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와 그의 주인 - 드니 디드로에게 바치는 3막짜리 오마주 밀란 쿤데라 전집 15
밀란 쿤데라 지음, 백선희 옮김 / 민음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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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밀란 쿤데라의 전작 읽기에 도전한 적이 있습니다. 전작 읽기를 마친 뒤에 소개된 작품들 가운데 아직 읽지 못한 책이 있으니 전작 읽기가 완성된 것은 아닌 셈입니다. <자크와 그의 주인>은 희곡입니다. 이 작품이 탄생한데는 도스토옙스키의 <백치>를 희곡으로 각색해보라는 제안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쿤데라의 조국이 소련에 점령당한 상황에서 이 작업을 진행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극단적인 행위와 어두운 깊이, 공격적인 감정들로 이루어진 그 세계가 혐오스러웠다라고 했습니다.


대신 드니 디드로의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의 각색을 제안했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를 러시아의 무거운 비합리성이 내 나라를 짓눌렀을 때 나는 서양 근대의 정신을 강하게 들이마시고 싶은 본능적인 욕구를 느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그 정신은 지성과 유머의 환상의 향연인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이 아닌 다른 어디에도 그만큼 진하게 농축되어 있는 것 같지 않았다라고 들었습니다.


작가는 희곡 <자크와 그의 주인>의 서두에 적은 변주서설을 통하여 이 작품을 쓰게 된 사연을 길게 적었습니다. 그리고는 <자크와 그의 주인>이 각색이 아니라 자신의 작품으로 디드로에 대한 변주이자 디드로에게 바치는 나의 오마주라고 했습니다.


이 작품의 구성은 자크와 그의 주인이 여행하는 가운데 들른 그랑세르 여인숙이 무대가 됩니다. 자크와 그의 주인 그리고 여인숙의 주인이 전하는 포므레 부인의 사랑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무대는 앞 부분이 낮고 뒷부분이 높은 연단 형태로 되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앞부분은 현재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되고, 뒷부분은 과거에 자크와 그의 주인 그리고 여인숙의 여주인의 사랑과 관련된 과거의 사건에 관련된 인물들이 등장하는 공간입니다.


세 사람의 사랑이야기는 진정한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라기보다는 여러 사람이 개입되어 있는 가운데 뒤틀린 관계가 성립된 것으로 보입니다. 자크의 사랑은 친구의 연인에게 동정을 빼앗긴 사연을, 주인의 사랑은 사랑하는 여인을 친구에게 빼앗긴 사연을, 여인숙의 여주인 포므레 부인은 후작의 배신을 처절하게 복수한 사연을 펼쳐냅니다.

이원화 되어 있는 무대를 활용하는 까닭에 그랑세르 여인숙의 여주인이 어느새 포므레 부인 역할을 하고, 자크가 아르시 후작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이중적 역할은 등장인물들과 그들의 사랑이 서로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해지는 것 같습니다.


세 사람의 사랑이야기가 펼쳐지다보니 자크와 그 주인이 왜 그리고 어디로 여행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한 대목도 나오지 않습니다. 작크와 그의 주인도 자신들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모르고, 그저 저 높은 곳에 씌어 있는 대로 따른다는 것입니다. 이미 운명에 정해진 대로 따라간다는 운명론자의 입장인 셈입니다.


작가의 3막의 진행속도도 지정하고 있습니다. 1막은 알레그로(Allegro, 빠르게 명랑하게) 2막은 비바체(Vivace, 화려하게 빠르게) 그리고 3막은 렌토(Lento, 길게 끌어 느리게)로 하라는 것입니다. 극의 진행을 협주곡을 연주하듯 하라는 것입니다.


작가는 <웃음과 망각의 책>에서 변주의 개념에 대하여 설명한 바 있습니다. 음악의 서사시라 할 교향곡이 외부 세계의 무한을 가로지르는 여행이라면, 변주는 다른 공간에 대한 탐험으로, 내면세계의 무한한 다양성 속으로 떠나는 여행이라고 하였습니다.

희곡은 등장인물들의 대사로 작가의 의중이 전해지기 때문에 아무래도 함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등장인물의 의중을 작가가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디드로의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을 읽어봐야 쿤데라의 <자크와 그의 주인>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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