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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호실의 원고
카티 보니당 지음, 안은주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0년 3월
평점 :
랄프 이자우는 <비밀의 도서관>에서 누군가 써보려는 생각을 한 책도 모아두는 신비로운 도서관을 이야기했습니다만, 책으로 발표되지 않은 책에 관한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조르지오 반 스트라텐은 <사라진 책들; http://blog.naver.com/neuro412/221723888629>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사라진 원고에 관한 이야기를 담기도 했습니다.
<128호의 원고>는 반쯤 쓴 책의 원고가 작가의 실수로 잃어버렸지만, 누군가 이야기를 마저 완성하여 사람들의 손을 전전하면서 읽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읽은 사람들의 삶을 바꾸어놓기까지 했다는 내용입니다. <128호의 원고>는 잃어버린 원고의 내용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처음 이야기를 시작한 작가와 이야기를 완성한 작가를 찾는 과정을 담은 책입니다. 그것도 등장인물들 사이에 오간 편지로만 구성된 책입니다. 편지로 책을 구성할 수 있다는 발상이 놀라웠습니다.
물론 등장인물들이 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지만, 작가가 그런 장면을 따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만남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편지로 소개되는 것입니다. 이야기는 프랑스 서부 브르타뉴 반도의 끝, 피니스테르 주의 이루아즈 바닷가에 있는 보리바주 호텔 128호에서 이야기의 원고를 발견한 주인공 안느 리즈 브리아르가 이야기를 처음 쓴 누군가에게 편지를 보낸 2016년 4월 25일자 편지로 시작합니다. 등장인물들 사이에 오간 편지를 이어간다고 하면, 보낸 편지에 답장을 이어가는 방식을 흔히 생각합니다만, <128호의 원고>의 작가는 단순하게 2016년 4월 25일 이후에 등장인물 사이에 오간 편지들이 발송된 날자 기준으로 뒤섞어 놓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들 사이에 일어나는 일들이 흐트러짐이 없어서 신기하기 짝이 없습니다.
절반만 인쇄된 책을 찾아 유럽과 미주를 오가는 이야기는 기욤 뮈소의 소설 <종이여자>에서도 이미 읽은 바가 있습니다만, <128호의 원고>에서도 주인공은 물론 등장인물들이 프랑스 안에서, 벨기에로, 런던으로 그리고 캐나다로 바삐 오가고 있습니다. 물론 첫 번째 편지를 보낸 안느 리즈 브리아르가 전체의 이야기를 끌고 가고 있습니다만, 나머지 등장인물들 모두 한몫씩 단단히 하고 있습니다.
책 속의 책의 전반부를 쓴 작가는 1983년 4월 3일 몬트리올을 여행하다 잃어버린 원고가 몬트리올에서 프랑스의 샹파뉴를 오갔다가 남프랑스의 몽펠리에로 옮겨졌다가 영국의 런던으로, 런던에서 벨기에의 홀덴베르흐로, 이곳에서 프랑스 서쪽 끝, 로스코프 해변으로 흘러들었다가 드디어 주인을 만났던 것인데, 그 과정 어디쯤 새로운 작가가 원고를 완성했는지도 풀어야 할 문제였던 것입니다. 이야기의 마지막은 안느 리즈 브리아르가 그해 12월 31일에 적은 글로 마무리가 됩니다.
책의 앞장에는 원고가 흘러 다닌 경로를 표시한 지도가 있고, 차례 뒤에는 등장인물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등장인물 소개를 읽어보면 안느와 안느의 친구 마기가 원고를 가졌던 사람들을 거꾸로 뒤쫓아가는 순서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이 책 원고를 어떻게 손에 넣었고, 그 원고를 어떻게 했는지를 설명하고 있어서 이야기의 전체 맥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소설이다 보니 다소 개연성이 떨어지는 부분, 일어날 가능성이 높지 않은 우연도 적지 않다는 생각입니다만, 이야기의 맥락을 제대로 이어가기 위한 장치로 이해하기로 했습니다.
서한문 형식에서 제가 몰랐던 부분이 있었습니다. 편지를 완성한 다음에 빠트린 이야기를 추신(P.S., postscript)으로 붙이는 것은 알았습니다만, 그 뒤에 다시 덧붙이는 글을 P.P.S라고 하는 것을 처음 보았습니다. post postscript라고 하는데, 추추신이라고 해야 하나요? 또한 편지 끝에 친근한 인사의 표시로 OXOX, XXX 등을 붙이기도 한다는 것도 처음 배웠습니다. X는 키스를 O는 포옹을 의미한다는 것도 말입니다.
그나저나 책 속의 책의 원고를 쓴 두 작가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고, 책 속의 책은 무슨 이야기를 담았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는데, 알 수가 없어 아쉬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