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치광이 여행자 - 그는 왜 미친 듯이 세상을 돌아다녔는가?
이언 해킹 지음, 최보문 옮김 / 바다출판사 / 202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는 왜 미친 듯이 세상을 돌아다녔는가?’라는 부제에 끌려 읽게 된 책입니다. 우리나라 같으며 서낭당이 있을 법한 커다란 나무아래를 무심히 지나는 여행자의 모습을 담은 표지그림도 눈길을 끌었습니다. 옮긴이는 저도 잘 아는 선배님이라서 더욱 끌렸는지도 모릅니다.


캐나다의 과학철학자 이언 해킹이 쓴 <미치광이 여행자>시대적 정신질환의 실재성에 대한 고찰이라는 부제를 달았다고 합니다. 옮긴이는 “‘한 때’ ‘한 지역을 풍미했던 한 정신질환이 과연 질병으로서 실체가 있었는지, 더 나아가 현재 논란이 되는 여러 정신질환의 실재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 독자에게 넌지시 물음을 덜지는 책이다(7-8)”라고 소개합니다.


정신과 영역은 의과대학시절 수업시간도 많지 않았던 탓에 아는 바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둔주(遁走)라는 병명이 생소했습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해리성 둔주(解離性遁走, dissociative fugue)는 자신의 과거나 정체감에 대한 기억을 상실하여 가정과 직장을 떠나 방황하거나 예정 없는 여행을 하는 장애이다. 세상 지식에 대한 기억은 보존된다.”라고 합니다. 상병의 조작적 정의를 보면 우리 주변에서도 이 상병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이 병으로 진단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합니다.


흔히 다중인격이라고 알고 있는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비롯하여 해리성 기억상실, 그리고 해리성 둔주를 포괄하는 해리성 장애로 진단되는 사람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에 따르면 2015년에 2,804명이었다고 합니다. 노숙자로 살아가는 분들 가운데 상당수는 해리성 둔주로 진단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무작정 여행을 떠나는 분들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싶기고 합니다.


정신질환으로서 둔주(遁走)1887년 프랑스 정신과의사 티씨에가 <미치광이 여행자>라는 제목의 학위논문을 발표하면서부터 1909년 낭트 총회에서 주요한 질환이라는 언급이 마지막으로 언급될 때까지 약 22년간 정신의학계의 화두였다고 합니다. 그마저도 프랑스를 중심으로 독일, 이탈리아 등 주변국가에서 관심을 끌었을 뿐,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질병으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미치광이 여행자>에서 둔주라는 평범하지 않은 행동이 정신질환으로 주목을 받았다가 스러지는 과정을 뒤쫓았습니다. 저자가 머리말에 요약해둔 이 책의 얼개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 책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문이 첫째 부분은 다시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2,3장은 당시 사건을 자세하게 서술한 것이고, 4장은 그 사건에 대한 의문들과 시대적 정신질환의 실재성을 숙고해본 것이다. () 서플먼트1,2,3은 이 책의 주제와 연관된 내용이다. 끝으로 우리의 스타 환자와 스타 의사에 관련된 몇 가지 기록을 번역하여 수록하였다.(18-19)”


우리는 몇 년째 우한폐렴이라는 감염질환이 대유행하는 시기를 헤쳐 나가고 있습니다. 저자는 둔주를 유행병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유럽이라는 한정된 지역에서 22년이라는 일정 기간 동안 발생, 확산, 감소, 소멸의 단계를 거쳤기에 유행병의 조건을 갖추었다라고 주석을 달았습니다. 유럽에서 둔주가 유행병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나폴레옹 전쟁과 보불전쟁 등 전란이 이어졌던 19세기 말의 어수선한 유럽대륙의 분위기가 중요한 요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둔주 환자 대부분이 남성이고, 군대와 연관이 된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탈영병이 처벌을 피하기 위하여 둔주라는 정신질환으로 면피하려는 의도에 정신과의사들이 동조해준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저자는 이런 현상을 생태학적 틈새라는 은유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둔주라는 정신질환은 정신과 의사 필리프 티씨에가 보르도에 있는 생탕드레병원의 알베르 피트르 병동에서 가스회사의 임시직원이던 26살의 알베르를 만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알베르는 가족도, 일도, 일상조차도 내동댕이치고 여행길에 올라 프랑스 국내는 물론 알제리, 콘스탄티노플, 모스코바 등 유럽대륙을 주하다가 부랑죄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거나 프랑스로 송환되곤 했다는 것입니다. 알베르의 삶을 읽다보면 정말 가능한 일이었을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둔주가 질병으로 성립하는 과정을 읽을 때는 책을 읽는 흐름이 느려지곤 합니다.


유행을 돌고 돈다고 하니 둔주 질환이 다시 유행처럼 번질 수도, 아니 이미 번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