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잔티움 제국 최후의 날
로저 크롤리 지음, 이재황 옮김 / 산처럼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터키를 다녀온 지 벌써 4년이나 지났습니다. 아나톨리아반도의 서쪽 절반을 도는 일정이었는데, 마지막 이틀은 이스탄불을 구경했습니다. 이스탄불은 비잔틴제국 시절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였습니다. 유일한 천년제국 비잔틴도 결국은 문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난공불락의 요새라 믿었던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오스만제국군대의 공세를 버텨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거대한 힘을 가진 두 제국이 접경을 하게 되면 충돌은 필연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부자는 망해도 3대는 간다고 했던가요? 아무리 힘이 빠져가는 비잔틴제국이라고 해도 떠오르는 오스만제국이 쉽게 어떻게 해볼 수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 잘 되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에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불과 기천의 군사로 수십만 대군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 점입니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1453년 5월 29일 오스만군대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할 수 있었던 것은 메흐메트2세가 오스만 해군의 함정을 갈라타의 야트막한 언덕을 넘어 마르마라해에서 금각만으로 진입시킨 기상천외한 작전 덕분이었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스만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은 짧은 시간에 만들어진 전쟁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슬람세력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가지려는 염원은 이슬람교 자체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고 합니다. 629년 비잔틴제국의 28대 황제 헤라클레이토스가 예루살렘의 도보순례에 나섰는데, 그 과정에서 페르시아와의 전투를 치러야 했다고 합니다. 그 무렵 헤라클레이토스는 편지를 한통 받았는데 바로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보낸 것이었습니다. 알라에게 무릎을 꿇기를 청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슬람 교리를 바탕으로 아라비아의 사막에 흩어져 있는 부족들을 통합한 이슬람은 놀라운 속도로 페르시아를 복속시키고 사방으로 영역을 확장시켜나갔습니다. 당연히 비잔틴제국과도 충돌이 불가피하게 되었습니다. 669년에는 우마이야왕조의 무아위야1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규모 상륙부대를 파병한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비잔틴제국과 아랍세력의 충돌은 40여년에 걸쳐 이어졌지만 아랍세력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역사가들은 “하느님이 로마 제국을 보호했다”라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우마이야왕조에 이어 셀주크 튀르크 역시 비잔틴제국에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기에는 아직 역부족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800년이 넘는 오랜 세월의 흐름 속에서 비잔틴제국이 속으로 곪아 들어간 뒤에서야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이슬람의 강역이 되고 말았습니다.

<비잔티움 제국 최후의 날>의 저자 로저 크롤리는 작가이자 역사가로 이스탄불에 살았던 적이 있고, 아나톨리아를 여행하는 등 지중해 연안지역에 관심이 크다고 합니다. 이 책은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만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슬람교가 시작된 7세기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이스탄불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요약해냈는데, 옛일은 큰 묶음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이슬람에 넘어가는 마지막 순간은 시간을 잘게 잘라서 긴박한 순간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비잔틴제국을 영도하던 콘스탄티노스 11세와 패기의 오스만제국을 영도하던 메흐메트2세의 건곤일척의 대회전은 젊음의 패기가 마지막 승자가 되었습니다. 읽어가다 보면 비잔틴제국의 멸망은 예정되어 있었던 일이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제국과 비잔틴제국이 가톨릭과 정교로 각각 나뉘어 갈등을 빚는 구조 속에서 위기의 상황을 외면했던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는 것입니다. 쇠약해진 비잔틴제국에게 지원은커녕 가톨릭으로 통합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밀었던 것입니다. 때로는 종교가 맹목적으로 폭주하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그때 그랬던 모양입니다. 오스만이 문 앞에 와있는 순간에도 종교갈등을 접어두고 힘을 모을 생각을 왜 하지 못했던 것일까요? 오늘날의 살아가는 우리도 생각해볼 일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