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 손창섭 단편선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12
손창섭 지음, 조현일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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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창섭님의 <비오는 날>을 어떻게 읽게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만, 읽고서 상당한 충격이 남았습니다. <비오는 날>에 수록된 14편의 단편들 가운데 일제 때, 만주의 장자워프 마을을 무대로 한 ‘광야’와 6.25 사변 당시 수색인근을 무대로 한 ‘희생’, 그리고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신의 희작’을 제외하고 나머지 11편은 대체로 전후 부산을 무대로 혹은 환도 후 서울을 무대로 한 작품들로 보입니다.


14편의 작품들에서 보는 공통점은 등장인물들이 하나 같이 당시 사회의 밑바닥에서 어렵게 삶을 꾸려가는 존재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북출신들이 적지 않다는 점, 그래서인지 등장인물들의 대화나 지문에 북한말이 적지 않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가 마무리될 무렵에는 사라지거나 죽음을 맞는 경우도 많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작가가 살아가면서 보고 들은 이야기들이 작품이 놀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작가는 1922년 평양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할머니와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습니다. 소학교를 마치고 만주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교토와 도쿄에서 신문과 우우를 배달하면서 고학을 했는데, 우여곡절이 있어서 몇 군데의 중학교를 거쳐 니혼 대학에서 잠시 수학했다고 합니다. 19살이 되던 해 친구 동생인 지즈코와 동거생활을 시작하였고, 뒤늦게 책읽기를 시작하여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해방되고 1946년 단신 귀국하였지만, 별다른 기반이 없어 바닥 생활을 하다가 고향인 평양을 찾았다가 공산치하에서 반동분자로 낙인찍혀 역시 어려운 처지에 빠졌습니다. 1948년 월남하여 교사, 잡지사 편집 기자 등으로 일하면서 생활기반을 겨우 마련했습니다. 6.25사변 때는 부산으로 피난을 하였다가 남편을 찾아왔던 아내와 상봉하여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6.25사변이라는 대재난의 피해자들입니다. 작가에게 전쟁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세력의 대결의 장이 아니라, 노아의 홍수에 비견되는 대재난이었습니다. 노아의 대홍수에서는 신에 의하여 선별된 노아의 가족과 한 쌍의 동물들만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손창섭의 작품들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이 별다른 능력이 없이 나약한 존재들인데, 특히 병이 들거나 신체가 불편한 사람들이 번제의 제물처럼 스러져가는 모습이 안타까웠습니다.


6.25 사변이라는 엄청난 재난을 넘어온 우리나라에서 <비 오는 날>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기록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은 어쩌면 외면하고 싶다는 심리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던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인물들이 존재했음을 증언한 손창섭의 작품들은 주목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 오는 날>을 인용한 글이 아마도 술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이 단편집에 수록된 이야기들 가운데 술을 마시는 장면은 그리 많지 않을 뿐 아니라, 서술 또한 간략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 가운데 주목할 만한 대목은 표제작인 ‘비 오는 날’에서 볼 수 있습니다. 화자인 원구가 친구 동욱을 만나던 날에 있었던 일입니다.


“동욱(東旭)의 거처를 왕방하기 전에 원구(元求)는 어느 날 거리에서 동욱(東旭)을 만나 저녁을 같이 한 일이 있었다. 동욱(東旭)은 발보다 먼저 술을 먹고 싶어했다. 술을 마시는 동욱(東旭)의 태도는 제법 애주가였다. 잔을 넘어 흘러내리는 한 방울도 아까워서 동욱(東旭)은 혀끝으로 잔 굽을 핥았다.(51-52쪽)” 이 대목을 읽으면서 동경에 있는 국립연구소를 친선방문했을 때 일본의 선술집에서 일행들과 저녁을 먹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청주를 시켰더니 청주 잔을 굽이 있는 잔받침에 내왔습니다. 주인장이 청주를 따르는데 술이 잔을 넘어 받침에 고이도록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잔을 넘쳐 받침에 고이는 술만큼이 주인장이 손님에게 베푸는 호의라고 했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6.25사변과 같은 큰 재난이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삶이 힘든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어려움을 찾아내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한 노력을 얼마나 하고 있는지 생각해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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