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리스인들은 신화를 믿었는가? - 구성적 상상력에 대한 에세이
폴 벤느 지음, 김현경 옮김 / 필로소픽 / 2023년 5월
평점 :
참여하고 있는 고전독서회에서는 그동안 그리스 신화와 연관된 작품들을 적지 않게 읽었습니다. 신과 영웅들에 관한 그리스 신화를 읽으면서 그리스 사람들은 전해오는 신화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의문이 들었습니다. 물론 신화로 전해오는 이야기를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로 믿었을 수도, 아니면 재미있는 이야기로만 받아들였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저의 호기심을 채워줄 책을 만났습니다. 제목 그대로 <그리스인들은 신화를 믿었는가?>입니다.
책을 쓴 폴 벤느 교수는 고대사 분야에서 세계적인 거장으로 꼽힌다고 합니다. 파리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엑상 프로방스 대학교의 문학부교수를 거쳐 콜레주 드 프랑스의 로마사 교수를 지냈습니다.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믿음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서문에서 “나는 그리스 신화에 대한 고대 그리스인들의 믿음을 사례로 삼아, 곧이곧대로 믿기, 경험에서 울어난 믿음 등등 믿음의 존재양식의 복수성을 연구하고자 했다”라고 했습니다. 연구과정에서 두 번에 걸쳐 생각이 진전되었는데, “나는 믿음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야말로 진실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리고 진실 그 자체는 상상이었다”라는 것입니다.
‘들어가며’라는 글은 ‘그리스인들은 신화를 믿었는가?’라는 질문이 대답하기 곤란한 것이라고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믿은 것은 아니었으며 심지어는 ‘시인이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신화를 믿는 혹은 의심하는 나름의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앞서 제가 가졌던 의문에 해답이 될 듯합니다. 그런가하면 ‘그리스인들이 신화를 믿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99쪽)’라고도 적었습니다.
고대 사료의 진위를 가리는 일이 어려운 것은 고대 역사가들이 쪽 하단에 주석을 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독창적인 연구이든 이차 사료의 가공이든 자신의 말이 그대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도 “나의 본분은 전해들은 바를 이야기하는 것이지 그걸 모두 믿는 것이 아니다.(39쪽)”라고 했다고 합니다.
서기 2세기 무렵의 그리스 지리학자 파우사니아스는 미노타우루스에 관한 테세우스의 신화에서 미노타우루스는 존재하지 않았으나, 테세우스의 역사성은 의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보다도 4세기 전의 역사가 필로코로스는 끌려간 아이들은 미노타우루스에게 잡아먹힌 것이 아니라 운동경기 우승자에게 상으로 제공되었다고 이해했습니다. 우승자는 타우로스(황소)라는 이름의 흉포하고 기운이 센 남자였다는 것입니다. 타우로스는 미노스왕의 군대를 지휘했기 때문에 미노타우로스라는 신화가 생겨났을 것이라고 설명했다고 합니다.
그리스 신화는 역시 모종의 대사건, 예를 들면 ‘도리아인의 침입’의 서서시적 과장일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화 혹은 전설은 역사적 사건에 대한 집단기억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저자는 “하나의 세계는 그 자체로서 허구일 수 없다. 우리가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따라 허구가 될 수 있을 뿐이다. 허구와 진실의 차이는 객관적이지 않으며, 사물 자체 안에 있지 않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고, 주관적으로 우리가 그것을 식별하느냐에 달려 있다.(60쪽)”라고 한 대목을 읽으면서 요즈음 가짜뉴스가 횡행하고 있는 현실을 떠올렸습니다. 가짜뉴스를 생산하는 사람들은 대중이 현혹되기를 기대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진위를 분명하게 들여다보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자 역시 “신화가 거짓과 더불어 얼마간의 진실을 내표한다면, 가장 긴급한 과제는 이야기꾼의 심리를 분석하는 게 아니라 거짓을 조심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137쪽)”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