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아들 브루노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남을 것인가? 떠날 것인가? 인종 차별의 실질적 효력에 대해 아버지는 착각하고 있었다. 경찰서에서는 여권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막 시작된 전쟁이 얼마나 지속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이미 작동된 덫으로 인해 어떤 도피도 불가능했기 때문에, 이제 남은 유일한 길은 분명히 아무도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을 희망 없는 미래로 데려갈 그런 길이기 때문에, 차라리 불쌍하게 자기를 낮춰서 이 여행의 동반자들이 그러하듯, 외로이 몽상에 잠기거나 절망에 빠져 시간을 흘려보내거나 자위하는 죄수처럼 슬프고도 비참한 망상에 사로잡히는 편이 더 나았다.
브루노는 여전히 발끝으로 걸으며 창문으로 다가갔다.
두 개의 차광 덮개 중 하나를 살짝 열고 뿌연 유리와 덧창 문의 창살 사이로 내다보았다. 눈이 계속 내리고 있었다. 몇 시간 후에는 높이 쌓일 것이며, 온 도시 위로, 감옥과 게토 위로 답답한 정적을 드리울 것이다. - P198

"감옥은 진정한 학교예요." […] "그렇지만 너무 오래 지속되지 않고, 체력이 약해지거나 소모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 말이에요. 나는 나에게 시련을 아끼지 않은 운명에 감사해요. 외로움과 집중, 자기 자신 말고는 달리 친구가 없다는 점은 은혜로운 일이지요. 그리고 자기 자신을 아는 것, 자신의 성향에 맞서 싸우는 것, 그리고 때로는 거기에서 승리자가 되는 것은 감방의 네 벽 사이가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지요. 1930년 감옥에서 나올 때, 나는 내 36호 실을(우연의 일치지요? 내 동생의 집 번지와 똑같아요) 정말 우울한 마음으로 떠났어요. 마치 나 자신의 일부를 거기에 버려둔 것처럼 말이에요. 그 벽마다, 구석마다, 사소한 물건들마다 고통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어요. 사실 눈물을 흘린 곳, 고통을 겪었던 곳, 희망하고 저항하느라 자기 안에서 많은 능력을 발견하게 된 곳이 바로 가장 애정을 느끼는 곳이에요. 예를 들어, 당신 자신을 봐요. 당신은 같은 종교인 사람들과 함께 떠날 수 있었고, 당신이 겪어야 했던 일을 고려하면 그럴 권리가 있었어요. 하지만 당신은 다른 선택을 했어요. 여기에 남아 싸우고 견디기를 원했어요. 그리고 이제 당신이 태어나고 성장하고 어른이 된 이 땅, 이 오래된 도시는 이중적으로 당신의 것이 되었어요. 당신은 이제 절대 떠나지 않을 거예요." - P212

젊은 연인은 오십여 미터 앞에서 가고 있었다. 남자는 자전거에 올라탔고 균형을 잡기 위해 이따금 오른손으로 여자친구의 어깨를 짚었다. 브루노는 줄곧 그들을 바라보았다. "누구 일까? 이름이 뭘까?" 입속으로 계속 중얼거렸다. 그들은 아름다움을 넘어 경이롭고 닿을 수 없는 존재 같았다. 저기 저들이 바로 인류의 표본이고 원형이다! 그는 절망적인 사랑과 증오로 눈을 반쯤 감으면서 속으로 말했다. 그들의 피는 그보다 좋은 피였고, 그들의 영혼은 그보다 좋은 영혼이었다. 틀리지 않다면 아가씨의 머리칼은 뒤로 붉은 리본으로 묶여 있었다. 남아 있는 약간의 햇살은 온통 그 리본에 집중되어 있는 것 같았다.
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함께 있고, 바로 그들이 된다면! - P217

"당신 말을 듣기 잘했군요. 성벽 위에서는 정말 놀라운 석양을 감상할 수 있어요." 클렐리아 트로티가 평온하게 말했다.
브루노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녀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다시 한번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제 그녀는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혼자 말하듯이. 마치 자신의 꿈을 뒤쫓는 것처럼. 언제나 그렇듯이 자신의 고독에, 격리된 자의 영원한 망상에 빠져 있었다.
그는 전율했다.
아마도 언젠가 그녀는 브루노 라테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깨달을 것이다. 그는 다시 앞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하지만 그 날은, 혹시 올 수 있다고 해도, 분명 아직 멀리 있었다. - P218

이방인이 지나가고, 카페에 앉은 사람들은 빙긋이 입귀를 올려 가만히 바라본다. 하지만 하루 중 어떤 시간이 되면 그들의 시선은 기묘하게 한곳에 붙잡히고 심지어 숨죽이기까지 한다. 지방 도시의 나른함과 게으름이 상상의 대학살에 무슨 책임이 있겠는가? 순진한 이방인의 발길이 무심결에 뇌관을 건드려, 갑작스러운 지뢰 폭발로 보도의 포장석이 정말 깨지기라도 할 것처럼 상상한다 한들 말이다. 아니면 1943년 12월 어느 날 밤, 바로 그곳 델라보르사 카페의 주랑 아래에서 저 보도 위로 시민 열한 명을 쓰러뜨린 파시스트의 신속한 기관총 일제사격이 부주의한 행인에게도 똑같이 그 짧고 끔찍한 춤을, 역사가 몇 년에 걸쳐 기리고 기린 이탈리아 내전의 첫 희생자들에게 시체 위로 쓰러지기 직전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틀림없이 추게 했을 그 경련과 발작의 춤을 추게 할 것처럼 상상한다 한들 말이다. - P222

방심한 이방인이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곧 대화는 약해진다. 눈을 고정하고 숨을 죽인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총살이 있던 그 보도를 이용할 사람은 자신이 삼가면 좋을 행동을 하게 되리라는 걸 깨달게 될까? 그는 마침내 여행안내서에서 머리를 들 것인가, 들지 않을 것인가? 하지만 무엇보다 이 순간 보이지 않는 피노 바릴라리의 얇고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슬픈 역설적인 목소리가 위에서 내려올 것인가, 내려오지 않을 것인가? 그럴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 사건을 기다리는 것은 때론 지랄 맞은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특히 불확실한 운동경기의 결과를 기다리게 되는 것과 똑같다. - P223

이야기는 매번 피노를 향했다. 하지만 달리 보면, 그가 사람들 앞에 자신을 드러내면서 기대한 게 바로 그런 것 아니었을까?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이제 노상 약국 위층 아파트 창문가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종일 앉아 있었고, 감히 데스테 성 해자의 보도를 따라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 누구에게나 오만하고 동시에 뻔뻔 한 눈빛으로—사람들은 그렇게 확언했다—뚫어지게 노려볼 태세가 되어 있었다. 그것도 행복한 눈빛으로! 그들은 이렇게 덧붙였다. 마치 그의 핏속에서 몇 년 동안 음흉하게 잠복해 있다가 마침내 불시에 나타나 다리를 빼앗고, 창백한 삶을 무언가 분명한 것, 자기이해가 가능한 것, 존재 충만한 것으로 전환 시킨 그것이 매독이었던 것 같았다고. 보아서 알겠지만, 그는 강해지고 심지어 새로 태어난 것 같았다. 결혼 후 해질녘에 두어 번 아내와 팔짱끼고 조베카 대로를 지나는 모습을 보였을 뿐인, 구명대에 매달린 조난자 같던 때와는 어쨌든 사뭇 달라진 것처럼 보였다. ‘자, 봐요, 젊은 시절 작은 실수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보셨나요?‘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자, 여기, 보여요?‘ 그리고 촉촉하게 반짝이던 그의 눈동자에는 이제 그늘조차 없었다. 일말의 어둠도. - P228

상황이 나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건, 로마 대로 한복판이나 델라보르사 카페 주랑 아래에서 마주 치는 극소수의 생존 유대인들이나(반대로 유대인들은 다시 다 게토에 틀어박혀 어울리지 않는 의례적인 경건함에 만족 해했지만!), 아니면 가장 열성적인 일부 반파시스트 시민들의 얼굴만 살펴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공적인 비극이 발생 했을 때만 델라보르사 카페에 들렀는데, 실제로 이제는 마치 흉조를 알리는 새들처럼 늘 그곳에 죽치고 앉아 있어서 거의 매일 보게 되었다. 습관적인 무관심의 가면 아래 그들이 모든 구멍으로 내뿜는 사악한 만족감은 장님이 아닌 이상 모두가 볼 수 있었다! - P230

물론 사람들은 그 외까지, 그 외의 모든 것까지 상상했다.
데스테 성 해자의 난간 옆에 세 무리로 나뉘어 쓰러진 열한 명의 사람들을 보았고, 델라보르사 카페 주랑과 맞은편 보도 사이의 공간에서 오가는 검푸른 셔츠의 부대원들, 일제사격 직전에 약간 한쪽에 떨어져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던 시아구라를 향해 "살인자!"라고 외친 파노 변호사의 절망적인 찡그림, 그 대단한 달빛, 자정부터 갑자기 불어온 바람과 함께 도시의 모든 돌멩이를 유리나 석탄 조각처럼 빛나게 만들었던 그 믿을 수 없이 밝은 달빛, 그리고 마지막으로 피노 바릴라리, 파노 변호사의 비명 소리를 듣고 나서야 마지막 순간 어린애 같은 깊은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고, 이제 그 위에서, 그 장면 바로 위 창문 뒤에서 목발에 의지해 떨고 있던 피노는······ 오랜 기간, 1943년 12월부터 1945년 5월까지 이탈리아 반도를 천천히 거슬러올라가기 위해 치렀던 전쟁 기간 내내 그랬을 것이다. 집단의 상상력은, 언제나 매번 그곳 그 끔찍한 밤으로 돌아가야 했고, 오직 피노 바릴라리만이 가장 높은 지점에서 볼 수 있었던 총살당한 열한 명의 얼굴을 눈앞에 하나씩 떠올려야 했을 것이다. - P25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른 오후의 햇살과 정적, 멀리서 메아리치는 총성이 이따금 그 정적을 깨트리고 있는 마치니 거리는 공허하고 황량하고 손대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한시 반부터 머리에 신문지 베레모를 쓰고 조그마한 비계에 올라 유대교 회당 정면, 먼지 가득한 벽돌에 이 미터 높이로 고정시켜야 하는 대리석판 옆에서 일하는 젊은 노동자에게도 그렇게 보였다. 원래 농부였다가 전쟁 때문에 도시로 이주해 미장이 일을 해야 했던 그의 존재는 곧바로 햇살 속에 사라졌고, 곧이어 자기 자신도 그것을 깨달았다. 모든 것을 무력화시키는 8월의 태양에 어떤 방식으로든 맞서려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뒤이어 다양한 몸짓과 색깔로 그의 등뒤에서 돌 포장길 한쪽을 뒤덮은 약 간의 행인들 무리도 마찬가지였다. - P109

공포나 증오가 있으면 합리적인 생각을 못하는 법이다. - P117

대로변 쪽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문 앞에는 한가로이 노닥거리며 파르티잔 십여 명이, 입구의 계단에 앉아 있거나, 맨 다리 사이에 기관총을 걸치고 있거나, 맞은편 방대하고 풍성한 정원의 경계선을 이루며 길게 뻗은 높은 담장에 바짝 대놓은 지프차 의자에 누워 있거나 했다. 하지만 그들 외에 훨씬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일부는 두꺼운 서류뭉치들을 팔로 안아서 옮기느라 모두 활력적이고 단호한 표정으로 계속 오고 가곤 했다. 절반은 그늘지고 절반은 햇살이 비치는 거리와 오래된 귀족 저택의 열린 현관 입구 사이에서, 요컨대 위 아래로 강렬하고 생생하고 즐겁기까지한 분주한 활동이 이어졌고, 도로의 자갈 포장을 스치듯이 낮게 나는 제비들의 지저귐 소리가, 일층의 철창 두른 대형 창문들을 타고 끊임없이 밖으로 흘러나오는 타자기의 탁탁거리는 소리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 P118

그는 부헨발트에 있었고, 유일하게 거기서 돌아왔다! 수많은 신체적 정신적 고문을 견뎌내고, 수많은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 후에. 그리고 그들은 거기에, 그의 처분을 기다리며 모두 경청하기 위해 귀를 곤두세우고 있었다. 만약 이야기한다면 그들은 지치지 않고 그 이야기를 들어줬을 것이며(그렇게 늦게야 그를 알아 보고, 실제로는 또다시 그를 거부하고 배제하려고 했던 것에 대해 용서받기 위해서라도), 심지어 머리 위 데스테 성의 시계가 두 번 울리면서 벌써 부르고 있는 점심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자신들의 선의를 증명하고, 그 끔찍하고 결정적인 기간 동안 자신들의 관념이 겪은 변화를 뒷받침하려는 듯, 조잡한 천으로 만든 바지, 소매를 걷어올린 널찍한 겉옷, 넥타이 흔적도 없이 목 위로 열린 옷깃, 꼼꼼하게 광택을 내지 않은 신발, 샌들 신은 맨발, 그리고 당연히 수염, 그들 모두가 기르고 있는 수염을 과시하면서 모두가 다같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자네, 많이 바뀌었군? 세상에나 이제 완전히 어른이 됐어, 이렇게 살도 쪘고! 하지만 봐, 우리도 바뀌었지. 세월은 우리도 뚫고 지나갔어······‘ 그러면서 의심할 바 없이 진지하게 제오의 검토와 판단에 자신을 맡겼고, 또 진지하게 그의 굽힐 줄 모르는 거부에 괴로워했다. […] 말하자면 좋든 나쁘든 바로 그때부터 새로운 시대가, 무서운 악몽들로 가득한 오랜 잠처럼 이제 핏속에서 끝나가는 시대하고는 다른, 비할 바 없이 더 나은 시대가 시작되려고 한다는 확신이었다. - P126

파자마 바람인데도 땀에 푹 젖은 제레미아 타베트는 검은색 대형 식탁 한쪽에 앉아서, 또다시 미심쩍고 당황한 듯 손가락 끝으로 잿빛 수염을 비틀었다. 파시스트 행동대원의 고전적인 염소수염은 페라라의 늙은 파시스트 중 그 혼자만 하고 있었다. 그게 만용인지 경솔함인지, 아니면 적정선의 타협에서 나온 교활함인지 아무도 몰랐지만 말이다. 제오는 그 염소 수염과 퉁퉁한 손이 시선을 모았기에, 그가 건네는 권유는 옅은 웃음과 함께 머리를 가로저어 피하면서, 광적인 집착으로 파란 눈을 고정시켰다. - P133

진실로 낮의 햇살은 권태, 정신의 완고한 잠,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권태로운 쾌락"이다." 하지만 마침내 황혼의 시간이, 평온한 5월 황혼의 빛과 그림자에 똑같이 젖어드는 시간이 내려오면, 조금 전까지 완전히 일상적이고 무관심하게 보였던 사람들과 사물들이, 갑자기 여러분에게 진정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 갑자기 난생처음 자기 자신과 여러분에게 말을 걸어올 수도 있다(그리고 그 순간에 여러분은 마치 섬광에 얻어맞은 것 같을 수도 있다). - P153

여러 건축물이 모여 있고 드넓기 그지없는 페라라 시립 공동묘지를 아름답다고, 위안을 줄 만큼 아름답다고 규정한다면, 우리로선 이탈리아에서는 애도하지 않고 죽음을 다룰 수 있다고 하는 그런 말에 대응할 만반의 태세가 돼 있다는 듯이, 어쩔 수 없이 찜찜해하면서 습관적으로 웃음 짓게 될 위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똑바로 뻗은 작은 길인 보르소 거리, 길 양쪽에 대리석 공방들과 꽃가게들이 모여 있고 나란히 자리한 두 커다란 개인 정원의 울창한 나뭇잎들이 길게 뒤덮고 있는 그 거리 끝에 다다르면, 갑작스레 나타나는 체르토사 수도원과 바로 옆 공동묘지의 전경이 언제나 축제와도 같은 즐거운 인상을 준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 P157

그런데 그녀는 누굴까? 누구 딸이지? 갑자기, 돌발적으로 아가씨의 머리를 묶은 붉은 리본에 마음을 빼앗긴 브루노는 계속 생각했다. 자신이 소년이었고 그녀는 어린아이였을 그 전쟁 시절이 그녀에게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았을 수 있을까? 이제 이탈리아 어디에서 든 청소년들이 미국 잡지 화보에 나오는 아무것도 모르는 틴에이저 같을 수 있는 것일까? - P168

그러니까 등뒤에 남기고 떠났던 낡고 조그마한 세상이 저기 그대로 있구나라고 그는 결론을 내렸다. 마치 밀랍으로 복제한 듯 저기 모두 똑같은 모습으로 있구나. 하지만 클렐리아 트로티는? - P170

로비가티는 신발 밑창에서 잘라낸 가죽처럼 단단한 손바닥으로 노끈을 둘둘 감아 정확하게 힘을 주어 잡아당겼다. 입안에는 언제나 작은 못을 한 움큼 담고 있었고, 그의 혀와 입술은 놀라울 정도로 신속하고 정확하게 필요에 따라 밖으로 하나씩 내밀었다. 신발 한 짝을 무릎 사이에 바이스처럼 아주 단단하게 조인 채 지칠 줄 모르는 자동 동작으로 거기에 망치질을 해댔다······ 정말 훌륭하고 대단해! 브루노는 이렇게 생각했다. 로비가티의 힘과 자의식은 바로 그런 손의 노고에서 생겨나는 것이리라! 그의 크고 검은 손, 믿을 수 없을 만큼 거친 그 손의 분주한 움직임은 대화할 때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단 한 번의 망치질로 두꺼운 가죽에 박히는 못이 때로는 어떤 대화보다 그에게 더 유용한 것 같았다. - P180

자기가 하는 일이 아주 초라하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누구보다 내가 그렇게 확신하는데 어쩌겠어요. 하지만 그 직업 덕택에 어렸을 때부터 그럭저럭 생계를 꾸려갈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독재기간 내내 전혀 굴종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지요. 그런데 브루노 씨, 구두장이 일은 흥미로운 측면이 없다고 생각해요? 모든 인간 활동에는 흥미로운 측면이 있어요. 열정적으로 수행하고, 그 비밀을 파악할 수 있으면 돼요.
가시가 돋친 말은 전혀 아니었다. 그리고 브루노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자신의 슬픔을 조금씩 잊었고 결국 거의 행복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 P18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가 웃었다. 즐겁다기보다 슬프게 들리는 묘한 웃음이었다. 그의 삶을 잠시 상상해 보니 가여웠다. 다른 사람이 무엇을 겪고 있는지 아는 사람이 있을까? - P210

어제 그녀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우리를 움직이게 만드는 건 심장이 아니라 위야. 그녀가 생각했다. - P212

"영아 돌연사군요." 의사가 말했다."가끔 생기는 일이에요." 그녀는 이렇게 말한 의사를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었다. 어떤 일이든, 그녀는 용서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용서는 망각을 뜻했는데 그녀는 쓰라린 경험을, 추억을 붙잡고 사는 편이 더 좋았다. 그러나 그녀는 항상 자기 탓이라고 생각했다. - P219

마거릿은 거절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차마 내줄 수 없었다. 그 뒤에 아이가 죽었고, 그녀는 결국 양막을 불 속에 던졌다. 아이가 한 번도 하지 못했던 사소한 일들이 그녀를 괴롭혔다. 아이는 걸음마도 못 해보고, 나무에 오르지도 못했고, 비 오는 여름을 보지도 못했다. 그녀는 부엌 식탁에서 하는 숙제, 금별과 은별이 붙은 연습장, 현관에 놓인 더러운 헐링 채, 블레이저를 맞추기 위해 어깨 치수를 재는 것을 당연한 미래로 여겼다. 그랬는데 소리도 없이 시야에서 벗어나는 무언가처럼 미래가 지워졌다. 사라져 버렸다. - P220

그녀는 차를 타고 성당으로 가서 아이의 영혼을 위해 초를 켰다. 그녀가 성당에 간 것은 처음이었다. 나이 많은 여자가 고해소 밖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마거릿은 성 안토니오 발치에 초를 놓고 불을 붙인 다음 제일 앞줄에서 무릎을 꿇고 강론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는 배 속에서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는 동안 사제가 거기 서서 강론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마거릿은 기도를 드릴 생각이 아니 었지만 무릎이 아파서 고개를 들어 보니 나이 많은 여자는 사라지고 아이들이 첫영성체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남자 애들을 하나하나 보면서 절대 보지 못할 아이의 얼굴을 찾았고, 성당 포치에 놓인 성수대에서 셰리 병을 성수로 채워 광장을 가로질렀다. - P221

다른 인간과 이야기하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마거릿은 크리스마스 이후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고, 다른 사람의 말을 이해하려고 애쓰다가 자기 말을 이해하려 애쓰는 것이, 그 사이에 놓인 모든 오해의 가능성을 이해하려 애쓰는 것이 아주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P223

해수면에서 파도가 계속 부글거렸다. 바람은 강하지 않았지만 멎지도 않았다. 두 사람 모두 그 무엇도 멈추기를 바라지 않았다. 스택은 머리카락이 풍성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소농의 딸에게 그 오랜 세월을 허비하지 않았다면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난 사랑에 빠진 적이 없어요." 그가 말했다. "나한테는 조지핀밖에 없어요."
"내 마음이 아프려고 하네요."
그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당신 마음은 이미 아프잖아요." - P226

바다는 성내지 않았다. 파도는 매번 절벽 앞에서 제동을 걸고 여정이 끝나기 직전에 속도를 늦추는 것 같았지만 앞선 파도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듯이 다음 파도가 계속 밀려왔다. - P226

그녀는 미친 사람들이 세상에 있어서 기뻤다. 마거릿은 그를 바라보면서 자신도 약간 미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녀가 모퉁이를 돌자 타조들이 번화가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사람들이 보도에 서서 지나가는 타조들을 바라보았고 머리를 땋은 어린 소녀가 막대로 타조를 몰았다. 그래, 미친 거나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야. 마거릿이 생각했다. 때로는 모두가 옳았다. 미친 사람이든 제정신인 사람이든 대체로 어둠 속에서 비틀거리며 자신이 원한다는 사실도 모르는 무언가를 향해 손을 뻗었다. - P233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요?" 그녀가 말했다.
"네."
"나도 그래요."
"정말 다행 아닌가요?" - P23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거릿이 어렸을 때 어머니가 노크로 성지 순례를 갔다가 막대 사탕과 우산을 가지고 돌아왔다. 마거릿은 바람이 세찬 날을 기다렸다가 날 수 있을 줄 알고 보일러실 담벼락에서 우산을 펴고 뛰어내렸다가 도로에 떨어져 발목이 부러졌다. 성인이 된 다음에도 근거 없는 생각이 틀렸다는 것이 그렇게 빨리 증명된다면 좋았을 텐데. 어른이 된다는 것은 대체로 어둠 속에서 지내는 것이었다. - P190

5시가 되어 사위가 어두워지자 그녀는 밖으로 나가서 치마를 걷어 올리고 풀밭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녀는 집 주변의 모든 풀잎에 소변을 보고 싶었지만 이유는 자신도 몰랐다. 풀은 길고 위쪽이 시들했다. 더나고어는 나무 한 그루도, 가을에 시든 나뭇잎 한 장도 볼 수 없는 이상한 곳이었다. 출렁이는 이탄지와 쉬지 않고 움직이는 구름 아래에서 비명을 지르며 날아다니는 갈매기들 밖에 없었다. 풍경은 금속처럼 견고하고 영원해 보였지만 오크 나무와 마가목의 고장에서 온 마거릿에게는 덧없는 느낌이었다. 여름에 그늘도 없을 테고 8월이면 노랗게 익는 보리밭도 없을 것이다. 동쪽에서는 지금쯤 하늘이 낙엽에 가려지고 암소들이 헛간으로 들어가고 젖소들이 칸막이에 묶일 것이다. - P191

다음 날 아침, 마거릿은 재를 비우러 나갔다가 바람에 날린 재가 눈에 들어가서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 와서 누구도 해치지 않고 누구도 자신을 해치게 두지 않으면서 이 집에서 최대한 오래 살겠다고 결심했다. 자신이 누군가를 해치거나 그 반대의 경우가 생기면 그녀는 다시 이사할 것이다. 여기까지 온 경로를 이어 배를 타고 아란 제도로 건너 가서 아일랜드의 최서단으로 옮길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최선을 다해 사람들과 적당히 거리를 두자. 사람들은 귀찮기만 할 뿐이었다. - P191

마거릿은 사제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녀는 산책에서 돌아와 비눗물이 든 대야에 발을 담그고 앉아서 라디오 너 게일턱터 방송을 듣거나 뜨거운 물병을 안고 그의 침대에 들어가서 램프를 기울여 불빛 각도를 맞춰 그의 책을 읽었다. 가끔 그가 밑줄 친 문단을 발견했지만 대단한 의미는 없었다. 그녀가 이 집에서 마주치는 그 무엇도 아무 의미가 없었다. 가끔 마거릿은 침대밑에서 그의 그림자를 보았고, 그녀의 존재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그의 차가운 존재를 느꼈으며, 그의 풀어진 옷깃과 소매에 들어간 건초 부스러기가 다시 보였지만 사제의 유령일 뿐이었다. - P195

마거릿은 잠들기 전에 벽 너머의 이웃이 침대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궁금하게 여기긴 해도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무엇도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이미 일어난 과거를 말로 표현하는 것은 무의미해 보였다. 과거는 곧잘 배신을 했고, 천천히 움직였다. 자기만의 속도로 결국은 현재를 따라잡을 것이다. 게다가 어차피, 뭘 할 수 있을까? 후회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고 슬픔은 과거를 다시 불러올 뿐이었다. - P196

크리스마스이브 전날 밤, 그녀는 절벽까지 걸어갔다가 돌아왔다. 어머니에게 몇 자 적어 보냈지만 답장은 없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해도 마거릿은 알 수 없었다. 바다가 미쳐 날뛰며 땅을 먹어치웠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흠뻑 젖어 있었다. 짭짤한 비 때문에 추우면서도 더웠다. 날이 점점 어두워졌지만 마을에 불이 켜지지 않았다. 전기가 나간 것이다. 마거릿은 난롯불에 이탄을 던져 넣었다. 제대로 마르지 않은 이탄이 난로 받침대에서 기분 나쁜 연기를 피웠고, 불꽃으로 타오르지도 못한 채 다 타서 꺼졌다. 마거릿은 나무가, 도끼로 쪼갤 수 있는 커다란 마가목 장작이 너무나 갖고 싶었다. 서리가 내린 맑은 아침에 밖에서 장작을 팬 다음 벽에 기대어 쌓는 모습을, 거기서 어떤 냄새와 열기가 풍길지 상상했다. 그러나 더나고어에는 장작이 드물었다. - P198

그날 밤, 마거릿은 초를 켜고 비눗물에 발을 담근 채 연기를 잔뜩 피우는 이탄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사제가 지옥에 갔을까 생각했다. 사제는 사후 세계를, 하느님과 천국과 연옥을 전부 다 믿었다. 그는 지옥을 믿지 않으면 천국을 믿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마거릿은 자신도 그가 있는 지옥에 갈까 생각했지만 그보다 차라리 푸칸이나 돌소리쟁이가 될 가능성이 더 큰 것 같았다. - P199

그는 혼자 죽을 것이라고, 문짝을 다 먹어치우고 나간 조지핀을 누군가 길에서 알아본 다음에야 자기 시체가 발견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적어도 죽음만큼은 확신했다. 누구나 무언가를 확신해야 했다. 그래야 하루를 이해할 수 있었다. - P20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네.‘ 그녀가 솔직하게 말했어요. ‘남편은 자기 씨앗이 없답니다.‘
이 말을 하는 여자의 태도 때문에 외판원은 초조해졌어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죠. 그녀의 수국처럼 파란 수국은 본 적이 없다고 말했어요. 그런 다음 밖으로 나가 꽃을 만져보았어요. 여자는 수국을 만지는 남자에게 내리쬐는 태양에 끌렸지요. 그녀가 남자에게 다가가서 그녀의 손이 그의 목을 만졌고, 그런 다음 그의 엄지가 올라와서 그녀의 입술을 쓸었어요. 놀란의 손보다 부드러웠죠.
"당신의 눈은 젖은 모래 색이군요.‘ 남자가 그녀에게 말했어요." - P133

아이는 이 부엌에 있는 사람들이 좋다. 그들이 늘 이렇게 행복하면 좋겠다.
"여자는 현관문 옆에 장미 덤불을 심었어요." 마사가 이야기를 계속한다. "밤이 늦어서야 돌아온 놀란은 자기 돈을 그런 데 쓰다니 멍청하다고 말했죠. ‘도대체 어떤 여자가 꽃에다가 돈을 다 써?‘ 그뿐만 아니라 자기한테 제대로 된 저녁 식사도 차려주지 않는다고 책망했어요. ‘일하는 남자 저녁으로 감자랑 양배추는 부족해."
"배가 불렀군!"
디건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 그가 들을 필요 없는 부분도 있다. 마사는 개를, 딸아이를 끌어들일 것이다. 어디까지 이야기할지 아무도 모른다. 이웃 사람들은 마사가 이 이야기 말고는 한 적 없다는 듯이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해서 듣고 있다. 디건이 일어선다. - P134

침묵의 뚜껑이 디건 가족을 덮는다. 너무 많은 말을 했기 때문에 할 말이 남지 않았다. 요즘은 이웃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 디건은 미사 참례도 그만두었다. 그게 무슨 소용인지 이제 모르겠다. 그는 더 늦게까지 일하고, 먹고, 우유를 짜고, 목요일마다 테이블에 돈을 두고 나간다. - P136

"당신이 딸한테 화풀이한 게 유감스러울 뿐이야." 그녀가 말한다. "그뿐이야."
"난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몰랐어." 그가 처음으로 인정한다. 이제 이 길로 들어서면 끝이 없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디건은 더없이 확신에 찬 순간에도 무언가에 끝이 있으리라고 진심으로 믿지 않았다. 그들은 열기가 너무 뜨거워져서 뒤로 물러나야 할 때까지 그 자리를 지킨다. - P140

마사가 딸의 손을 잡는다. 그녀는 모아둔 돈을, 외판원과 못 쓰게 된 붉은 장미들을 생각한다. 여자애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 저지가 돌아왔다. 아이가 지금 당장 신경 쓰는 것은 그 사실밖에 없다. 자기가 오빠에게 불붙이는 법을 가르쳐줬다는 생각은 아직 떠오르지 않는다. 그 죄책감은 나중에나 생길 것이다. 디건은 무감각하지만 전보다 가벼워진 느낌이다. 과거의 고역은 사라졌고 새로운 일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길 웅덩이에 불길이 비쳐 은처럼 밝게 빛난다. 디건이 생각을 붙잡는다. 그에게는 일이 있고, 이건 그저 집일 뿐이고, 그들은 살아 있다. - P140

"누가 신경이나 쓴대?" 아이가 따라가면서 계속 속삭인다.
"누가 신경이나 쓴대?" - P141

부모님이 이혼 절차를 밟는 동안 그를 데리고 살았던 할머니는 이제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의 부재를 느끼지 않은 적이 하루도 없다. 할머니는 인생을 다시 산다면 절대 그 차에 올라타지 않겠다고 말했다. 집으로 돌아가느니 거기 남아서 거리의 여자가 되겠다고. 할머니는 남편에게 자식을 아홉 명 낳아주었다. 청년이 차에 다시 탄 이유를 묻자 할머니가 말했다.
"우리 땐 다 그랬어. 난 그렇게 생각했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줄 알았어." - P156

모래톱에 다다르니 슬슬 지친다. 밤이라서 물이 더 차갑고 파도는 더 화가 났지만 그는 늘 그러듯 해안으로 헤엄쳐 돌아가기 전에 여기서 쉴 수 있다. 바닥의 모래를 느끼려고 발을 내려본다. 머리 위로 두꺼운 파도가 덮쳐 그를 깊은 물속으로 빠뜨린다. 그가 물을 먹고 얕은 곳을 찾아서 더 멀리 가보지만 바닥이 느껴지지 않는다. 샴페인을 그렇게 마실 생각은 아니었다. 애초에 수영하러 올 생각도 아니었다. 그가 원한 것은 단지 행복한 생일날이었다. 그는 한참 발버둥을 치다가 더 깊이 잠수한다. 오직 숨을 쉬러 위로 올라가면 더 쉬울 것 같다. 공황이 덮치지만 시간이 지나자 평화로운 무언가로 바뀐다. 왜 정반대는 항상 이렇게 가까이 있을까? 바이올린의 아름다운 고음, 듣기 싫게 찢어지는 소리가 되기 직전의 그 음 같다. 그는 단념하고 수면으로 떠오른다. 헤엄쳐 갈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 때까지 둥둥 떠 있다가 서서히 해변을 향해 애쓰며 나아간다. 거리가 무척 멀지만 밤하늘을 등진 리조트 불빛이 선명하고 점점 가까워진다. - P157

얕은 물가에 이르자 해변으로 기어 올라가 모래 위에 쓰러진다. 그가 힘들게 숨을 쉬면서 주변을 둘러보지만 조류가 그의 옷을 가져가 버렸다. 그는 바다에서 육지로 올라온 최초의 종을, 그들에게 얼마나 용기가 필요했을지를 상상한다. - P158

그는 어머니의 어머니를, 그렇게 먼 길을 가서 시간이 한 시간밖에 없는데도 바다에 들어가지 않았던 할머니를 생각한다. 강에서는 수영을 그렇게 잘했는데 말이다. 그가 왜 그랬냐고 묻자 할머니는 바다가 얼마나 깊은지 몰라서 그랬다고 말했다. - P160

누군가를 모욕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었다. 그는 어느 날 밤 침대에 누워서 아내가 자는 줄 알고 어둠 속에서 이 말을 소리 내서 했는데, 아내는 때로 누군가를 모욕하지 않기가 더 힘들다고, 그리스도인이라면 극복하도록 노력해야 할 약점이라고 대꾸했다. 그는 아내의 숨소리가 달라진 뒤에도 한참동안 잠 못 이루고 누워서 그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무슨 뜻이었을까? 여자의 마음은 유리로 만들어졌다. 너무 투명하지만 또 너무 쉽게 깨졌다. 더 단단한 다른 유리 같은 생각에 졌다. 남자를 매료하는 동시에 겁을 주기에 충분했다. - P166

자전거에서 내린 중사는 도로 한편의 주목 아래 가만히 서 있었다. 주목은 심은 시기가 제각각이었고 그 밑에 서서 비를 피하면 기분이 좋았다. 똑같은 검은 연기가 아직도 막사 지붕으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서서 지켜보았지만 연기는 변하지 않았다. 도허티가 헛간으로 가는 낌새도 없었다. 강아지는 키운 방식 그대로 개가 된다. - P167

중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 익숙한, 차분한 우월감이 찾아왔다. 그보다 못한 이들은 그 느낌에 굳어졌겠지만 중사는 그때야말로 살아 있는 것 같았다. 가시금작화 밑에서 사정거리 안에 기관총 사격수가 보였던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음모를 꾸미는 익숙한 전율, 곤두선 신경. - P169

중사가 꾸러미를 가지고 뒤로 나가서 자전거 짐받이에 조심스럽게 묶었다. 이제 막사로 돌아갈 준비가 되었지만 부엌으로 다시 들어가서 잠긴 문을 열고 가게로 들어갔다. 중사가 왔다는 소리에 멈추었던 대화가 일상적인 담소로 바뀌었지만 그가 가게에 들어가자 그것마저 뚝 끊겼다. 그는 침묵을 헤치고 걸어가면서 항상 느꼈던 그 익숙한 거리감과 우월감을 느꼈다. 그는 이 근처에서 자랐고 사람들은 그의 가족을 알았지만 그는 절대 그들과 비슷한 사람이 되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카운터에 서서 짙은 색 나무의 얼룩을 보았다. - P173

"날씨가 참 사납지 않아요?"
침묵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늘 있다. 다른 상황이라면 타인을 죽게 만들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불이 필요한 날씨예요." 다른 사람이 말했다.
중사는 누구 한 사람이 나서기를, 대놓고 뭐라 하기를 바라지만 아무도 그럴 용기가 없었다. 그의 앞에서는 가볍고 엉큼하게 한가로운 농담이나 할 테고, 중요한 이야기는 그가 떠난 직후에야 나올 것이다. - P173

생각했던 대로였다. 그녀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옳았다는 사실에 위안을 느꼈지만 내심 틀리기를 바랐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희망은 언제나 제일 마지막에 죽는다. 그는 이 사실을 어렸을 때 배웠고 군인으로서 직접 목격했다. - P178

방이 따뜻해졌고 이제 체인도 말랐을 테다. 불빛이 자전거 바퀴 테, 핸들, 바퀴살을 비추었다. 그는 자전거를 뒤집어서 한 손으로 페달을 천천히 돌리면서 기름 깡통의 노즐을 체인에 가져다 댔다. 기름을 칠하면서 돌아가는 체인을 보고 있으니 체인이 사슬 톱니에 완벽하게 맞는 것이, 톱니의 이가 체인에 딱 맞게 만들어진 것이 놀라웠다. 어딘가에서 어떤 남자가 자기 무게를 이용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 남자는 머릿속으로 그 장면을 상상하면서 계속 노력했고 결국 이루어냈다. 자전거에 기름을 바르자 예전에 총을 손질할 때 느꼈던 즐거움이 피어올랐다. 총신을 따라 천을 밀어 넣는 느낌, 금속의 둔탁한 번쩍임, 탄실에 미끄러져 들어가는 총알. 모든 것이 다른 무언가를 위해 만들어졌고, 그 존재 덕분에 매끄럽게 굴러갔다. - P179

그는 반지와 열쇠를 확인한 다음 페달에 발을 올리고 출발했다. 곧 그는 힘들게 페달을 밟아 언덕을 올라가면서 이제 빈둥거리며 여자들의 얼굴을 붉히게 만들던 시절이 끝나고 있음을 인식했다. 싸늘한 느낌이 치솟았 다. 그에게는 새로운 느낌이었고, 새로운 것은 뭐든 그러하듯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 P182

마거릿 플러스크는 모자도, 고무장화도, 남자도 없었다. 긴 갈색 머리가 등 뒤로 해초처럼 느슨하게 내려왔다. 그녀는 딱 맞는 커다란 양가죽 외투를 입었고, 인간 세상을 내다볼 때는 많은 것을 견뎌내고 살아남은 여자처럼 엄격한 시선이었다. 마거릿은 더나고어로 이사 왔을 때 마흔 살도 채 안 되었지만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때는 이미 지났다. 아이를 낳을 능력은 벌써 몇 년 전에 사라졌는데, 그녀는 항상 퀴큰 나무 숲의 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 P188

그녀는 불을 꺼뜨릴 만큼 오랫동안 집을 비우지도, 잠을 자지도 않았다. 사실 그녀는 별이 아직 떠 있을 때 일어나는 것을 좋아했다. 떨어지는 별을 보면 만족스러웠다. 마거릿은 자연의 힘을 믿었을지 몰라도 불운을 불러온다는 행동은 열심히 피했다. 그녀는 불운을 이미 겪었으므로 이제 월요일에 절대 재를 버리지 않았고, 일꾼을 지나칠 때는 반드시 그의 일을 축복했다. 난로에 소금을 뿌리고, 침실 벽에 성녀 브리지다의 십자가를 걸고, 달의 변화를 주시했다. - P18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