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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탑 ㅣ 하서명작선 57
현진건 지음 / (주)하서 / 2008년 12월
평점 :
품절
지난 9월 스위스를 여행하면서 마테호른을 바라보는 길을 따라 걷게 되었습니다. 길 중간에 작은 연못이 있어서 마테호른을 연못에 담아 사진을 찍었습니다. 연못에 비치는 마테호른에 관한 이야기를 적으면서 경주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 축조에 관한 전설을 찾아보았습니다.
영조 16년(1740년)에 동은(東隱) 화상이 편찬한 <불국사 고금창기>에 따르면,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은 당나라에서 온 장공(匠工)이란 석공이 축조하였다고 합니다. 누이동생 아사녀가 찾아왔지만 대사가 마무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오빠를 만나지 못한 아사녀가 영지에 가보았는데, 다보탑은 그림자를 보았으되 석가탑은 1년이 넘게 그림자를 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결국 아사녀는 영지에 몸을 던졌다고 합니다.
빙허 현진건은 다보탑과 석가탑 그리고 영지에 관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무영탑>을 썼다고 합니다. 다만 시대적 배경을 통일신라로 하고, 아사달과 아사녀는 백제 사람으로 설정하였고, 구슬아기를 중심으로 한 신라 귀족들을 등장시켜 갈등 구조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소략한 이야기를 가지고 삼국 통일 이후의 사회상을 그려냈습니다. 신라귀족 구슬아기가 백제의 석수 아사달을 연모하는 모습에서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이 가능했음을 시사합니다. 그런가하면 아버지 사후에 홀로 남은 아사녀가 주변 남정네의 표적이 된다거나 경주로 남편을 만나러왔다가 뚜쟁이를 만나 곤경에 빠졌을 뿐 아니라 아사달이 신라여인과 정분이 났다는 풍문을 듣고는 그만 영지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는 비극으로 이야기라 마무리됩니다.
<무영탑>은 1938년부터 1939년 사이에 동아일보에 연재되었습니다. 지금은 일상적으로 사용되지 않는 우리말들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그런가하면 다보탑과 석가탑의 제작과정이나 그 모습에 관한 설명도 가슴에 와 닿습니다. 먼저 다보탑의 형태에 관한 구체적 설명도 그렇지만 “저것이 돌로 된 것일까. 저것이 단단하고 육중한 돌로 된 것일까. 돌을 어떻게 다루었으면 저다지도 어여쁘고, 아름답고, 빼어나고, 의젓하고, 공교롭게 지어낼 수 있었을꼬(21쪽)”라고 감탄하는 대목이 안성맞춤합니다.
그런가하면 석가탑에 관한 대목도 공감이 갑니다. “층마다 술밋한 돌병풍이 둘리고 그 병풍 네 귀에 접어 넣은 듯한 돌기둥이 한데 어우려져 답신을 이루었는데, 그 거칠 것 없이 쭉쭉 뻗은 굵은 선이 어디인지 장중하고 웅경한 품격을 갖추어 비록 다보탑과 같이 잔재미는 없을망정 그 수법이 범상치 않을 것을 일러준다.(23쪽)”라고 적었습니다.
사실 다보탑보다도 석가탑을 조성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온전한 한 덩이의 돌을 쪼아 탑 한 층을 완성했기 때문입니다. 아사달이 석가탑을 조성하는 장면을 묘사한 대목 가운데 신흥(神興)이 올라 3일을 꼬박 일에 매달리는 대목이 있습니다. “바위덩이에나 지질린 것 같은 답답하고 캄캄한 머리 가운데 뚜렷인 한 가닥 광명이 어릿거린다. 그 실낱같은 빛줄이 차차 굵어지다가 떼구름을 쫓고 햇발이 붉어지듯 갑자기 머릿속이 환해지면 어느 모를 어떻게 갈기고 어디를 어떻게 쪼아야 될 것도 따라서 환해지는 것이었다.(88쪽)”
미국의 콜로라도에 국립공원이 여럿 있습니다만, 브라이스 국립공원은 다보탑처럼 현란하고 절묘하다는 느낌이 드는 반면, 자이언 국립공원은 석가탑처럼 선이 굵은 맛이 있습니다. 브라이스 국립공원이 좋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이언 국립공원이 좋더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브라이스 국립공원이 여성적이라면 자이언 국립공원은 남성적인 멋이 있습니다. 다보탑과 석가탑도 그와 비슷하다는 생각입니다.
스위스 여행기로 돌아가면 알프스를 조성한 장공(匠工)이 있었다면 영감이 떠오르는 순간 정과 망치를 들어 단숨에 마테호른을 지어냈지 싶었습니다. 영지에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았던 석가탑과는 달리 능성 아래 있는 작은 연못에 제 모습을 드리운 것은 다른 점이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