 현미경으로 뚫어지게 들여다본다. (…) 실수로 오진을 해서는 안된다는 요구가 원치 않는 긴장을 유발할 수 있다. 어려운 생검의 경우에는 몇 시간이나 며칠 동안 그 조직의 이미지가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기도 한다.”
병리학을 처음 공부할 때는 현미경에 검체를 올려놓고 두어 시간을 꼬박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욕지기가 치민 적도 있습니다. 그렇게 들여다보면서 현미경으로 보이는 모습을 펼쳐놓은 책에 나오는 모습과 비교하여 진단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경험한 사례들이 이제는 저의 기억의 창고에 차곡차곡 쌓여왔습니다. 이제는 현미경을 들여다보면서 기억의 창고에 저장된 그림들과 비교해서 진단을 정하는 경우가 훨씬 많아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