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플라인 1
볼프람 플라이쉬하우어 지음, 김청환 옮김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05년 8월
평점 :
품절


사실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는 너무 많은 작품들을 만나기 때문에 이미 알고 있는 작품이거나 특별하게 강렬한 인상을 받은 작품을 제외하고는 기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작가 미상의 <가브리엘 데스트레와 그 자매>라는 목판화를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고 하는데, 루브르박물관에서 이틀이나(?) 보낸 저의 기억에는 전혀 남아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독일작가 볼프람 프라이쉬하우어는 그렇지 않았던가 봅니다. 1986년 루브르 박물관에서 만난 이 작품의 배경을 추적한 끝에 <퍼플라인>을 썼다고 합니다. 책에서 소개한 그림을 보니 의문을 가질 만도 합니다. 욕조에 두 여인이 들어가 있는데, 한 여인은 다른 여인의 젖꼭지를 꼬집는 듯하고, 그 여인은 반지를 손가락으로 집어 들고 있는 묘한 상황입니다. 가브리엘 데스트레 자매라고 합니다.


작가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킨 또 다른 요소는 그림의 제목이라고 합니다. 프랑스 역사를 자세하게 알지 못한 저로서는 그저 묘한 그림이라 생각하고 말았겠습니다만, 가브리엘 데스트레는 부르봉 왕조를 개창한 앙리4세의 정부였고, 임신6개월째 왕비로 승격되기 직전에 죽음을 맞은 여인입니다. 그래서 그녀의 죽음에 관한 여러 가지 주장들이 있는 모양입니다.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16세기 프랑스는 가톨릭과 위그노파로 대표되는 신교와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선 때였습니다. 신교를 믿는 앙리4세가 왕이 되는 과정에서 스페인의 가톨릭 세력과 전투를 치러야 했고, 로마교황청과의 정치적 알력을 조정해야 했습니다.


작가는 가브리엘 데스트레의 죽음을 뒤쫓은 400년 전의 자료를 건네받아 이를 확인하는 과정과 확인한 내용을 이야기로 꾸미는 액자소설의 형태로 가브리엘 데스트레의 죽음을 확인합니다. 그녀의 죽음에는 심지어 앙리4세를 포함하여 이해관계가 얽힌 여러 사람들이 관련되어 있다는 음모론과 임신6개월에 불의의 자간증으로 죽음을 맞은 것이라는 설명이 나와 있다고 합니다.


자간증은 임신20주 이후에 고혈압이 나타나고 소변에 단백질이 배출되는 전자간증, 즉 임신중독증에서 비롯됩니다. 전자간증을 방치하다보면 분만전후 혹은 임신말기에 전신의 경련발작을 일으키고 의식불명에 빠지기도 하는데, 임산부와 태아의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위험한 질환입니다. 출혈이나 감염과 함께 중요한 임신중 모성사망의 3대 원인이기도 합니다. 저도 수련의 시절에 전자간증 환자를 담당한 적이 있습니다. 자간증으로 발전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썼던 기억이 있습니다. 임신6개월에 자간증으로 발전하여 죽음을 맞는 경우가 얼마나 되는지는 의문입니다.


액자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까닭에 이야기의 전체 맥락을 파악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1599년에 일어난 가브리엘 데스트레의 죽음의 원인을 추적한 19세기 역사가 모르슈타트의 미완성 연구결과를 완성하는 형태의 겉소설과 모르슈타트의 원고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가브리엘 데스트레를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가 속소설을 이루고 있습니다.


앙리4세와 가브리엘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를 보면 당시 프랑스 사회의 성관념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난잡했던 것 같습니다. 사건의 전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가브리엘 데스트레와 그 자매>를 비롯하여 <욕조 속의 가브리엘 데스트레> <목욕 중인 다이아나> 등 여러 미술작품들이 등장하는데 화가가 밝혀진 것도 있지만 작가 미상의 것도 적지 않은 듯합니다. 같은 분위기의 작품이 십여점이나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이는 원작을 바탕으로 그린 모작이 여럿인 셈입니다. 모작은 습작의 형태로 그려진 것도 있지만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그린 경우도 있을 것이라는 가정이 이 이야기의 중요한 축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어떻든 가브리엘의 삶과 죽음에 관한 의문을 풀어내려는 작가의 시도가 충분한 결과를 얻었는지는 아직 분명치가 않아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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