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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16년 5월
평점 :
헝가리의 문호 산도르 마라이의 소설<열정>을 읽게 된 이유는 작가가 헝가리 사람이라는 점, 무대가 헝가리 어디일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이었습니다. 작가가 부다페스트에서 작품 활동을 한 바 있고, 헝가리어로 소설을 썼다는 것. 그리고 그의 가문이 19세기 헝가리 독립운동을 지지했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옳다고 보아야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는 1900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 속한 작은 도시 카샤우에서 태어났습니다. 이 도시는 1차 세계대전 이후 체코령이 되었다가 지금은 슬로바키아에 속합니다. 어떻거나 작가 자신이 헝가리 사람이라고 하니 그리 믿어야할 것 같습니다. 다만 이 책의 무대가 어디인지는 밝히지 않아서 헝가리 어디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이야기는 주인공인 헝가리 장군, 헨릭의 집에 오랜 친구, 콘라드가 41년 만에 찾아온다는 전갈을 받으면서 시작됩니다. 사관학교에 입학하면서 맺은 친구관계는 24년간 이어졌는데, 어느 날 콘라드가 갑자기 사라지고, 헨릭은 아내, 크리스틴과 콘라드, 그리고 자신 사이에 무언가 불편한 진실-부정과 기만과 배신 등-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결국 아내와 벽을 쌓고 지내기 시작한지 8년 만에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헨릭은 기약 없이 콘라드를 기다립니다. 호사스런 대형 석조 무덤처럼 모든 것을 품과 있는 집에 처박혀서 말입니다. 진실을 알기위해서가 아니라 두 개의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콘라드가 헨릭과 크리스티나를 떠나던 날 헨릭과 콘라드는 같이 사냥을 나갔는데 사냥터에서 콘라드가 자신을 겨냥한 순간을 목격했던 것입니다. 콘라드가 떠난 사실을 알고 찾아간 그의 집에서 마주친 크리스티나가 ‘겁쟁이’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헨릭은 세 사람 사이의 깔린 관계의 진실을 뒤쫓던 끝에 두 개의 질문을 마련한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자네가 그날 아침 사냥에서 나를 죽이려한 사실을 크리스티나가 알고 있었나?’ 였고, 콘라드는 ‘이 물음에 대답하지 않겠네’라고 답합니다. 사실 두 번째 질문이야말로 작가가 이 작품에서 말하고자한 핵심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과연 우리의 영리함, 오만, 자만심으로 무엇을 얻었는가’입니다. 이 질문에도 콘라드는 분명한 답을 내놓지 않습니다. 다만 헨릭이 스스로에게 던지 듯한 ‘우리 삶의 진실한 내용은 죽은 여인을 향한 이 고통스러운 그리움이 아닐까?’, 혹은 ‘정열이란 것에 우리 삶의 의미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등입니다. 콘라드는 “왜 나에게 묻나”라고 되묻습니다. 과연 헨릭, 크리스티나, 콘라드의 세 사람 사이에 얽힌 사랑과 우정에서 의미 있는 삶을 살아낸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요? 제 생각에는 아무래도 헨릭장군이 아닐까 싶습니다.
누군가의 글에서 헨릭장군이 실패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많은 것을 가진 헨릭은 어렸을 적부터 친하게 지낸 콘라드에게 많은 것을 나누어 주려 애를 썼고, 자신이 가지지 못한 음악이라는 재능을 부러워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헨릭은 콘라드가 가진 것을 시샘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반면 콘라드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이 불편하여 마음을 열지 못했고, 역시 가진 것이 없던 크리스티나를 헨릭에게 소개하여 결혼을 하도록 합니다. 작가는 콘라드와 크리스티나 사이의 관계를 분명하게 설명하지는 않지만 불편한 진실이 있었을 개연성은 이야기합니다. 헨릭의 곁을 떠나는 것이 콘라드가 헨릭에게 보여줄 수 있는 마지막 우정이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