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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길고 아픈 밤 - 죽음을 미루며 아픈 몸을 생각하다
뤼방 오지앙 지음, 이세진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12월
평점 :
절판
전립선암 진단으로 수술을 받은 지도 4개월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수술에 더하여 방사선치료나 화학치료까지는 받지 않고서 추적관찰을 하고 있습니다만, 암종이 남아있을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하는 상황이라서 마음이 편치는 않습니다. 그런 까닭에 암을 겪은 분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나의 길고 아픈 밤>도 그런 책읽기의 일환입니다.
이 책을 쓴 뤼방 오지앙박사는 나치의 인종청소에서 살아남은 유대계 폴란드인입니다. 철학과 사회인류학을 전공하고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에서 근무했습니다. 분석철학과 도덕철학을 주로 연구하였습니다. 64세가 되던 해에 췌장에 생긴 낭성선암종으로 진단받고 투병하는 과정에서의 사유를 정리한 것입니다. 우리말 제목은 <나의 길고 아픈 밤; 죽음을 미루며 아픈 몸을 생각하다>이지만 원저의 제목은 <천일야화, 비극이자 희극인 질병(Mes mille et une nuits: la maladie comme drame et comme comedie)>입니다.
저자는 ‘중병 환자가 의료진과 주위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연출에 쏟아 붓는 노력에서 『천일야화』의 이야기들을 떠올렸다.’라고 적었습니다. 잘 아는 것처럼 천일야화는 사산왕조의 왕 샤 리아르가 왕비의 부정을 알고는 새 왕비를 들어 하룻밤을 지낸 다음에 죽이는 일을 반복하다가 대신의 딸 셰에라자드가 자발적으로 왕비로 나서 목숨을 구한 이야기입니다. 매일 밤 왕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는데 아침이 되면 한참 재미있을 만한 시점에 이야기를 중단하는 바람에 뒷이야기를 듣기 위하여 처형을 미루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책의 저자는 암과 싸우는 과정이 하루하루 죽음을 미루는 것에 비유한 셈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수술을 받은 뒤에 화학요법과 방사선치료를 받았지만 여러 차례에 걸쳐 재발하면서 화학요법을 반복적으로 받던 끝에 68세가 되던 해에 죽음을 맞았습니다. 철학자답게 죽음에 초연하고 치료과정에도 다양한 시각을 보여 암과 싸우는 환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췌장을 포함한 간, 담낭 및 담도 등 상복부 장기에 발생하는 암은 담즙이나 췌장액이 배출되는 통로를 막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증상이 뚜렷하지 않아 초기에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즘에는 초음파검사가 있어서 진단이 용이해진 까닭에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저자는 환자와 의사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암으로 진단받은 뒤에 평범한 사람들처럼 주치의를 바꾸어 다른 의사를 찾아가기도 하였습니다. ‘철학자도 세상 모든 사람처럼 건강문제로 고민하다’라는 글제목을 붙여놓은 것처럼, 저자는 갑작스러운 암진단에 제법 초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엉망진창 종잡을 수 없는 느낌이 들었다고 합니다. 혼란스럽고 불안정하며 일관성이 없는 경험이었는데, 이 경험을 재구성하기에는 쿠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영화 <라쇼몽(羅生門)>에서 구사한 서사기법이 안성맞춤하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즉 동일한 사건을 다양한 증인의 시점, 혹은 동일인이라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지는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저도 전립선암이 의심된다는 종합검진 소견을 받아드는 날부터 치료과정을 기록하는 투병기를 적기 시작했습니다만 저자의 경우는 화학요법을 받는 과정에서 투병과정을 일기형식으로 적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저자는 질병에 주는 고통을 둘러싼 전통적인 관념이라 할 고통효용론과 회복탄력성을 비판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결국 질병과 관련된 다양한 질문에 명쾌한 답변을 얻어낼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 저자는 ‘형이상학을 끌어들이지 않고 질병을 사유’하고자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