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 주파수 창비시선 327
김태형 지음 / 창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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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 초에 책을 편집하는 일을 배우러 다녔습니다. 영등포 문래동에 있는 출판사에서 편집을 하시는 대표님께서 관심 있는 사람들을 모아 3차례에 걸쳐 편집에 관한 개요를 설명하고 연습을 하는 시간을 마련해주었던 것입니다. 제 딴에는 책을 직접 만들어볼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안고 시작한 공부였지만, 막상 교육이 끝난 지음은 불끈거리던 용기가 많이 사그라들었습니다.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미리 가서 구경하던 서가에서 눈에 띤 시집을 두어 권 사게 되었습니다. <코끼리 주파수>는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표제작이기도 한 ‘코끼리 주파수’는 아프리카 초원에 사는 코끼리 들이 서로 소통을 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방법에 관한 시입니다. “(…) 말라죽은 아카시아나무숲과 흰구름 너머 수 킬로미터 떨어진 또 다른 무리와 / 젊은 수컷들을 찾아서 / 코끼리는 멀리 울음소리를 낸다 / 팽팽한 공기 속으로 더욱 멀리 울려퍼지는 말들 / 너무 낮아 내겐 들리지 않는 / 초저음파 십이 헤르츠 (…)”라는 대목은 아프리카 초원에 사는 코끼리의 생태를 잘 알고 쓴 시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쩌면 시인은 삶에 천착하여 얻은 진리를 누군가 알아주었으면 하는 생각에 낮은 주파수로 누군가에게 알려주려는 것인 듯합니다. 그래서 호젓한 산속의 샘가에 앉아 고요한 수면을 바라보면서 결코 손을 떠 마실 수 없는 이유를 캐묻습니다. 악마의 목젖 같은 깊은 속을 엿보고, 악마의 눈물이 타오르는 것이 감지되었기 때문일까요?

‘소쩍새는 어디서 우는가’라는 시를 “귀가 밝아진다는 건 그래도 슬픈 일만은 아니었다.”라고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시인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환경에 대하여 귀만 열어놓았겠습니까? 오감을 열어놓고 주변이 시인에게 건네는 어떤 신호도 놓치지 않게 된 것 같습니다. 외부로부터 받는 자극을 시시콜콜 받아들이는 일은 사실 엄청나게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적당히 무시하거나 적당히 인식하지 않고 지나가는 것이 세상을 사는데 훨씬 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감을 예민하게 갈고 닦아서 무언가가 전하려는 것을 놓치지 않으려 하는 것은 시인이라면 어쩔 수 없는 숙명 같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시제로 사용한 대상이 소쩍새, 고양이, 흰 고래, 코끼리, 늑대, 들개, 새, 구렁이와 같은 생물도 있을 뿐만 아니라, 샘, 구름, 나뭇잎, 냇물, 개여울 등 자연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인 친구도 있고, 목수를 비롯하여 시인이 당신이라고 부르는 누군가도 있습니다. 사실 시인이 일하는 영등포 문래동의 좁은 골목길에는 그만그만한 공장들이 빼곡하게 들이차 있습니다.

학생 때 그 동네 살던 선배가 있었는데, 어울려 술이 취하다보면 같이 술 마시던 사람들을 몰고 집으로 가곤했습니다. 주무시는 부모님을 깨울 수 없어 대문을 넘어 들어가곤 했습니다. 그러던 문래동도 많이 변했더라구요. 그렇게 공장이 늘어서 있는 동네에 생뚱맞게도 너구리가 나타나곤 했다고 합니다. 어쩌면 시인이 보내는 십이 헤르츠의 낮은 주파수의 통신을 감지하고 나타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얼마전에 같이 근무하는 시인이 낸 시집에서 제가 근무하는 곳에서 멀지 않은 치악산에 관한 시를 두편이나 쓴 것을 보고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치악산에 대한 글을 써보게 되었는데, 김태형 시인의 ‘구름 일가’의 느낌을 이야기해볼 걸 그랬습니다. “창가에 짓널어두었던 속옷을 걷으러 갔다 / 눈썹에 물든 노을은 간데없고 / 낮은 빨랫줄에 흰 구름만 걸려 있다 (…) 잘 마른 구름이 밤마다 질금질금 비를 내릴 줄 몰랐다.”는 대목이 요즘 치악산에 걸려있는 구름을 보다 치면 나름 의미를 알듯 모를 듯해진다.

그리고 ‘코끼리 주파수’는 아프리카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낼 때 한번쯤을 짚어야 하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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