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 슈필라움의 심리학
김정운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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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심리학자이면서 화가이자 작가인 김정운님의 슈필라움에 관한 수필집입니다. 독일어 슈필라움(Spielraum)은 놀이(Spiel)와 공간(Raum)이 결합된 단어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율의 공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그 의미를 정확하게 담아낼 적당한 우리말은 없고, 그저 여유 공간정도로 옮길 수 있다고 합니다.


요즈음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인용하는 글을 꽤나 만나게 됩니다. 제 경우는 대학을 졸업하고 수련을 마친 다음에는 대부분의 직장에서 나만의 공간을 배정받아 일해 왔습니다. 물론 공개된 장소에서 일한 직장도 있었고, 두 사람이 방을 공유한 적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역시 슈필라움에 해당하는 공간이 있어야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습니다.


<바닷가 작업실에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는 뒤늦게 미술을 공부하고 여수에 정착한 저자가 바닷가에 화실을 겸한 슈릴라움을 건설하는 과정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일상을 통하여 겪는 다양한 경험을 적어내기도 합니다. 몇 대목을 소개하면, “뭍에서 보는 석양과 바다 한가운데서 배를 타고 보는 석양은 완전히 다르다. 벌겋게 흔들리는 가을 바다는 임마누엘 칸트가 이야기한 장엄의 미학(Ästhetik des Erhabenen)’의 완성이다. 서술할만한 미사여구가 없다. 그저 압도당할 뿐이다.(39)” 사실 페루의 와카치나 사막에서 지켜본 해넘이도 꽤나 장엄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바다 한 가운데서 해넘이는 본 기억도 있습니다만, 압도당했던 기억은 분명치 않습니다.


요즈음 중국에서는 시진핑 주석의 연임과 관련하여 술렁거리는 모양입니다. 그런 사정을 예견이라고 하듯, 시진핑주석에 관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시주석이 작가의 심리적 기피인물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대화 상대에 대한 존중의 단서가 없는 표정과 자세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존귀와 위엄을 지키느라 그 어떤 정서적 단서도 드러내지 않는 인간이 바로 시주석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돌아보게 됩니다.


쉽게 공감할 수 없는 대목도 있습니다. 독일의 공영방송 체데에프(ZDF)가 북한 관련 기록영화를 방영했는데, 낭송하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남과 북 모두 같은 민족이라며 통일하겠다고 하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없다라고 마무리하는 순간 충격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동독과 서독이 통일을 이룬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남한과 북한이 같은 민족이 아니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민족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것은 19세기 말이라고 합니다. 메이지시대 구미 각국을 여행한 구메 구니타게(久來邦武)1878년 발표한 미구회람실기(米歐回覽實記)에서 처음 사용하였다는 것입니다. 사실 민족이라는 단어보다는 핏줄이라는 우리말이 더 적절하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한반도와 요동벌에 걸쳐 살던 우리네 조상들은 이질적인 면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수천 년 내려오면서 피가 섞이고 어울려 함께 살아온 터라 결국은 한 핏줄이 된 셈입니다. 남과 북이 분단되어 왕래가 끊긴 것은 수천 년의 세월과 비교되지 않는 불과 80년도 안 되는 세월입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통일이 되면 서로 어울려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자기만의 방에 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연간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을 가진다면 여자들도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했는데, 불과 백여 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의 남자들에게도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돌이켜보니 남녀가 유별했던 조선시대에는 왠만하면 남자들은 사랑에 거처하였고 여자들은 안채에 거처했습니다. 기본적으로 남성과 여성은 자신만의 공간을 확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아파트에 거주하면서 남자의 공간은 사라지고 거실이라는 공용의 공간만이 남아있는 셈이라는 것입니다. 슈필라움이라 할 만한 공간을 가질 수 없는 구조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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