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와 치유의 책
레지나 오멜버니 지음, 허형은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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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유럽에서 구경하지 못한 나라가 있습니다만, 그 옛날에도 유럽에서는 여행이 자유로웠는지 궁금하곤 합니다. <광기와 치유의 책>은 아빠 찾아 유럽 각국을 주유하는 젊은 여성의 이야기입니다. 16세기 말, 베네치아에서 개업하던 의사 에르네스토 바르톨로메오 몬디니씨가 <질병백과>를 저술하기 위하여 유럽 각국을 주유하면서 다양한 사례와 치료법을 수집하러 떠났습니다. 이탈리아, 독일, 네덜란드, 스코틀랜드, 프랑스를 거쳐 모로코에 이르는 엄청난 여정 사이에 딸 가브리엘라에게 근황을 전하는 편지를 보내옵니다. 여정이 수년을 넘어가면서 이제는 집에 돌아오지 않겠다는 편지가 날아오면서, 가업을 이은 가브리엘라는 아버지의 보증이 없다는 이유로 진료소 문을 닫아야 하는 처지입니다.


결국 가브리엘라는 하인 부부인 로렌초와 올미나와 함께 아버지를 찾아서 나서게 됩니다. 처음에는 파도바에 사는 카르다노 박사를 찾아 소식을 구합니다만, 별 소득이 없이 없어 아버지가 우울증을 앓게 되었다는 소식만 듣습니다. 파도바를 떠나 향한 곳은 독일의 튀빙겐입니다. 튀빙겐이 이르는 동안 폭우로 불어난 콘스탄츠 호수 인근에서 개울을 건너다가 말과 약상자를 잃었을 뿐 아니라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빠집니다. 바슬러박사라는 개업의사의 도움을 받았지만, 요즈음 문제가 되고 있는 성추행을 당할 위기를 겪기도 합니다. 튀빙겐으로 가는 길에 도움을 얻은 구두룬 부인은 약초학에 조예가 깊지만, 마녀로 몰릴까봐 조심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중세 시절에는 특히 여성이 민간요법을 행하는 경우에 흔히 마녀로 몰려 화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튀빙겐으로 가는 길은 험난했습니다. 신교가 득세를 하면서 가톨릭 신자나 여성들을 처형하는 사건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튀빙겐에서는 식물학 박사인 라이너 푸크스 박사를 찾아갑니다만, 아버지와 사이가 틀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하였을 뿐입니다. 그래도 푸크스 박사가 훔쳤던 아버지의 원고를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튀빙겐에서는 배를 타고 네덜란드의 레이던으로 가서 오테르스페이르 교수를 만나지만, 아버지의 종적은 여전히 감감하고, 이곳에서 아버지의 광증이 더 심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가브리엘은 이곳에서 해부학 실연에 참여하게 되는데 당인 해부대에 오른 외국인 남자는 튀빙겐에서 만났던 로흐너씨었습니다. 가브리엘에게 좋은 마음을 가지고 뒤따라왔던 것인데 불행한 일을 당한 것입니다.


다음은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입니다. 이곳에서는 철학과교수인 해미시 어카트 박사의 도움을 받았지만, 역시 아버지의 행적에 대한 소문은 별로 없었습니다. 겨울철이라서 여행이 힘든 탓에 도서관을 이용하면서 <질병백과>의 집필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던 중에 아버지가 프랑스 몽펠리에에 있는 주베르 박사와 서신을 교환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프랑스로 떠났습니다. 에든버러에 묵는 가운데 해미시 아카트 박사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 아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몽펠리에서도 별 소득이 없자 아버지가 편지를 보냈던 에스파냐의 산타엔그라시아로 향합니다. 하지만 피레네 산맥의 한 오두막에 머물던 날 곰의 습격을 받아 로렌초가 죽었습니다. 산타엔그라시아에서는 약재상의 도움을 받아 에스파냐 남쪽 해안에 있는 알헤세르로 갔습니다. 이곳에서 하녀인 올미나는 베네치아로 돌아가고 가브리엘은 탕헤르로 건너갑니다. 탕헤르에서는 사막에 있는 타라단테로 향했습니다. 아버지가 편지를 보낸 곳입니다. 그리고 타라단테에서 드디어 아버지를 만나게 됩니다. 아버지는 이미 광기가 도져 정신을 놓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곳 여관의 주인이 광에 묶어 보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딸을 만났기 때문일까요? 아버지는 이내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진리를 찾아 집을 떠나 10여년을 주유했지만 얻은 것은 광기뿐이었습니다. 정신이 멀쩡해도 살아남기 쉽지 않을 이국에서 광기로 혼란스러운 모진 삶을 이어간 것은 딸을 만나는 시간을 기다려온 것일까요? 아버지의 죽음을 대면한 가브리엘라는 , 아버지! 저 세상으로 훌쩍 뛰어가버리셨군요! 기억의 황야에서 저를 기다리고 계셨나요, 그래야 마침내 가버릴 수 있으니까? 어제 우리는 같이 웃었잖아요.(444)”


16세기 말에 하인 부부가 동행했다고는 하지만, 어린 처녀의 몸으로 유럽을 주유할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1590년 베네치아를 출발하여 1592년에 돌아갔을 것으로 짐작되니 정말 오랜 여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행경비를 어떻게 조달하였을 것이며, 보안문제는 어떻게 했는지도 궁금합니다.


책을 읽어가면서 당시 의학의 수준을 엿볼 수 있는 기록들, 그러니까 <질병백과>의 원고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의학이라고 하기 보다는 민간전승의 요법에 불과하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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