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 머리 여인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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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박물관>까지 오르한 파묵의 전작 읽기를 마친 것도 꽤 오래되었습니다. 전작 읽기를 마친 뒤에도 소설과 수필집에 국내에 소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만, 그 가운데 <빨강머리 여인>을 읽게 되었습니다.


<빨강머리 여인>은 그리스의 오이디푸스 신화를 주제로 삼았습니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할 운명이라는 신탁을 받고 내쳐진 오이디푸스가 결국은 신탁이 예언한 삶을 살고 말았습니다. 따지고 보면 오이디푸스의 불행은 자신의 몫이 아니라 선왕 라이오스의 잘못에 대한 징벌에 연좌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가혹한 신의 처사에 따른 희생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면 라이오스의 악행은 자신은 물론 아내와 자식, 손자와 손녀들에게까지 불행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테베의 백성들까지고 고초를 겪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오르한 파묵은 <빨강머리 여인>에서 그리스의 오이디푸스 신화와 이란의 민족서사시 <왕서>에 등장하는 뤼스템과 쉬흐랍의 비극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11세기 초 페르도우시(Ferdowsi)에 의하여 완성된 <왕서(Shahnameh)>는 우주의 창조부터 7세기 페르시아가 아랍사람들에게 정복될 때까지의 이야기를 모두 6만 여구의 시행에 담았습니다. 무려 7권의 분량에 달하는 <왕서>는 페르시아 최고의 서사시일 뿐 아니라 세계 최고의 서사시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데,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단테의 신곡, 셰익스피어의 작품들과 함께 세계 4대 문학작품으로 꼽힙니다. 우리말로는 아직 소개되지 않고 있습니다.


오르한 파묵이 <빨강머리 여인>에서 인용한 뤼스템과 쉬흐랍의 비극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이란의 영웅 뤼스템은 사냥을 나갔다가 길을 잃어 적국 투란 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비록 적이었지만, 투란의 왕은 뤼스템을 환대하였고, 타흐미네 공주는 뤼스템에 반하여 사랑을 나누게 됩니다. 하룻밤 사랑으로 타흐미네 공주는 쉬흐랍이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쉬흐랍이 장성하여 이란에 쳐들어갑니다. 이란의 폭군 케이카우스 왕을 폐위시키고 아버지 뤼스템을 왕위에 올리고, 자신은 투란으로 돌아와 투란의 폭군 아프라시아브를 폐위시키고 자신이 왕이 되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아버지 뤼스템은 아들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전투에 나서서 결국 쉬흐랍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왕서>에 나오는 뤼스템과 쉬흐랍의 이야기는 아들이 아비를 살해하는 오이디푸스 신화와는 다른 얼개를 가지는 것 같습니다.


파묵의 <빨간머리 여인>은 뤼스템과 쉬흐랍의 전설보다는 오이디푸스의 신화의 기본 설계에 따릅니다만, 오이디푸스 신화와는 등장인물이나 서사구조가 사뭇 다릅니다. 주인공 젬은 아버지가 집을 나간 뒤에 우물파기 명장 마흐무트 우스타를 따라 왼괴렌으로 우물을 파러 갑니다. 이곳에서 운명적으로 빨간머리 여인을 만나 하룻밤 사랑을 나누기도합니다. 우물파기 작업을 하면서 마흐무트를 아버지처럼 생각하게 되지만, 실수로 흙더미가 담긴 양동이를 떨어뜨리는 사고를 일으킵니다. 순간적으로 마흐무트가 죽었다고 생각한 젬은 다시 집으로 돌아와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하게 됩니다. 부부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지만, 아들이라고 생각한 건설업이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운명은 묘한 구석이 있어서 빨간머리 여인과 하룻밤 사랑으로 아들이 태어났는데, 사실은 빨간머리 여인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옛 애인이었습니다. 또한 죽은 줄 알았던 마흐무트는 빨간머리가 나서서 목숨을 구해주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유일하게 오이디푸스 신화와 일치하는 부분은 젬과 빨간머리 여인 사이에 태어난 아들 엔베르의 손에 젬이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빨간머리 여인>은 오이디푸스 신화의 변주인 셈입니다. 제가 오랫동안 품고 있는 오이디스푸스 신화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완성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책읽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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