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
애나 캐번 지음, 박소현 옮김 / 민음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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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도 생소한 작가 애나 캐번의 <아이스>를 읽게 된 것은 쏟아질 듯 매달린 고드름 밑을 달리는 차의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기 때문인 듯합니다. 애나 캐번을 오늘날 가장 신비한 작가라고 한 것도 흥미로웠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뽑아놓은 내가 살던 세상 대신에 이제 곧 얼음, , 고요, 죽음만이 존재하게 될 것이었다. 폭력도 전쟁도 피해자도 더는 없으며 얼어붙은 침묵, 생명의 부재 외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인류의 궁극적 성취는 자기 파괴뿐만 아니라, 나아가 모든 생명의 파멸이리라. 생동하던 세계가 죽음의 행성으로 변화하는 것 말이다.”라는 대목의 의미를 파악해보려는 호기심도 한 몫을 했습니다.


이 소설의 맨 앞에는 영국의 SF소설가 크리스토퍼 프리스트의 서문이 붙어있습니다. 그는 이 작품이 슬립스트림(slipstream)이라는 문학형식으로 쓰인 작품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문학형식은 1980년대 미국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우주여행, 외계인 침입, 시간 여행과 같이 익숙하면서도 진부한 대중적이면서 상투적인 문학형식과 차별화한 작품들을 이르기 위한 용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무라카미 하루키나 폴 오스터가 대표적인 슬립스트림 형식의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애나 캐번(1901~1968)이 발표한 작품들은 슬립스트림이라는 문학형식을 구분하기 훨씬 이전에 발표된 것이므로 이런 문학형식의 효시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내 캐번의 작품들은 생전에 작가로서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사후에 문학비평가들에게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그녀의 작품들이 소설계의 관습적 맥락에서 잘 팔리기 어려운 탓이었고, 미국 출판계에서 틈새시장을 개척하기 위하여 새로운 문학형식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추이에 따른 것이라고 했습니다.


크리스토퍼 프리스트는 서문에서 이 같은 작품들은 줄거리나 내용을 설명하려는 시도 없이, 환상을 비추는 거울에서 거울로 옮겨 다니며 왜곡된 렌즈를 통해 평범한 세계의 뒤틀린 이미지를 보여준다.(11)”라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아이스>를 읽다보면 이야기의 전환이 맥락이 전혀 없는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반복합니다.


주인공은 화자, 젊은 여자 그리고 남자인데 화자와 젊은 여자는 성격이 분명하지만 남자의 성격은 상황에 따라 바뀌고 있습니다. 세 사람의 성격도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다만 화자는 모 국가의 정보부 요원으로 보이고, 남자는 때로는 교도소장이라 불리는 등, 일종의 관리자로 보입니다.


나는 길을 잃었다. 이미 황혼이었다. 몇 시간째 운전 중이었고 휘발유도 거의 다 떨어진 상태였다.’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혼란스러운 책읽기의 서막을 알리는 듯하였습니다. 이 지역에 어떤 불가사의한 비상사태에 임바했다는 소문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찾아온 화자는 도착하자마자 그 여자의 존재에 강박적으로 집착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는 정보요원이라면 있어서도 안될 일이 아닐까요? 아니면 갑자기 그녀가 화자를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로 간 충격에서 집착하는 것일까요?


그녀를 찾아가는 길에 화자가 보는 환상은 <아이스>의 세계가 곧 얼음으로 뒤덮이는 파국적인 상황을 맞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사태가 위중함에도 불구하고 여러 나라들 사이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고, 사람들은 이리저리 몰려다니고 있습니다. 누구 하나 비상사태에 제대로 대응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비상상황이 인류로 인하여 생긴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파국적 사태는 피할 길이 없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화자가 그녀를 찾아다는 이유와 그녀가 기를 쓰고 화자를 피하려는 이유는 이야기의 결말 부분에 조금 드러나기는 합니다


서로의 행동에 대한 오해를 풀고, 두 사람은 차에 올라 다가오는 파국을 피하려 하지만 화자는 운명을 피할 길이 없음을 예감합니다. “이 세상은 이마 종말을 맞이하고 있었다. 상관없었다. 아직 이 차가 우리의 세계이니까. 조그마하고 밝게 빛나는, 온기가 감도는 따뜻한 방. 냉담하게 얼어붙어 가는 이 광활한 우주에서 우리가 가진 작은 집,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서로에게 바싹 붙어 앉았다. 여자는 더 이상 긴장이나 의심 없이 내 어깨에 몸을 기댔다.(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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