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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쓸모 -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들
박산호 지음 / ㅁ(미음) / 2023년 2월
평점 :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들‘이라는 부제가 달린 <소설의 쓸모>는 제목에 이끌려 읽은 책입니다. 책읽기를 좋아하고 소설도 적지 않게 읽어왔는데 그렇게 읽은 소설들을 어떤 쓸모로 사용할 수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결론을 미리 말씀드리면 다소 실망이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독후감 모음이었다는 생각과 여성주의적 관점을 중심으로 한 작가의 생각이 쉬이 와 닿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들‘이라는 부제가 이 책을 읽은 모든 독자에게 부합하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박산호 작가는 번역가이자 수필가입니다. 주로 범죄소설을 번역해왔기 때문인지 <소설의 쓸모>에서 다룬 17개의 소설들도 대부분 범죄소설들입니다. <너를 찾아서>라는 심리소설을 쓰기도 했습니다. <소설의 쓸모>에서 다룬 17개의 소설들 가운데 유일하게 폴라 호킨스의 <걸 온 더 트레인> 하나를 읽었을 뿐입니다. 추리소설을 탐닉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박산호 작가와는 관심이 겹치지 못한 까닭인 듯합니다. <걸 온 더 트레인>을 읽은 것은 열차와 관련된 책을 써보려 생각할 무렵에 읽은 것입니다.
<소설의 쓸모>에서는 작가가 살아온 날들을 정리하기 위하여 작가가 번역을 하거나 읽은 소설들을 인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들‘이라는 부제가 적절한가 싶었습니다. 외국 작품을 우리말로 옮길 때는 원어의 의미에 걸 맞는 우리말을 찾아 써야합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 나의 주 양육자는 엄마의 엄마, 즉 할머니였다”라는 들어가는 글의 첫 번째 문장에서부터 분명치 않은 우리말을 만나고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엄마의 엄마를 할머니로 일반화한 것은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할머니라는 우리말은 나이가 든 여성을 이르기도 하지만, 아버지의 어머니를 이르는 친할머니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어머니의 어머니는 외할머니라고 구분하여 쓰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습니다.
각설하고 매일 밤 외할머니께서 이야기를 해주셨다는 말씀을 읽으면서 부러웠습니다. 어렸을 적에 할머니나 외할머니 댁에서 머물던 날이 적지 않았지만 이야기를 해주셨던 기억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고모님이 가끔 집에 찾아오셨을 때 옛날이야기를 해주셨던 기억은 있습니다. 이야기를 즐겨 해주셨지만, “이야기 너무 좋아하지 말어. 이야기 좋아하는 사람은 가난하게 살아”라고 말씀해주셨다는데, 아이들을 헷갈리게 만드는 이중적인 말씀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앞서 작가가 여성주의적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듯합니다. “나는 전라도 출신이라서, 싱글맘의 딸이라서, 다시 내가 싱글맘이 되어서 차별당했던 기억을 떠올렸다”는 대목을 읽으면서 차별을 당했다는 것은 본인만의 생각이 아니었을까 생각했습니다. 저 역시 전라도 출신입니다. 젊어부터 전라도가 차별을 당한다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차별을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여자는 이렇게 항상 아이를 낳는 도구가 되어야 하는가‘라는 저자의 생각에도 동의하기 힘들었습니다. 아이를 남성이 낳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낳는 일은 도구로서 해야 하는 의무가 아니라 여성이라는 특별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최근에 가정에서의 아버지의 위상이 추락하는 것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요즈음 여성들은 결혼하지 않을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데 이는 삶의 방향을 제대로 잡은 것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삶의 의미는 현재의 상황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앞두고 살아온 날들을 되짚어 볼 때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자녀 없이 홀로 죽음을 맞을 때의 심정이 과연 어떨지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결혼하지 않을 자유를 생각하지는 않을 듯합니다. 그런 점에서 정세랑 작가의 <아라의 소설1>에서 인용했다는 “어떤 모퉁이를 돌지 않으면 영원히 보이지 않는 풍경이 있으니까”라는 대목이 이 책에서 유일하게 마음에 와닿는 대목이었습니다. 물론 작가의 해석은 저와는 다른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