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된 지식 - 역사의 이정표가 된 진실의 개척자들
에른스트 페터 피셔 지음, 이승희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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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던가 옷장에 걸려있던 넥타이를 몽땅 버린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신혼 때 매던 것도 있었을 것입니다. 게으른 탓도 있지만, 넥타이의 유행은 넓어졌다 좁아졌다 하면서 돌고 돌더라는 이유로 버리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보면 유행은 돌고 돈다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닌 듯합니다. 최근에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언젠가 사라졌던 적폐가 슬며시 돌아와 있는 느낌을 받습니다. 적폐를 몰아내겠다는 분들이 새로운 적폐의 주인공이 되고 있는 듯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시집살이 모질게 한 며느리가 시어머니되면 새 며느리에게 더하더라는 우리네 옛말도 있습니다.


금지하다라는 부정적인 단어는 소수의 특정 집단만이 앎을 공유하고 널리 알려지지 않도록 한다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바로 금지하는 것이 많아지고 있는 듯하여 시간의 바늘을 거꾸로 돌리는 듯하다는 말씀입니다.


독일의 유명한 과학사학자 에른스트 페터 피셔가 쓴 <금지된 지식>은 앎을 금지하던 역사를 거슬러 살펴보았습니다. 논어학이편은 학이시습지 불열호(學而時習之 不易說乎)로 시작합니다. ‘배우고 그것을 때로 익히니 기쁘지 않겠는가라고 새깁니다. 사람이라면 새로운 것을 안다는 것을 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앎을 금지한다는 것은 앎을 독점하려는 욕망에서 비롯한 것일 터이니 크게 잘못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기독교에서는 앎을 금지한 첫 번째 주체가 바로 신이었다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 있는 금단의 사과를 먹지 말라는 영을 아담과 이브에게 내렸던 것입니다. 먹어서는 안되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으니 금단의 사과에 대한 앎을 독점한 셈입니다. 신의 이런 독특한 점은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면면히 이어졌습니다. 특히 교리에 어긋나는 사실 혹은 앎은 철저하게 감추려 노력했습니다.


저자는 역사적으로 금단의 영역을 개방한 삼인방으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찰스 다윈 그리고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들었습니다. 지식사의 큰 흐름에서 격랑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코페르니쿠스나 다윈은 분명 꼽을 만하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프로이트가 그 두 사람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인가에 대하여는 쉽게 동의가 되지 않는 듯합니다. 다만 젝 관심을 두고 있는 오이디푸스 신화의 해석에서 도움이 될만한 관점을 챙기는 정도에 만족하려 합니다.


저자는 지식이 주는 기쁨에 대하여 논어가 아니라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알아가는 것의 즐거움을 언급합니다. 신으로부터 지식을 금하는 법을 배웠던 인간들이 개화되어가면서 앎을 나누는 범위가 확대되어오다가 현대에 이르러서는 다시 앎을 봉인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는 점을 깨우칩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의 흐름은 낙원에서 금지된 것, 우리에게 지식이란 무엇인가, 비밀을 다루는 법, 성스러운 것을 엿본 죄, 인간에 대해 알지 못하게 하라, 과감하게 봉인을 떼다, 지식사회이 사생활과 비밀이라는 제목으로 이어 설명합니다. 종교계에서 금지해야만 했던 앎은 무엇이었고, 왜 그랬는지를 다양한 시각에서 설명합니다.


특히 과학이 발전해옴에 따라서 사람들의 앎의 폭은 빠르게 넓어졌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알리고 싶지 않은 대목들이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이유도 있고 국가적인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인간이 신을 닮아가고 있기 때문일까요?


저자는 과학과 신학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금지된 지식에 관한 역사적 흐름을 정리해냈습니다. 혹자는 과학의 발전이 무서울 정도의 지경에 이르고 있기 때문에 적절한 제동장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역설적으로 사물의 원리를 깨우쳐온 과학이 넘어서서는 안되는 경지에 도달했기 때문에 적절한 조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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