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스테르담의 커피 상인
데이비드 리스 지음, 서현정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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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암스테르담의 상품거래소에서는 비교적 생소한 상품인 커피가 처음 상장되던 이야기를 다룬 이 이야기의 시대적 배경은 1659년입니다.


기원전 네덜란드에는 켈트인과 게르만인들이 살았는데 기원전 50년 카이사르의 원정으로 로마제국에 편입되었습니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뒤로는 800년에 샤를마뉴대제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면서 프랑크왕국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14세기에는 브르고뉴 공작령이 되었다가 15세기에는 합스부르크왕국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합스브르크 가문의 펠리페1세가 스페인 왕이 되면서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펠리페1세의 손자 펠리페2세가 왕위를 물려받으면서 중앙집권을 강화하면서 네덜란드 사회의 반발이 커졌고, 1566년 독립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1588년 공화국으로 독립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한편 스페인은 1492년 아라곤의 페르난도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의 결혼으로 성립한 공동왕국의 주도로 800년에 걸친 이슬람 지배를 종식하고 이베리아반도의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1492년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해였습니다. 스페인은 신대륙에서 발견한 은을 들여와 황금기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통일 이후 이슬람과 유대교 등 이교도를 탄압하여 가톨릭으로 개종하거나 추방하는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스페인을 떠난 유대인들은 이교도에 대하여 관대했던 네덜란드로 주로 이주하였습니다.


유럽대륙 곳곳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은 서로의 관계망을 이용하여 상거래를 주도하였기 때문에 네덜란드는 곧 상거래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독립 후에 네덜란드의 상인은 남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미국, 오세아니아 등지에 식민지를 건설하는 등 황금기를 맞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영국이 올리버 크롬웰의 항해조례(1651)를 내세워 중개무역과 물류업으로 중간수익을 얻던 네덜란드에게 치명적인 위협을 가하던 시절입니다.

암스테르담의 선물거래소를 중심으로 유대 상인들 간의 암투를 다룬 <암스테르담의 커피 상인>은 유대인들은 배타적이고 결속을 잘 한다는 생각이 잘 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책읽기였습니다. 이익을 내기 위해서는 같은 유대인 심지어는 가족에게도 등을 돌릴 수 있는 민족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독일군이 운영했던 강제수용소 안에서도 독일군에 부역하는 유대인들이 존재했다는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에티오피아에서 처음 실용화된 커피가 유럽인들에게 처음 알려진 것은 16세기 중반으로 이집트와 중동지방을 여행한 학자들이었고, 16세기 말에는 당시 동방무역의 거점이던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이탈리아에 소개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슬람 사람들이 애호하던 커피에 대하여 기독교 사람들은 이교도의 것으로 나쁘다고 생각했습니다. 1600년 클레멘스8세 교황은 커피를 맛본 뒤에 이 사탄의 음료는 이교도 놈들만 마시도록 놔두기에는 너무 맛있다!”면서 축복했다고 합니다.


1616년 커피의 본산지인 모카 항구에 왔던 네덜란드 상인 피터 판 덴 부르크가 커피나무를 본국에 가져간 뒤로 네덜란드에서 커피가 유행하였고,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모카에 상관을 세웠다고 합니다. 1640년 무렵부터 유럽은 커피를 본격적으로 수입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암스테르담의 커피상인>에서 이야기되는 커피 수입과 둘러싼 암투는 시대적으로 조금 일치하지 않는 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시 암스테르담의 선물거래소에서 물건을 사고팔던 방식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네덜란드 상인들의 장사 속은 참 대단하였구나 싶습니다. <암스테르담의 커피상인>에 나오는 장사술의 핵심인 콜옵션이나 풋옵션은 상거래를 잘 모르는 제 입장에서는 어떤 상황에서 이익을 내고, 어떤 사황이 되면 손해를 보는지 분명치 않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이야기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기 때문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끝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17세기 네덜란드 사람들의 일상을 읽을 수 있는 것은 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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