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자기 아이들에게 부자나 마구 평평 돈 쓰는 사람, 혹은 외국 스타일의 이름을 붙여 줘. 가령 타이슨 알렉산더, 혹은 페이버나 에더 또는 윌퍼나 롬멜, 그리고 예이손 등등의 이름을 들 수 있어. 나는 사람들이 어디서 그런 이름을 가져오는지, 혹은 어떻게 그런 이름들을 만들어 내는지 몰라. 이것들, 그러니까 쓸모도 없고 바보 같은 외국 이름이나 억지로 만들어 낸 우스꽝스러운 이름은 가난한 삶 속에서 자기 아이들을 조금이라도 남보다 낫게 만들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야. - P10

나는 길에서 무언가 범상치 않은 것을 눈치챘어. 똑같이 생긴 집들이 죽 늘어선 새로운 동네들 사이로, 내 어릴 적의 낡고 오래된 작은 시골집 몇 채가 예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서 있었던 거야.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마술적인 장소인 ‘봄바이‘ 술집이 있었어. 한쪽으로 가솔린펌프, 그러니까 주유소가 있었어. 주유소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지만 술집은 그대로 남아 있었어. 대들보가 받치고 있는 지붕은 과거와 똑같았고, 회반죽 벽돌로 만든 흰 벽도 똑같았어. 가구는 지금의 것이었지만,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 그곳의 영혼은 계속 그 안에 있으니까. 나는 그것을 내 기억과 비교했는데, 그대로였어. ‘봄바이‘는 그대로였어. 내가 어린아이, 청년, 어른, 늙은이였더라도 항상 나였던 것처럼. 이제는 지겨워진 원한과 증오도 그대로였어. 증오와 원한은 기억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불평과 불만을 잊어버려. - P16

이봐, 알렉시스, 네가 나보다 나은 점이 하나 있어. 너는 젊고, 나는 곧 죽을 몸이라는 사실이 그것이야. 하지만 불행하게도 너는 내가 경험했던 행복을 절대로 경험할 수 없을 거야. 행복은 텔레비전과 카세트 라디오, 펑크광과 록 마니아, 그리고 축구 경기로 가득한 네 세상에서는 존재할 수 없거든. 인류가 텔레비전 앞에 오래도록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서 스물두 명의 유치한 어른들이 공을 차는 걸 지켜본다면, 희망은 없는 거야. 희망은 불쾌하게 만들고, 유감스럽게 하며, 사람들의 엉덩이를 걷어차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해. 그렇게 사람들을 영원의 절벽으로 곤두박질치게 만들어서 지구에서 떠나게 하고 결코 못 돌아오게 하려고 해. - P17

인류가 살아가려면 신화와 거짓말이 필요해. 만약 누군가가 그대로 드러난 진실을 본다면, 아마도 자기 머리에 총을 쏴 버릴 거야. - P20

알렉시스는 지금이 아니라 내가 스무 살이었을 때, 그러니까 머나면 과거에 내게 왔어야만 했어. 그러나 수많은 세월이 지난 후 그날 밤, 멈춘 시계로 가득한 그 아파트에서 우리가 만나도록 계획되어 있었지. 내 말은 우리가 만나야만 했던 시간보다 한참 후의 일이란 소리야. 내 인생의 줄거리는 부조리한 책과 같아. 그러니까 먼저 나와야 할 것이 나중에 나오지. 이런 책을 쓴 사람은 내가 아니고, 그것은 이미 쓰여 있었어. 나는 단지 우유부단하게 한 장 한 장씩 실천에 옮기고 있었을 뿐이야. 나는 최소한 마지막 페이지라도 내 손으로 단숨에 써 내려 가고 싶다는 꿈을 꾸지만, 꿈은 꿈일 뿐이야. 아마 그것조차도 가능하지 않을 것 같아. - P23

"이봐, 그건 음악도 아니고 그 어떤 것도 아니야. 흰 벽을 보는 법과 침묵을 듣는 법을 배우도록 해." - P24

내 오래된 친구인 루피노 호세 쿠에르보는 내가 젊은 시절에 자주 접했던 문법 학자야. 그는 100년 전에 이미 ‘해야만 한다‘와 ‘해야 했을 것이다라는 말은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주었거든. 앞의 말은 의무이지만, 뒤의 말은 의심이나 추측이기 때문이지. 여기서 두 개의 예를 들어보겠어. 하나는 이거야. "그의 형제들이 공공사업 계약으로 부자가 되고, 대통령도 그걸 허락하기에 그 역시도 도둑놈일 거야." 그러니까 나는 무언가를 단언하지 않지만, 그 무언가가 무엇이든지 내가 믿고 있다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어. 그리고 믿는 것으로 보이기에, 비방이나 중상모략 따위는 없지. - P28

그건 그렇고, 당신은 택시 운전사들이 빈 택시로 다니는데 왜 손님들을 그토록 함부로 대하는 것이냐고 따질지도 몰라. 그건 그래야만 일이 생기기 때문이야. 어느 현자는 "노동이 인류를 타락시킨다."라고 말했지. 그럼 버스로 다니는 건? 음악 소리를 듣지 않고 버스를 타고 다닐 수 있을 것 같아? 그렇다면 그것은 산소 없이 숨을 쉴 수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 P31

바닥에 엎드리라고? 나 말이야? 절대 그럴 수는 없어! 나는 명예와 체면이 있어서 그런 행동은 하지 못해. 그래서 내 귓가에는 마치 전기면도기의 날처럼 윙윙거리며 날아오는 총알 소리가 들렸고, 나는 그 총알들 사이로 계속 길을 걸어갔어. 그러면서 오래된 시구를 생각했어. 그게 누구의 시더라? "아, 죽음이여, 화살에 실려 조용히 오라."라는 시구였어. 나는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고 멀쩡하게 그곳을 지났고, 뒤를 바라보지 않은 채 계속 걸어갔어. 호기심이란 악당들의 나쁜 습관이거든. - P34

도망친다고? 줄행랑친다고? 그건 내가 절대로 하지 않았던 행동이었어. 결코 말이야. 죽음은 내가 시키는 대로 하는 심부름꾼이거든. - P35

햇빛을 받은 그의 몸에서는 금빛 솜털이 반짝거렸어. 그러니 어떻게 내가 사진을 찍지 않을 수 있겠어! 하나의 영상이 1000개의 단어보다도 더 가치 있다면, 우리 아이가 살아 있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게 있겠어! - P38

그 장소에서 떠나기 전에 나는 우글대는 구경꾼들을 슬쩍 쳐다보았어. 그들의 야비하고 천한 영혼 밑바닥부터 말할 수 없는 은밀한 기쁨이 용솟음치고 있었어. 심지어 나보다 더 행복해했어. 죽은 사람과 전혀 관계없는 그 사람들이 말이야. 오늘 먹을 게 없을지 몰라도, 이야깃거리는 있으니까 그랬을 거야. 적어도 오늘 그들은 벅차고 충만한 삶을 산 것이거든. - P40

그는 병을 땄고, 한 모금을 마시고서, 입에 머금은 술을 내게 주었어. 그렇게 나는 그의 입에 있는 술을 마셨고, 그는 내 입에 있는 술을 마셨어. 그렇게 어리석은 삶, 불가능한 사랑, 타인을 향한 증오를 두고 헛소리를 지껄이면서 큰 술병을 모두 비웠어. 그리고 다음 날 토사물 속에서 눈을 떴어. 그건 메데인, 그러니까 저주받은 도시의 악마들이었어. 우리가 그곳 거리를 걸어 다니면서 삼켜버린 악마들이었어. 그들이 눈이나 귀, 코나 입으로 우리 안으로 들어왔던 거야. - P41

시간은 모든 것을 휩쓸어 버려. 심지어 관습까지도. 그래서 변화에 변화를 겪으면서 사회는 점차 유대감과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헤지고 누덕누덕 기운 침대보처럼 되어 버려. - P44

미래에 희망이 있으면, 현재는 아주 잘 흘러가거든. 과거에 대해 말하자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이 과거이고, 그것이 나를 지금 이렇게 지탱해주는 거야. - P53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계속 길을 갔어. 뛰는 건 좋지 않아. 뛰는 사람은 체면과 품위를 잃어버리고, 꼴사납게 엎어지고, 결국 체포되고 말아. 게다가 여기서는 오래전부터, 정말로 오래전부터 아무도 도둑을 뒤쫓지 않아. 내가 기억하는 바로는, 어렸을 때는 천하고 시시한 보행자일지라도 법이라는 것의 보호를 받아 도둑놈 뒤를 쫓곤 했어. 하지만 오늘날엔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아. 그를 잡는 사람은 죽거든. 집단정신과 단체정신은 비열하고 야비하게 변했어. 겁쟁이 사냥개 같은 개자식들은 그걸 잘 알고 있어. 쫓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 가만히 있으면서 아무것도 보지 마. 당신이 계속해서 보고 싶으면 말이야. 주변에는 경찰이 없었어. 아니 그들을 도와줄 경찰이 없었지. 세 개의 총탄이 내 아이의 쇳덩이에 있었고, 그래서 다른 세 명의 이마에 재의 십자가를 그릴 수 있었어. 우리는 죽기 위해 태어나거든.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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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은 그 소유자를 파괴하는 법, 이념을 품는다는 것은 가슴에 시한폭탄을 품은 것과 같아서 언젠가는 그 이념에 의해 스스로 파괴되고 만다. - P201

이념이, 명분이 밥 먹여주나. 이 어려운 세월에 그건 오히려 입으로 가져가는 밥숟갈을 빼앗아가는 생존의 적이 아니냐. 이념이나 명분에 집착하는 것은 편집증일 뿐이다. 이념이란 사물을 바라보는 한가지 선입견에 불과하다. 선입견을 좀 바꿔 바라보자. […] 너무 외곬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감정의 혹사가 아닌가. 감상주의가 아닌가. - P204

너는 어서 골목길을 벗어나고 싶어 걸음을 빨리한다. 의사가 너에게 뭐라고 말했나. 날 저문 날 공장데기 아이가 길 잃기 쉬운 곳이란다. 공장 문은 닫히고, 놈팽이는 군대 가버리고, 돈은 떨어져, 고향엔 무조건 가기 싫고······ 그럴 땔수록 길을 잃기 쉽단다. - P217

동숙이의 자취방으로 가는 길은 넓은 공터 가운데로 뚫려 있다. 알싸한 쓰레기 냄새. 어둠속에서 연탄재들이 발에 툭툭 차인다. 동숙이를 만나면 먼저 무슨 말을 할까? 뭐라고 거짓말을 둘러대지? 사실대로 말할까봐. 너무 피곤해. 거짓말할 힘도 없어. 따뜻한 아랫 목에 동숙이랑 나란히 누워 언 등허리를 녹이고 싶어. 따뜻한 눈물을 흘리고 싶어. 동숙아, 나 많이 다쳤나봐. 나 좀 만져줘. 이 겁먹은 응어리를 으깨뜨려줘. 난 금붕어를 죽여버리고 말았어. - P224

남자 손이 떠났다. 그 흉측스럽고 뻔뻔한 얼굴을 찾으려고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주위에는 모두 하나같이 무표정한 얼굴뿐. 그 엉큼한 손은 어디로 사라졌나? 승객들은 허공의 우연한 한점 혹은 앞 사람의 뒤통수에 눈을 둔 채 멍청하게 굳어져 있다. 그것은 버스를 타고 한참 흔들리다보면 누구나 자연히 터득하게 되는 굳은 껍질이다. 치면 둔중한 금속성이 날 것 같다. 땀 젖고 끈적거리는 그 엉큼한 손은 어디로 빨려들어갔나? 모두 저렇게 단단히 굳어버렸는데 그 멀컹한 손을 무슨 수로 찾아낸단 말인가? -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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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에 대해 누가 뭐라고 하든, 생각을 자유로이 풀어준다는 점은 장점이다. 록밴드, 블루스밴드, 그리고 살사밴드까지, 이들은 모두 관객이 완전히 집중하게 만드는 데 온 힘을 쏟는다. 드럼과 앰프의 목적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클래식 음악가들은 관객이 좀 더 편안히 앉아서 각자 자신의 생각을 정처 없이 따라갈 수 있는 분위기를 기꺼이 만들어주는 것 같다.
어린이용 이야기책에 나오는 그 옷장과 조금 비슷하다. 용감한 소녀가 외투 사이를 지나 완전히 새로운 세상에 도착하는 이야기 말이다. 조금 전까지 나는 카네기홀에서 소나타를 듣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면 눈이 내리기 시작한 숲속을 방황하고 있다. 그러다 소나무에 에워싸인 작은 공터에 다다르면, 가로등과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 - P203

토미는 양복을 옷걸이에 걸고, 이를 닦고, 침대로 올라왔다. 그러고는 1분쯤 책을 읽는 시늉을 하다가 불을 끄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곧 다시 일어나 신발을 정리했다. 토미가 다시 베개를 베고 누운 뒤 나는 몸을 기울여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때로는 우리에게 그런 것이 필요하다. 아무리 암담한 상황이라 해도 다 괜찮아질 것이라고 달래듯이 누군가가 머리에 쪽 입을 맞춰주는 것. 내가 최소한 그 정도는 해줘야 할 것 같았다. 10분 뒤면 나는 곤히 잠들겠지만, 토미에게는 아주, 아주 긴 밤이 될 테니까. - P217

어떤 사람들은 얄궂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주는 딱히 얄궂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얄궂은 것과는 정반대다. 저주에 담긴 내용이 그대로 실현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면에서 한마디, 한마디가 그대로 실현되기를.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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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를 한바퀴 돌고 나오자 사람들의 행렬은 길을 가득 메웠다. 가뭄 타는 땅거죽은 사람들이 떼지어 움직이자 마른 먼지가 구름 같이 일어나 높이 공중에 뻗어올랐다. 부황 들어 누르께한 얼굴에 휑뎅그렁 걸린 눈망울들. 덩덩, 북소리는 그들의 허기진 배 속을 아프게 울리고 있었다. - P10

어째서 큰 부정은 죄가 안되고 작은 것만 죄가 되나. 부정이란 그 규모가 크면 클수록 부정의 탈에서 벗어나는가? 그렇다. 도둑도 좀도둑이 훨씬 도둑답다. 그것이 대담해져서 명화적쯤 되면 이미 도둑의 탈은 벗겨지는 법. 부정이란 것도 좀스럽고 쩨쩨한 구석이 있어야 진짜 부정이지, 쥐가슴 태우며 훔쳐내는 쌀 한톨, 실 한가닥은 부정이지만 환곡미 이백석 횡령은 이미 부정이 아니었다. 그건 백성들의 상상을 훨씬 능가해버린 것, 손에 잡히지 않는 막연한 추상이었다. 그건 이미 부정이 아니라 지체 높은 권세였다. 큰 부정일수록 이렇게 모두 환골하고 탈태하여 나라 경영의 대종을 이루었던 것이다. - P27

팔년 세월에 비하면 김포공항에서 단 오십분 만에 훌쩍 날아간 고향은 참으로 가까운 곳이었다. 기내에 퍼져 틀틀거리는 엔진 폭음에 귀가 먹먹해져서 잠시 멍한 방심상태에 몸을 맡기고 있는데 별안간 기체가 덜컹하기에 눈을 떠보니 제주공항이었다는 식으로 나는 고향에 닿았다. 정말 눈 깜짝할 새에 고향땅 한복판에 뚝 떨어진 거였다. 그건 흡사 나 자신이 고향을 찾은 게 아니라 거꾸로 고향이 나를 찾아온 것처럼 어리둥절하고 낭패스러웠다. 뭐랄까, 아무 예비감정도 없이 고향과 맞닥뜨린 셈이랄까. 나는 비행기 안에서 좀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멍하니 허송한 오십분이 못내 후회스러웠다. 괜히 비행기를 탔다 싶었다. 기차를 타고 배를 타야 하는 건데 팔년 만의 귀향을 직장 통근시간에 불과한 단 오십 분에 끝내다니. - P43

잿빛 바다 안으로 날카롭게 먹혀들어간 시커먼 현무암의 갑, 저걸 사투리로 ‘코지‘라고 했지. 바닷가 넓은 ‘돌빌레‘에 높직이 쌓여 있는 저 고동색 해초더미는 ‘듬북눌‘이겠고, 겨울 바다에 포말처럼 둥둥 떠 있는 저것들은 해녀들의 ‘테왁‘이다. 시커먼 현무암 바위 틈바구니에 붉게 타는 조짚불, 뭍에 오른 해녀들이 불을 쬐는 저곳을 ‘불턱‘이라고 했지. 나는 잊어먹고 있던 낱말들이 심층의식 깊은 데서 하나하나 튀어나올 때마다 남모르는 쾌재를 불렀다. 이렇게 추억의 심부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내 머릿 속은 고향의 풍물과 사투리로 그들먹해지는 것이었다. - P45

집터엔 잿더미 속에서 양식이 썩고 있는데 굶어야 하다니, 무슨 이런 놈의 세상이 있는가? 제 것 제가 못 먹고 누가 먹는가. 아이고, 먹긴 누가 먹어, 도두, 서호 것들이 먹지. 도두, 서호 것들이 지서와 짜고 훔쳐 먹는다지 않는가. 귀리집은 노여움이 불끈 치밀어올랐다. 우리 것을 왜 저들에게 빼앗겨? 왜? 계엄령만 해제되면 되를 말로 갚겠다고 그렇게 애걸 복걸했건만 저들이 언제 고구마 한 꽁맹이라도 뀌어주던가. - P119

귀리집은 바람 불어오는 바다 쪽으로 힐끗 눈을 준다. 방금 가로질러 건너온 일주도로에는 모래바람이 뽀얗게 일고 있고, 그 너머 해변가의 도두봉 양옆으로 뽕그랗게 부풀어올라 있는 바닷물마루(수평선)는 높하늬바람에 부대 험상궂게 울퉁불퉁하고 흰 거품을 일으키는 물이랑들이 수없이 바다들판을 뒹굴고 있다. 깔축없이 갈치떼가 허옇게 뜬 격이로고. 참말 저것들이 몽땅 갈치떼라면 얼마나 좋을거나. 하룻밤 배 띄워 흔전만전 잡아다가, 빈 몸으로 이 해변에 소개해 와서 굶기를 밥 먹듯 하는 우리 노형마을 사람들 곯은 배를 한번 양껏 채워나봤으면······ 노란 햇조밥에 구운 갈치. 구울 때 들러붙은 검정 조짐불 재도 털지 않고 먹는 그 살진 맛이라니. 조바심 철이면 해변가 도두 서호 아지망들이 대구덕에 갈치를 지고 올라와 팔았었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당장 배 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고 오목가슴이 쓰려왔다. - P121

소개란 취약지구의 인원과 물자를 후방 안전지대로 후송시킴을 뜻하는데, 이건 숫제 마을에 불을 놓아 물자를 모조리 태워버리고, 거기다가 폭도들이 섞여 있을지 모른다고 인원마저 파괴했으니, 초토작전보다 더 가혹한 것이었다. 게릴라란 물고기와 같아서 인민이라는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존재라고 월남에서 배웠지만, 교본대로라면, 인민이란 물을 퍼내서 게릴라가 서식처를 잃고 자멸하도록 해야 옳지 않았던가. 누구는 편리하게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전쟁이란 으레 그런 거다, 그게 전쟁의 메커니즘이라는 것이다, 전쟁이 그렇게 시킨다, 그 사람들이 특히 잔인해서 그런 게 아니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 전쟁 통에선 어느 때 어디서든 얼마든지 일어날 수가 있는 일이다, 월남 땅 밀라이 사건을 보라, 하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건 전쟁 중에 일어난 게 아니었다. 6•25 터지기 두해 전 일, 그러니까 그건 전쟁이 아니라 좌익폭동 진압이었다. 폭동 진압에서 삼만이 죽었다니! - P149

방심할 때면 문득문득 떠오르는 저 피 젖은 흰 저고리, 그때마다 숨 가빠 헐떡거리는 이 감정은 도대체 뭐냐? 겁이냐, 분노냐? 아니, 내가 언제 한번이라도 분노를 느껴봤더냐? 이건 두말할 것 없이 겁이다. 백주에 가위눌림이다. 더위 먹은 소 달 보고 헐떡거림이다. - P154

피해자일 뿐인 어머니에 대한 이 가당찮은 반감은, 실은 마땅히 가해자한테로 향해야 할 분노가 차단된 데서 생긴 엉뚱한 부작용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응당 가해자의 멱살을 붙잡고 떳떳이 분노를 터뜨려야 하는데, 도무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그렇게 할 수 없다. 빨갱이로 몰릴까봐 두려운 것이다. 피해자인 섬 사람들은 삼만이 죽은 그 엄청난 비극을 이렇게 천재지변으로 치부해버린다. 어쩔 수 없는 운명적인 것, 자신이 박복해서, 아무래도 전생에 무슨 죄가 있어서 당했거니 하고 체념해버린다. 허울 좋은 이념 때문에 폭동을 일으켜 살인, 방화를 일삼던 장본인들의 죽음이야 자업자득이라 하겠지만, 어째서 양민의 숱한 죽음들마저 자업자득이란 말인가. 그것을 자기 박복한 탓으로, 전생에 무슨 죄가 있는 탓으로 돌리다니. - P162

안된다. 왜 겁을 내! 꿈적꿈적 잘 놀라는 어릴 적 소아병을 이젠 청산해야지. 겁 낼 게 아니라 불같이 노여워하고 무섭게 증오해야 한다. 그래야 나의 주눅 든 피해의식을 극복할 수 있다. - P163

그야말로 실직 칠개월은 수마와 싸운 세월이었다. 몰두할 일이 없어지자 두개골은 텅 비어버리고, 대신 그 텅 빈 공간에 수마가 똬리 틀고 틀어박혀 있었던 것이다. 졸음이 그렇게 고통스러울 줄이야. 아무리 자도 노상 졸립기만 했다. 허구한 날 하품을 벅벅 해대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졸음을 쫓아내려고 벽에다 머리를 짓찧고 손등을 물어뜯기를 얼마나 했던가. 석규 생각엔, 졸음이 머릿속에 똬리 튼 황구렁이로만 여겨지는 게 아니라, 사정없이 덤벼드는 쉬파리떼로 느껴지기도 했다. 몸을 흔들면 잠시 붕 날아올랐다가는 이내 새까맣게 내리덮는 쉬파리떼. 성한 몸뚱어리는 쉬파리떼의 공격을 받아 점점 썩어갔다. 점점 허물어져갔다.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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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전염은 인간의 본성 중에서 상당히 보편적인 측면 하나를 지칭하기 위해 행동과학자들이 만든 말이다. 다른 사람의 기분이 드러나는 신호를 우리가 거울처럼 따라 하는 성향을 바로 감정전염이라고 한다. 따라서 누군가가 우리에게 미소를 지으면 우리도 마주 웃어 보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전반적인 상황과 상대에 대한 우리의 감정이 조금 더 긍정적으로 변한다. 그래서 웃음은 웃음을 불러오는 경향이 있고, 분노는 분노를 부르며, 눈물은 눈물을 부른다. 진화의 관점에서 감정전염은 중요한 특성이다. 엄마가 아이를 아주 효과적으로 달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야생에서 갑자기 친구 또는 적과 마주쳤을 때 곧바로 반응을 조정할 수 있는 것도 감정전염 때문이다. - P103

크리스마스 아침에 기쁨과 실망은 종이 한 장 차이거든요.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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