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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 팬데믹을 철학적으로 사유해야 하는 이유 ㅣ 팬데믹 시리즈 2
슬라보예 지젝 지음, 강우성 옮김 / 북하우스 / 2021년 7월
평점 :
이제는 우한폐렴 사태가 어디를 향하는지 예측하는 일마저도 포기하고 눈앞에 벌어지는 상황을 변명하기에 급급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전 세계에 자랑하던 K-방역의 실체는 과연 무엇이었는지도 헷갈리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답답했던지 눈길을 붙든 책이 슬라보예 지젝이 쓴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입니다. 지젝은 우한폐렴이 시작한 직후인 2020년 3월에 <팬데믹 패닉>을 썼다고 합니다. 아직 읽어보지도 못했는데, 지난 1월에 이 책을 썼다고 합니다. 우한폐렴의 세계적 유행으로 휘청거리는 자본주의 체제의 앞날을 상상하는데 관심을 두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공산주의 체제의 앞날에는 큰 관심이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팬데믹 패닉>에서 지젝은 우한폐렴의 세계적 유행에 대하여 개별국가의 노력과 함께 전 지구적 연대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고 합니다.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에서는 우한폐렴의 세계적 유행에서 드러나고 있는 인종차별주의와 인기영합주의의 창궐에 주목하였습니다. 자유주의는 물론 좌파의 정치적 무능력에서 기인한다고 보았습니다.
우한폐렴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일찍이 중국이 시행하여 효과를 거두었던 ‘봉쇄’를 거론하기도 합니다. 공동체의 안전을 위하여 마스크를 쓰자는 주장과 개인의 자유는 소중한 것이기에 마스크를 쓸 수 없다는 주장이 대립하는 가운데, 타인과 함께 하지 못하는 자유가 무의미하듯 자유롭지 못한 개인들의 공동체는 통치의 대상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1부에서는 우한폐렴의 대유행으로 드러나는 다양한 사회적 현상들을 다루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와 지구온난화 그리고 착취 등은 동일한 투쟁을 요구한다는 이야기, 우한폐렴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한 각국의 지도자들이 보여주는 행태는 지난날의 영웅을 회상시킨다는 이야기에서 사회적 거리두기 시대의 성애는 어떻게 할 것인가 등의 잡스러운 주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2부에서는 급진적 정치학의 미래에 대한 논의입니다. 전시 공산주의, 민주주의의 한계에 이어 현재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등을 짚어보았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그의 주장이 지나치게 급진적이라는 생각에 더하여 공감이 가는 부분이 적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우한폐렴 사태로 인한 사회의 붕괴를 막는다는 이유로 내건 국민 기본소득이나 전 국민 의료보장 등의 조치들은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것이라는데, 이를 신우파계열의 인기영합주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좌파계열이 주도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기왕 이야기가 나온 김에 짚고 가자면, 시도 때도 없이 내세우던 K-방역의 대단한 성과는 지젝의 눈에 차지도 않았던지 대만이나 뉴질랜드의 성공적 방역에 대하여 언급하면서도 전 세계적으로 주목해온 우리나라의 K-방역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더라는 것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헌팅턴에서 격리조치에 반대하는 시위가 있었을 때 새라 메이슨이라는 사람은 “사회적 거리두기는 곧 공산주의다”라는 팻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정체가 모호한 조치가 끊임없이 지속되어 자영업자의 숨통을 조이고 있습니다. 개인의 자유마저도 우한폐렴을 통제하기 위하여 제한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기준이 적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앞서 간략하게 소개한 지난날의 영웅을 소환한다는 대목은 자크 라캉이 발표한 강연의 제목 <.... 혹은 그보다 못한(ou pire/or worse)>에 담긴 '아버지 혹은 그보다 못한(le pere ou pire)'이라는 문구는 “가부장에 맞선 방항의 최종 결과가 어떻게 쫓겨난 가부장보다 더 못한 지도자로 귀결될 수 있는지 엄중하게 경고하는 의미의 문구”라고 지젝은 설명합니다. 이 대목은 우리나라의 사례가 분명하지 싶습니다.
지젝은 현재 지구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중요한 이념적이고 정치적인 투쟁은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생태적 위기, 인종차별주의라는 세 가지 영역의 상관관계와 관련이 있다.(100쪽)”라고 짚었습니다. 별개의 문제인 듯한 세 가지 쟁점이 서로 연관이 있다는 설명을 이 책에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한폐렴의 세계적 유행으로 일어난 다양한 사회적 현상에 대한 지젝의 성찰에서 무언가가 손에 잡히는 듯하지만 그것이 정답인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