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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호텔의 철학자들
존 캐그 지음, 전대호 옮김 / 필로소픽 / 2020년 4월
평점 :
제목에 들어있는 심연호텔이 철학자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궁금해서 골라든 책입니다. 니체가 집필을 위해 스위스의 질스-마리아에 머물던 장소를 니체 하우스라고 합니다. 이곳에서 차라투스트라가 탄생한 것입니다. 유명해진 영화나 연속극을 촬영한 장소를 찾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만, 그런 현상은 과거에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헤르만 헤세, 토마스 만, 테어도어 아도르노, 프로모 레베, 카를 융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분들도 이곳에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니체가 묵었던 집, 니체가 산책했던 길을 쫓으며 차라투스트라에 버금하는 영감을 얻으려했던 것일까요? <심연호텔의 철학자들>은 메사추세츠 대학교 철학과의 존 캐그교수가 질스-마리아를 찾아 니체가 얻었던 통찰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았습니다.
그런 행태에 배알이 뒤틀렸던지 헝가리 마르크스주의자 죄르지 루카치는 질스-마리아에 있는 발트하우스를 찾는 사람들을 비판했다고 합니다. 그는 발트하우스 호텔을 심연호텔(The Abysmal Hotel)이라고 불렀습니다. 캐그 교수는 루카치의 비유를 받아서, “심연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웅장한 호텔, 실존의 공허를 성찰할 수 있는 사치스러운 장소, 세계의 종말을 안락하게 관람하는 미술관. 더 많은 웃음이 올라왔고, 나는 바로 니체하우스가 그런 심연호텔이 되었다고 생각하며 몸서리쳤다.(187쪽)”라고 적었습니다.
질스-마리아는 니체가 지적인 삶의 많은 시간을 보낸 곳입니다. 스위스의 동쪽 끝에 있는 생 모리츠 가까이 있는 곳입니다. 캐그교수는 ‘니체와 함께 성숙을 향해 나아가는 도보여행’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내와 딸이 함께 하는 여행이었기 때문에 니체를 느끼기 위한 홀로 걷기를 위하여 아내와 딸의 허락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허락된 시간에 거대한 산의 세계를 걷다가 쉬면서, 니체가 질스-마리아에서 썼던 책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도덕의 계보』, 『우상의 황혼』, 『안티크리스트』, 『이 사람을 보라』 등을 읽으며 생각에 잠기고자 했던 것입니다.
아내 캐럴이 동행하지 않은 것은 딸 베카를 돌보아야 하는 이유도 있었지만, 역시 철학을 공부한 그녀는 칸트에 경도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자 자신도 여행이 생각한대로 풀리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이 여행은 실패했다. 초인을 탐색하려 했는데 가정생활만 했다. 다정한 순간들, 일상적인 과제들, 놀이 약속들고 가득 찬 가정생활, 자유로워지여는 시도, 파릇한 젊은 날에 걸었던 길을 다시 걸으려는 시도는 가족에 대한 나의 책무로 가로막혔고, 여행은 진정으로 니체적인 무언가가 되는 대신 니체를 기리는 휴가로 서서히 변모했다. 내게 그런 세속적인 삶으로의 점진적 쇠퇴를 막을 능력이 없거나 의지가 없음이 증명되었다.(234쪽)” 그럼에도 저자는 니체가 사유의 결과를 담은 저서의 맥을 찾으려 노력했고, 니체의 삶을 정리하여 연관을 맺어보려 노력한 표시가 분명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습니다.
저자가 질스-마리아를 탐색하는 모습을 보면서 익숙한 곳이라는 느낌이 들었는데, 줄리엣 비노쉬가 주연한 영화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의 무대였습니다. 스위스의 생모리츠에서 이탈리아의 키아벤나(Chiavenna)로 연결되는 도로가 넘어가야 하는 말로야 고개(malojapass)는 해발 1,815m 높이인데, 영화에서는 말로야의 뱀(maloja schlange 혹은 maloja snake) 이야기가 나옵니다. 말로야 고개의 서남쪽 브레가글리아(Bregaglia) 계곡의 습한 공기가 말로야 고개 쪽으로 이동하는 경우 지상에서 500~700m 높이에서 구름이 형성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두께 50m 정도의 구름이 말로야고개를 넘는 모습이 마치 뱀이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준다고 합니다. 구름은 대개 질스 호수 부근에서 사라지지만 때로는 생 모리츠까지 나아가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1924년 독일의 산악영화감독 아놀드 팬크(Arnold Fanck)가 영상에 담아내면서 유명해졌다고 합니다. 고명섭 기자님의 <니체 극장> 이후로 니체에 관한 이야기를 새롭게 읽은 좋은 책읽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