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슬픔 -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기
문성원 지음 / 그린비 / 201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표지에 그려진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이 눈길을 끌어 읽게 된 책입니다. 그림의 제목은 <철학으로의 외도>입니다. 하반신을 드러낸 여인이 등을 돌리고 침대에 누워있고, 옷을 입은 사내가 그녀의 등 옆에 앉아 있는 정경입니다. 호퍼의 부인의 기록에 의하면 남자의 옆에 놓인 책은 플라톤의 <국가>라고 합니다.

정의와 국가의 정체에 대하여 논한 철학책이 놓인 상황이 참 묘하다는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철학의 슬픔>을 쓴 문성원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호퍼의 그림들을 영상으로 옮긴 <셜리에 관한 모든 것>에서는 이 상황이 다음처럼 묘사되었다고 합니다.(제가 이 영화를 보지 못해서) 영화에서 셜리는 <국가론>의 ‘동굴의 비유’ 부분을 읽다가 스티브의 인기척을 듣고는 책을 놓고 돌아누워 자는 척하고, 스티브는 셜리의 모습을 잠시 보다가 책을 들고 있기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동굴의 비유는 태어나면서 동굴에 갇힌 죄수는 횃불에 드리운 그림자가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슬이 풀려 동굴 밖으로 나왔을 때 대낮의 태양과 밤하늘의 달과 별을 볼 수 있게 된다. 동굴 속의 세계는 현실의 세계이고 동굴 밖의 세계는 이데아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이 장면을 읽던 스티브가 책을 내려놓고 생각에 잠긴다고 했습니다. 과연 이 상황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창밖에서 들어온 햇빛이 방바닥에 그리고 남자의 얼굴에 비치는 것은 풀라톤의 <국가론>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이데아의 세계에 다가갈 수 없음에 좌절하는 모습일까요?

<철학의 슬픔>에는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기’라는 부제가 달려있습니다. 문성원교수는 타자와 바깥에 대한 논의를 통하여 나는 물론, 나의 가족, 나의 이웃, 나아가 우리나라기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일깨워줍니다. 타자를 강조하는 대표적인 철학자 레비나스를 통하여, 철학과 닿아있는 바깥 영역과의 관계를 통하여 철학의 위치와 역할을 가늠하고 사유해보려 했다고 합니다.

레비나스와 철학과 이에 대한 데리다의 해석을 검토함으로서 정치와 윤리의 관계 문제에 대하여 작은 통찰의 실마리를 구해보려는 생각도 있다고 했습니다. 또한 표제를 <철학의 슬픔>이라 한 것은 위축과 상실에 대처하는 자세인 슬픔이 우리의 삶에서 뿐 아니라 철학의 처지에서도 때로 적절하고 긍정적인 방안일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랍니다.

하지만 주제의 다양성을 본다면 슬픔이 딱히 긍정적인 방안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철학의 슬픔에 이어 행복에 대하여, 인공 지능 무한 그리고 얼굴, 사랑과 용서, 환대하는 삶, 정치와 윤리, 약함을 향한 윤리, 끝나지 않는 변증법의 모헙, 그리고 민주주의를 넘어서라는 제목으로 논의가 이어지고 있는데, 제목들 사이에 연관성이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 듯했습니다.

다만 저자가 이 책에서 다룬 마지막 주제가 ‘민주주의를 넘어서’이고 보면 나와 너의 관계를 잘 정립하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완성해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즉 민중의 견해와 의지를 직접적으로 모으고 반영해내는 민주주의의 본질에 가까워지는 기회가 되지 않겠는가 하는 견해를 내놓습니다. 다만 그것을 모으는 방안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는 더 지켜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쩌면 철학의 슬픔이라는 있을 수 없는 감정은 철학을 전공하지 않는 사람들이 철학을 폄훼하는데서 기인한 것은 아닐까요? 예를 들면, 세계적인 유전학자 스트비 존스가 남긴 “과학에 있어서의 철학은 섹스에 있어서의 포르노그래피와 같습니다. 더 싸고, 더 쉽고, 어떤 사람들은 더 좋아하기도 하죠(20쪽)”라는 말 같은 경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