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렇게 큰 깃발이 무게도 적지 않을 텐데, 저리도 끊임없이 펄럭이지?

바람이 부니까 그렇지. 인연이란 게 바로 그런 거야.

하지만 바람은 본래 무정한 것인데, 왜 괜히 저 깃발을 저렇게 흔들어 댈까? 말해봐, 어디?

바람은 형체가 없는 것. 흔들리는 건 깃발일 뿐.

깃발도 무정한 것 아닌가. 근데 왜 흔들리지?
바람이나 깃발이나 다 무정한 것이나 인연이 닿아 그런 것이지.

인연은 정이 있고, 정이 있어 움직이지만, 바람과 깃발은 모두 무정한 것인데 어째 움직일까? - P204

옷만 지니고 법을 얻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난 본래 빈 손으로 왔어. 그 가사도 몸 밖의 물건이니, 시비만 일으킬 뿐이지. 의발에 집착하는 것은 우리 선종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야. 내가 떠난 후 사악한 법들이 시끄러이 굴 것이지만, 자연 누군가가 나와서 비난에도 아랑곳 않고 목숨도 아끼지 않고 내 뜻을 세우고 내 법을 밝힐 것이야. - P230

지금 대사님이 계시니 법통이 있으나, 대사님이 돌아가시면 뒷사람들은 어찌 부처님을 뵈오리까?

뒷사람 일은 뒷사람 일이고, 너희들 눈앞의 일이나 잘 보살피라! 내 할 말은 다 하였다. 더 할 말은 없으나 한 마디만 남기겠으니 잘 들어라. 자신에게서 참을 구하지 않고 밖에서 부처를 찾고 있으나, 다니며 찾는 것은 다 큰 바보로다. 다들 이 말을 잘 새겨 조심하라! (단정히 앉아 눈을 감는다) - P230

(노래한다)
붓을 쥔 자는 문필을 희롱하고
도살하는 자는 칼을 휘두르고,
일 없는 사람은 차나 마셔,
병이 있어야 약을 먹지.

(앞으로 나온다. 노래한다)
떡 만드는 자는 밀가루 치대고,
똥 푸는 자는 서둘러 퍼야지. - P246

(노래한다)
오늘 밤 그리고 내일 아침,
그렇게 그렇게 그렇게,
오늘 밤 그리고 내일 아침,
그렇게 아름답다
여전히 그렇게 아름답다! - P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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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내가, 내가 먼저!
내가 하고 나서 네가 해. 나부터 하자니까!
네가 안 하니까 내가 한 거잖아. 내가 말하려니까 네가 또 하겠다고!
네가 안 하기에 내가 한 건데, 아직 안하고 있잖아?
네가 안 하기에 내가 한 건데, 내가 하니까 따라서 하다니!
내가 말하니까 따라 하고서. 나 하고나서 해! - P109

어떻게 감히 남편을 무고하겠습니까? 단지 억울함을 품은 귀신이 되기는 싫습니다. 남편 된 사람은 자기 아내를 희롱해서는 안 되지요. 아내 된 사람도 남자를 함부로 믿어서는 안 되지요. 여잔 절대 사랑에 빠져선 안 되지요. 여자는 사랑에 빠졌다해도 절대 자기 생명을 가벼이 버려선 안 되지요— - P113

(노래한다) 사람이여 사람, 사람이여 사람.
이 사건은 완전히 그 스스로 벌인 거라네.
귀신이 되어서야 세상 욕정을 벗어날 수 있지.
사람으로는 그저 번뇌만 만들어 낼 뿐. - P116

그녀는 그가 할 말이 없으리란 걸 알고 있대. 그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미 다 말해 버렸거든, 그 번드르르한 말들, 마음을 혹하게 하는 그럴 듯한 말들, 그 많은 정겨운 말들, 그 많은 달콤한 말들을 그는 누구에게든지, 어떤 여인에게든지 또다시 다 할 수가 있거든. 단지 그녀에게만 멍청한 척하며, 침묵으로 감싸 버리지----. - P135

아냐. 가만있는 게 낫지. 그녀는 그가 또 똑같은 얘길 되풀이할 거란 걸 알고 있대. 이제 아주 질려 버려서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는 거지. 그리고 더 이상은 그가 목구멍에서부터 끌어내서 그럴듯하게 뱉어내는 그 위선의 소리와 억지웃음을 듣고 싶지 않고. 그는 웃음소리에서도 좋지 않은 뜻을 품고 있다는 게 드러나거든. 얼음처럼 차가움에 덧입혀진 위선적인 은근함이란! 그 예의 바르고 교양 있는 모습도 몽땅 거짓이지, 거짓. 전부 다 상황에 맞춰 연극을 하는 거라고. 지금은 연극도 끝이 났고, 그의 모든 것은 다 계획된 것이었어. 시작만 되면, 결말이 어떻게 될지는 뻔해. - P135

그녀는 자기는 소유하려면 완전히 소유해야만 한대, 사랑하려면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조금의 허위도 용납하지 않는다나? 그렇지 않으면 아예 아무 것도 없느니만 못 하다는 거지. 그녀가 그를 갖는다고 할 때는 그녀가 그와 함께 느낀 모든 감정을 갖는다는 것이고, 어둠이나 어둠 속의 모든 움직임과 소리까지도 말야. 그러나 그녀는 이미 이 남자를 완전히 가질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지. 이런 어둠 속에, 음 음 하는 소리, 질식할 듯한 고통과 환희를 감추면서 그는 그녀와 그리고 또 다른 여인과 똑같이 이런 느낌들을 나누었으니까. 그녀가 유일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그와 인연을 끊는 것이 낫다는 거지. - P137

(귀가울여 듣는다) 다시는 전화벨이 울리지 않겠지? 그 인적도 끊긴 고요한 밤, 그녀 심장이 쿵쾅거리게 하면서도 그치지 않는, 받고 싶어도 감히 받지 못하지만, 안 받으려니 차마 견딜 수 없는 그 벨소리.
(탄식한다) 그 많은 조잘거림과 정적마저도 다시는 없을 거야. 차라리 졸려서 더 이상 못 견딜지언정 누구도 전활 끊으려 하지 않았지.
지금 그녀는 외부와의 연락을 끊어버렸고, 그녀와 사랑을 나눴던,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그녀를 사랑하지만 그녀는 사랑하지 않는 애인과 친구 그리고 원수들과의 연락을 이미 다 끊어 버렸지. 그녀도 더는 이 방에서 걸어 나가서 되는 대로 술집 하나 찾아 들어가 적당히 남자를 사귈 용기가 나지 않아. 아침에 술이 깨면, 온통 털북숭이인 벌거벗은 남자, 이름조차 잊어버린 낯선 남자 옆에 누워서, 공허함과 혐오감만이 남아 있겠지. 그럴 땐 바닥에서 자기 옷 줍기도 바쁘게 도망해 버릴 걸. 그녀도 그런 용기는 더 이상 낼 수 없어. 그녀는 마음이 다 사그라 들어서 이젠 욕망도 느끼지 않아. - P142

한쪽 팔이 숄 사이로 드러나는데, 손바닥은 회백색이고 가느다란 손가락의 손톱마다 조개 껍질 같이 투명한 칠이 되어 있다.

(숨을 몰아쉬며) 아니야··· (공포를 느끼기 시작하며) 그녀는 이 공포마저도 진실인지 아닌지 알고 싶어하지. 아니면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이 사실은 진정한 공포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녀는 분명 죽음을 경험해 보아야해. 먼저 죽음이 뭔지, 죽음의 고통, 멀쩡하게 살아있는 채로 죽어 가는 경험을 하고 난 후라야 비로소 그녀가 아직 살아 있다는 걸 증명할 수 있을 거고, 비로소 그녀가 다시 살만한 가치가 있는지, 그럴 필요가 있는지를 알게 될 거야. 그녀는 너무 고통스러워서 스스로를 진작시킬 수가 없어. 끊임없이 자신을 파괴하면서, 또 죽자고 진정한 자아를 찾고자 애를 쓰지. 도대체 정말 실재하는 여인일까? 아니면 그저 껍데기만 있고 사실 그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닐까? - P145

그녀는 자신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몰라. 그녀도 이야기를 꾸며내기 시작했나 보지? 그녀가 경험하지도 않은 어릴 적 이야기를, 또 무언가를 꾸며대고 싶어서 그러는 거지. 뭔가 아름다운 것을 꾸며내는, 뭔가 아름다운 걸······꾸며내는······, 그녀는 그녀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완전히 오해 때문이라고 하지만, 생활이 바로 연이은 오해 아닐까? - P151

예전엔 비바람이 지나고 복사꽃이 떨어질 때나 창밖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나뭇가지만 바라보아도, 그녀는 주루룩 눈물을 떨어뜨리곤 했는데. 물론 복사꽃을 슬퍼한 건 아니었고, 또 무엇 때문에 우는 건지 딱 잘라 말할 수 없었지만 말야. 지금 얘기가 아니고, 그때 세상사라고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냥 그렇게 고통스럽게 살아가던 한 계집애 얘기지. 사실은 다 자기 스스로 벌린 일이었지. 자신은 물론 사람들에게 번거로운 일들을 만들어댔지. 그녀는 그녀뿐 아니라 여자아이들은 대개 다 그랬다나. 늘상 자기네들과 남자들 사이의 그런 형편없는 이야기로 그녀를 꽤나 번민하게 만들었으니까. - P156

그녀는 자신이 언 강 위를 미끄러져 가는데 멈출 수가 없었대. 눈앞은 칠흑 같은 어둠인데, 그저 깨어진 얼음 사이로 떨어져 아득히 검은 죽음의 물 속으로 빠질 순간을 기다리면서. 앞으로의 모든 것이 다 눈꽃처럼, 물만 만나면 그냥 녹아서 사라져 버리는, 그녀는 이 넓은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도 아니고, 중요한 존재도 아니잖아, 사라지면 그냥 사라지는 거고, 잊혀져 버리고, 무시되어 버리고, 한번 생을 마치면 그걸로 그만인 거지······ 헌데 그녀는 끝내 그런 원한과 질투, 탐욕과 번뇌 그리고 초조를 떨치지 못한 거야. 그녀도 부처님이 모든 게 밀 공(空)이라고 한 걸 모르지는 않지만, 그러나 이 세상의 허영을 떨치지 못한 거지. 그래서 그녀는 묵묵히 기도했지. 대자 대비한 부처님의 보살핌으로 이 세속의 인연을 떼어버릴 수 있도록 해달라고 빌었어. - P161

(무릎을 꿇고) 그녀는 자신의 피로 더러워진 오징육부를 깨끗이 씻어내야만 한대.
(앞으로 기울여 유심히 본다) 어떻게 그걸 깨끗이 씻을 수가 있겠어? 그건 본래 그렇게 피로 뒤범벅되어 있는 걸!
(한 발 다가가, 유심히 듣는다) 그녀는 씻겨지든 안 씻겨지든 간에 씻어야 한대.
(다가가) 아무리 씻어도 깨끗이 씻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 무엇 때문에 고집을 피고 그렇게 씻고 있지? - P164

(바닥에 벌렁 누워 천천히 중얼거린다) 그녀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도, 아니면 아무 말도 안 했는지도 모른대. 말했지만 아무 쓸데가 없어서 아무 말도 안한 거만 못한 지도 모르지.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해야 할 말을 하지 않은 건 아닌지, 또는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있는지도 몰라. - P166

(아연하여) 그녀는 뭐 사상이란 것도 없어. 일찍이 그녀를 하염없이 번민케 하고 고민케 하면서도 답을 얻지 못하던 온갖 생각들, 갖가지 인과 관계들, 끝없는 분석, 무수한 가설 위에 세워 놓은 전제로부터 도출된 온갖 가능성과 결론, 그리고 그 자체 반드시 믿을 만하지도 않은 결론, 그녀는 할 말도 없어. 살아 움직이고 끊이지 않고 정의도 있고 관계도 있고 내용도 있는 함의의 무의미함. 그녀는 감각도 없어. 추운지 더운지도 모르고 중요한지 아닌지도 모르고 형태가 있건 없건, 소리가 있건 없건 감정이 있건 없건 다 사라져 버렸으니까. 혼돈 속에서 그저 마음 속에 한 줄기 어스름한 빛만이 밝은 듯 어두운 듯, 이것조차 믿을 수 없이 완전히 소멸한다면······ - P169

아래채서 방아 찧는 이가 뉘인고?

젊은 행자입니다. 속성은 노씨이고 이름이 혜능이지요. 그게 법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 계율을 받지 않았어요. 온지도 한 여덟 달 남짓 됩니다. 막 왔을 때 데리고 가서 봐온 적이 있는 데요.

그래 기억나는군. 영남에서 왔다던 말썽꾸러기. 입만 벌리면 다른 건 다 제쳐놓고 부처되기만 소원이라던 녀석이지.

입심 한 번 좋지요. 완전히 산중 촌놈인데, 대사님께 기어 오를 만큼 담이 크지요.

(웃으며) 곧은 말을 하는 건 마음이 맑아서니, 나무랄 필요 없다. - P183

(앞으로 세 걸음 나아와 예를 올린다) 노스님께 가르침을 청합니다.

너는 밖에서 왔으니 문 밖에 무엇이 있더냐?

온갖 세상에 일월과 산천, 뜬 구름과 흐르는 물, 그리고 바람과 비가 있습니다. 세상에 수레와 말들, 고관과 병졸들, 오는 이는 오고 가는 이들은 가지요. 또 상인들이 서로 다투어 물건을 팔고 벙어리는 꿀 먹은 모습이지요. 어리석은 남녀들이 뒤엉켜 있습니다. 지금은 밤이 깊어 고요하니 오직 막 태어난 간난 아기만이 울고 있습니다.

문 안에는 무엇이 있더냐?

스님과 제가 있습니다.

(웃는다) 나라는 건 무엇이냐?

마음속의 생각입니다.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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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요. 노끈 이 쪽을 좀 잡아 주세요. 그럼 우리 사이가 이어졌죠. 이 전엔 난 나고 당신은 당신이었는데, 이 노끈으로 우린 연결되어서 ‘나와 당신‘이 된 거죠.
지금 당신과 내가 각기 반대편으로 뛰어가면 당신은 날 끌어당기게 되고 난 또 당신을! 한 줄에 매인 메뚜기처럼, 아무도 도망갈 수가 없어요. 또는 마치 부부처럼. (잠시 멈춘다) 하지만, 이 비유는 별로 좋지 않군. - P11

노끈 한쪽 끝을 다 내게 줘 봐요. 한쪽 끝은 당신들이 잡고 있고, 그럼 난 여러분들과 각기 다른 관계를 갖게 되죠. 느슨한 관계, 팽팽한 관계, 먼 관계, 가까운 관계, 그리고 여러분도 각기 내게 영향을 주겠지. 우린 각자 이 복잡다단한 세상에서 서로를 당기고 있는 셈이지. (멈춘다) 마치 거미줄에 걸린 파리처럼. (멈춘다) 또 거미처럼. (멈춘다) - P12

이 노끈이 마치 우리 손 같아. (그가 손을 놓자 상대방도 손을 놓고, 노끈은 바닥에 떨어진다) 길게 빼고 있는 더듬이 같기도 하고. (그가 손을 놓자 상대방도 손을 놓는다) 또 우리의 언어 같기도 해. 안녕, 또는 안녕하세요 처럼. (또 한 노끈이 바닥에 떨어진다) 또 마치 우리의 눈길 같아. (또 노끈 하나를 대신 한다) 우리 생각까지 포함해서 (상대방을 등지고 서나 둘은 서로 교통하는 바가 있다) 당신이 그녀를 그리워하거나 아니면 그녀가 다른 사람을 그리워하겠지. (그녀와 어깨를 스치며 지나친다. 그녀는 또 다른 사람과 마주보고 있다) 그 노끈 하나 하나가 무리들을 당기고 있지. - P13

(자기 얼굴에 종이를 붙이며)
이건 아주 공평해.
그래. 물론이야.
지면 벌을 달게 받아야지.
다들 벌로 종이 한 장씩 붙였어.
종이 안 붙인 사람이 도리어 이상한데? 겁나는 걸. - P32

다들 말하는 거 들었지? 그런데 왜 넌 스페이드가 아니라고 고집하는 거지? 겁이 나나? 너 쥐새끼 먹어봤어? 팔딱팔딱 뛰고 입안에서도 여전히 찍찍 울어대고, 긴 털도 없고 눈도 안 뜬, 마취시켜서 실험용으로 쓰는 쥐새끼 말이야?
먹어봤다면 감히 진실을 말하게 되지. 친구.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지. 말해봐. 스페이드야 아니야?

내 생각엔 그래도 허탕인 것 같아.

정말 재미없는 작자야. 다들 김빠지게 하잖아. 이런 자는 정말 싫어. 안 그래?

(술병을 돌려 사람마다 한 모금씩 마시며 한마디씩 한다) 싫어.
싫다고, 싫어. 싫어. 싫다니까. 싫다고. 싫어. 싫어. 싫다고······

(술병을 가져간다) 이렇게 보기 싫은 자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둘러싸며) 쫓아버려!
꺼지라고 해!
모두를 불안하게 한다니까.
정말 지겨워.
왜 우리들 술도 못 마시게 만들지?
혼을 내 줘! - P35

이 사람이 손해 보는 건 너무 우직해서지. 그래야 한다는 게 뭔가?
그런 것과 그렇지 않은 것뿐이지 꼭 그래야 한다는 게 어쨌다는 거야?

그럼 왜 그래야 한다는 게 있어선 안 되지?

(화가 나서) 뭐가 꼭 그래야 한다는 거야?
그래야만 하는 거야? 그래서는 안 되는 거야?

(곧장 사람을 떼어내서) 그래야 한다는 말을 하지 마!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지! - P36

너 거짓말할 줄 모르냐?

어머닌 거짓말 못하게 하세요.

넌 아직 어린애로구나. 어른치고 거짓말 못하는 사람 없지.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즐거운 나날을 보낼 수가 없거든. - P41

나랑 말하는 사람은 누구지?

네 그림자. 네가 낸 소리의 사상----

넌 죽어라 날 따라 다녀----

네가 네 자신을 읽어 버렸을 때----

날 일깨워주려고? 날 더 고통스럽게 해----

넌 그렇게 지쳐 빠져서까지 찾는 게 뭐야?

날 정신이 나게 하는군! 난 정말 잃어버렸어. 근데 어디서 찾아야할지 모르겠단 말야.

(아픈 곳을 찌른다) 찾으려는 게 무언지도 모를 걸?

그런 것 같아······ 다들 찾고 있지 않아? - P46

(또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당신도 꿈을 찾고 있소?

아니, 난 말 한 구절을 찾고 있어.

시를 짓고 있소?

누구나 시를 지을 수 있어. 누구나 사랑을 할 수 있는 거나 마찬가지지.

그럼 당신은----

생각! 누구나 머리는 있지만, 누구나 다 생각이 있는 건 아니거든.

맞아. 당신이 찾고 있는 구절은 분명 멋진 경구겠군요.

그게 꼭 굉장한 경구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문제는 그 구절을 못 찾겠다는 거지. 내 생각의 맥이 끊겨버렸어. 끊겨 버린 생각은 줄이 끊긴 연처럼 다시 되돌릴 수가 없지. 그 구절을 찾지 못하면 생각도 찾을 수가 없어. 생각은 하나 하나 꿰어 있는 쇠사슬 같죠. 이해하겠소? - P48

사람들은 다 여기서 찾는데 저쪽 가서 뭘 하게요?

여긴 내가 찾는 게 없어서요.

뭘 찾는데요?

(괴로워하며) 뭘 찾는지 나도 몰라요.

다들 봐요. 이 사람은 참 이상해. 뭘 찾는지 모른대요!

다시 한 사람 그는 이미 뭔가를 찾은 게 분명해. (사람들이 금방 그를 둘러싼다)

아뇨. 정말 아니에요. (비켜난다)

(사람들 가운데서 나와) 어디로 가려고?

지나가려고.

아무 것도 못 찾았잖아? 근데 왜 그냥 지나가고?

난 안 찾을 거야. 난 저리로 가겠어.

우린 다 아직 여기서 찾고 있는데 너만 저쪽으로 가겠다고?

가게 할 거야?

안 돼! - P49

찾고 싶지 않다! 좋아. 그래. 찾고 싶지 않으면 억지로 찾으랄 수는 없지. 당신이 찾고 싶지 않아도 모두가 찾지 않을 수는 없지. 다들 찾는데, 당신만 찾지 않을 수 없어. 다들 찾지 않으면 너도 물론 찾지 않아도 돼. 다들 찾으려는데 넌 찾지 않고, 다들 모두를 찾는데, 넌 모두를 찾지 않고, 다들 찾도록 찾지 않고, 넌 찾든 아니든 넌 찾지 않아도 다들 찾아, 넌 찾든 안 찾든 다들 찾지 않아---- 너도 찾고 다들 찾고---- - P50

넌 이곳의 규칙을 알고나 있는 거야? 계속 알려줬잖아. 넌 어쩌자고 아직도 고치질 않지?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된 거야?
뻣뻣해! 손 좀 봐야겠어!

잠깐. 그건 안 돼. 야만적이야. 아직도 돌아서지 않겠다면, 억지로 그럴 것도 없어. 그럼 이 사이로 지나가라 하지. (바지 가랑이를 가리킨다) 어때?

(와---- 하고 웃는다) 좋아! - P51

사실 이건 너의 자아연민일 뿐이야. 넌 이렇게 끝내버리고 싶지 않겠지. 이 허영 덩어리야. (퇴장해 버린다) - P55

(가볍게 노래한다) 그가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아내를 놀려
아내를 놀려
아내를 놀려
자기 아내를
자기 아내를
자기 아내를 - P82

그럼 들어보시오! 마디마다 정이요, 열 손가락마다 마음이지요. 이 세상 남녀 간에 뜻을 전하고, 온갖 매력을 드러내는 거야 다 손에 달려 있지요. (독백으로) 장주야, 장주, 넌 남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 위로 하늘의 모습을 알고 아래로 유명한 세계를 알며, 깊고도 오묘한 것을 모르는 게 없다지만, 여인의 손에도 이렇게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는 것, 그리고 네 아내의 손이 이렇게 곱다는 건 더더욱 몰랐구나! (참지 못하고, 아내의 손을 당긴다) - P86

(독백으로) 이 여자 제멋대로군, 대단한 바람둥이야! 장주야, 너 오늘 한번 일 치지 않으면 부부로 산 게 억울하겠다! (방백으로) 그 장주가 범속한 세상을 초월한 듯만 여기더니, 어디 이 더러운 가죽을 벗어날 수 있더냐? - P88

(연거퍼 손을 비비며, 독백으로) 너 장주야, 장난아 연극을 하든, 정말 아낼 시험하든 여기까지 왔으니, 안하면 안했지 그만두진 못하리라. 어디 체면 볼 경황이 있느냐! (방백으로) 지금은 내가 장주이든 아니면 바람둥이 귀공자가 희롱을 하는 것이든, 또 희롱하는 게 자기 아내이든, 남의 집 바람둥이 여인이든 가릴 것 없다. 무조건 하는 거야! - P89

판관 나리······ 제발······ 나리, 저희를 굽어 살피사······
하늘같은 나리······ 저희는 떠돌 만큼 떠돌았어요······ 떠돌 만큼······
제발······ 나리······ 저희를 살피시어······
하늘같은 나리······ 저희를 살피시어······저흰 떠돌 만큼 떠돌았어요······
저희······ 떠돌이귀신들은······ 떠돌 만큼 다녔어요······
낮도 없이······ 밤도 없이······ 떠돌았어요······
낮도 없고······ 밤도 없이······ 이젠 처분을 내려주세요······
해도 없고 달도 없이······ 선 것도 선 게 아니고······ 앉은 것도 앉은 게 아닌 채로······
이제 판결을 내려주세요······해도 달도 없이······ 어떤 판결보다도 견디기 어려워요······
선 것도 선 게 아니고······ 앉은 것도 앉은 게 아니고······ 해도 달도 없이······
해도 달도 없이······ 이제 죄를 정해주세요······ 갈 곳으로 보내주세요······
어떤 형벌보다도 괴로워요······ 선 것도 선 게 아니고······ 앉은 것도 앉은 게 아니고······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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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추워졌다. 복지원 안의 아스팔트길들은 질척한 눈으로 덮여 있다. 하늘은 유황으로 가득하고, 얼음처럼 찬바람은 가로수길의 백양나무에 게으르게 매달린 마지막 잎사귀들을 채간다. 가로수 길은 정해진 도로 규율의 본질로서 전혀 구부러짐 없이 복지원 구내를 가로질러 간다. 소녀에게 이것은 황금시대의 시작이다. - P86

소녀는 동급생들에 대한 말 없는 헌신을 무척 만족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동급생들이 서로 싸울 때 자신의 의견은 아랑곳없이 자기를 그들의 목적에 이용할 줄 아는 아이들을 믿고 편든다. 그리고 양쪽 편 다 소녀를 이용할 줄 아는 경우에는 동시에 두 편을 다 든다. 단순히 남들이 자기한테 털어놓은 일만 간직하면 되고, 또는 외울 것만 말하면 되기 때문에 그런 일이 충분히 가능하다. 따라서 학급 안의 투쟁에서 소녀가 차지하는 위치는 언제나 명예로운 위치는 아니다. 본래 한 인간의 위치라고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 자체가 제로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굽기 전의 생선처럼 속을 완전히 비워야만 다른 사람의 못된 행동, 또는 행운이나 불행을 완전히 신용있게 간직할 충분한 공간이 남는 것이다. - P90

이제 소녀가 대체로 말이 없어진 이후. 그리고 소녀의 정신적인 중립을 완전히 신뢰할 수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 이후에는 생리적인 중립도 분명하게 나타났고, 흔들리고 때로는 넘어지기도 하면서 동시에 폐쇄적인 한 덩어리 살이 한 공간 안에서 야기하는 도발, 그런 도발은 지양된 것처럼 보인다. 이 육체는 아무런 도발도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다. 그리고 그 몸은 속으로부터 전혀 저항을 하지 않기 때문에 세게 잡아보는 것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 몸을 향한, 구역질 섞인 모든 욕망은 늪 같은 그 몸 안에서 가라앉는다. 그런 욕망은 그냥 삼켜지고, 가라앉고, 질식한다. - P94

소녀는 과거에 있었던 것에 대한 기억과 있어야 할 것에 대한 기억을 다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자기가 마치 꽁꽁 묶인 사람, 불 속에서처럼 시간 속에서 꽁꽁 묶여 이제는 아동 복지원에 한 개의 덩어리가 되어버린 사람처럼 느낀다. - P97

소녀는 자주 약속을 지키러 왔다. 그리고는, 예정되어 있듯이, 텔레비전 방에 놓여 있는, 천이 다 닳아버린 긴 의자에서 다른 아이들 틈에 끼어 앉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약속 장소에 와보면 거기엔 아무도 없고 소녀 혼자만 있는 경우도 많았다. 소녀만 모르는 사이에 약속이 취소된 것이다.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야 소녀는 이런 약속들이 가벼운 물질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약속은 실행되기도 하고, 실행되지 않기도 하며, 내일이나 모레 실행되기도 하는데, 약속 취소는 가벼운 깃털처럼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것이다. 오직 소녀의 동경이 시멘트처럼 굳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미리 가진 기쁨의 비중이 너무 컸기 때문에 소녀만이 가벼운, 어린아이다운 무심에 대해서 오랫동안 귀가 먹은 것이다.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소녀는 그것을 모욕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이해했다. 그리고 여기서는 사건들이 유실되지 않는다는 것, 어린 시절은 넓은 시간의 바다 위에서 떠돌고 있다는 것을 또한 이해했다. - P99

토요일 오후 방 친구들이 한마디 작별 인사도 없이, 마치 소녀가 자기들한테는 전혀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이, 방을 떠날 때도 그것은 소녀를 그들과 똑같은 존재로서 가장 진실하게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들이 돌아왔을 때 소녀를 다시 보게 되리라고 확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소녀가 장롱이나 침대처럼 아주 당연하게 가구 목록에 속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이 아침에 한마디 인사도 없이 하루를 시작할 때 그것은 서로 혼동할 만큼 아직 많은 날들이 자기들 앞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들이 아침에 만나는 얼굴들은 오래오래 똑같은 얼굴일 것이기 때문에 법석을 떨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얼굴들 가운데 소녀의 얼굴도 있다. - P100

잠을 깨우는 시간이면 밖은 아직도 어둡다. 당직 사감이 문을 두드린다. […] 그들의 눈은 아직 감겨 있다. 그들의 꿈속으로 규칙이 밀고 들어온다. 꿈을 꾸고 난 뒤에 드는 첫 생각은 피할 수 없이 학교에서 볼 시험에 대한 생각이다. 매일 시험이 있다. 겨울에는 무슨 시험이든지 안 보는 날이 없다. 침대 밖으로 한 발짝이라도 내딛자마자 시험의 아가리로 들어가게 된다. 이 요정들은 마음속에 거부감이 가득 차 있으면서도 몸을 일으켜 맨발을 학교 실내화에 꿰고 방을 빠져나간다. 아이들은 복도를 지나 세면실로 가서 하얀 이빨을 닦는다. 소녀는 이 아이들의 너무나 당연한 반감이 부럽다. 그 분명한 전선, 너무나 완전한 그들의 나쁜 기분, 아무도 나무랄 수 없는 반항에 대한 이 아이들의 권리가. - P112

방과 후, 정확하게 위치가 정해진 숨을 내쉰 이후 소녀는 대개 잠이 든다. 왜냐하면 방과 후 시간의 얼굴, 그 자유시간의 얼굴에 대해서는 한번도 완전한 확실성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녀는 그 얼굴을 부활시키기 위해 자기가 행복해야 할지, 힘들어 해야 할지, 아니면 무관심해야 할지, 또는 몹시 구역질을 느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이 시간은 수많은 얼굴들을 가졌고, 일체의 계획을 벗어나 있었다. 날씨라든가, 숙제, 또는 예정된 오락에 의존하고 있던 그 시간은 대부분 커다란 비밀로 남아 있었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전혀 알 수 없었다. […] 소녀는 창 밖을 내다보지 않는다. 창 앞에는 나무들이 점점 초록색을 띠어가고 있다. 소녀의 머릿속에서는 끊임없이 눈이 내린다. - P132

무릇 인식이란 점점 가속도가 붙게 마련이고, 또 모든 이해는 눈사태처럼 진행되듯이, 처음에는 도대체 아무 일도 진행되지 않다가 어느 시점부터인지 그리고 어떤 이유에선지 모르게 시작되고, 마침내 불가능한 일도 가능하다고 받아들일 용기가 일단 생기면 어느 누구도,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힘이 되듯이, 소녀가 정말 누구인가 하는 것에 대한 인식의 과정도 그렇게 진행되었다.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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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전쟁 동안 쉽지 않은 일들을 겪었지만 삶을 사랑했어. 아마 전쟁을 겪으면서 전보다 더 삶을 사랑하게 되었을 거야. 죽은 사람을 많이 본 어머니는 그만큼 더 삶에 밀착하게 된 거야. 그리고 나는 아버지에 관해서 언젠가부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어. 아버지는 비록 살아나기는 했지만 전쟁을 겪으면서 죽은 사람들 쪽에 속하게 된 거라고. 죽음에 엄습당한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살갗을 갖게 된 거야. 다른 사람들의 살갗은 살아있는 것을 두르고 있지만, 아버지의 경우 살갗은 살아있는 것들을 막아내는 역할을 했어. 어머니가 손을 잡으려 하면 아버지가 늘 움찔하며 손을 치웠던 것이 기억나. 아버지는 언제까지고 후퇴만 거듭하고 있었어. 그게 아버지의 지병이었던 것 같아.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도 아버지는 어머니가 손을 잡으려 하면 손을 치웠어." - P127

아버지와 나는 복도의 십자가상 아래 앉아 있다. 우리 주위에는 옷장에서 꺼낸 온갖 물건이 늘어져 있다. 우리는 옷가지와 상자, 서류철, 책, 꽃병, 낡은 그릇들 사이에 앉아 있다.
우리는 넘겨보고 열어보고 밀쳐놓고 집어보고 펼쳐보고 밀쳐놓고 보여주고 구겨버리고 찢어버리고 밀쳐놓는다. 모든 것이 먼지투성이다. 할머니가 사진을 묶었던 고무 밴드는 이제 바싹 말라버려 사진들을 빼내려고 하면 툭 끊어진다. 종이상자들은 무게 때문에 찌그러졌다. 조그만 상자들은 열쇠가 없고 외투에는 좀이 슬었고 트렁크에서는 냄새가 난다.
[…]
우리는 넘겨보고 열어보고 밀쳐놓고 집어보고 펼쳐보고 밀쳐놓고 보여주고 구겨버리고 찢어버리고 밀쳐놓는다. - P128

나는 내 할머니였던 할머 니가 처음에는 남자가, 그 다음에는 동물로, 그 다음에는 기존의 모든 것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을 본다. 나는 할머니가 말하는 것을 듣는다. 할머니의 목소리는 더 이상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원했지만 그건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 존재가 말하는 것을 듣는다. "모든 것이 너무 많았고, 모든 것이 너무 적었다." 내가 알지 못 하는 어떤 존재의 목소리가 말한다. "나는 금양모피를 찾으러 가는 중이야." - P141

내 애인이 나를 깨물며 말한다. "언젠가 너는 더 젊은 남자를 찾게 될 거야." "말도 안 돼요." 내가 말한다. 내 애인이 나를 깨물며 말한다. "너에게서 모든 게 성장하는 걸 보면 정말 멋져." 그가 말한다. "언젠가 너는 더 젊은 남자를 찾게 될 거야" "허튼소리 말아요." 내가 말한다. "난 알아." 그가 말한다. "그건 정상적인 거야. 그리고 나는 삶 안으로 사라질 거야." "삶 안으로 사라진다고요?" 내가 묻는다. "그래." 그가 말한다. "나는 나가버릴 거야. 삶 안으로 말이야. 그리고 사라질 거야." "아름답군요." 내가 말한다. "그렇지 않아. 이건 아주 끔찍한 거야. 하지만 너는 아직 이해하지 못해." 그가 말한다."너는 너무 어려." - P141

내가 엄마와 점점 닮아간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내가 엄마처럼 말한다고 한다. 마치 엄마가 내 몸을 입은 것처럼. 내 살갗을 걸치고 말하는 것처럼. 그러는 동안 나는 어디 있는 것인지 나도 모른다. 나는 엄마처럼 기침하고 엄마처럼 웃는다. 그리고 누군가 내 마음을 다치게 하면 나는 꼭 엄마처럼 무지막지한 말들을 쏟아낸다. 나는 나이를 먹었고, 엄마는 다시 사지를 쭉 뻗고 있을 만한 널찍한 살갗 속에 있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어디 있는 것이지 나도 모른다. - P144

몇 주, 몇 달 동안 나는 누군가 찾아오기를 기다린다. 꼼짝 않고 앉아 있던 나는 바닥에 쓰러진다. 쓰러지는 나에게 솨 하는 소리가 들려 온다. 눈처럼 하얀 그 소리, 과거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그 소리가. 솨 하는 그 소리에 내 두 귀가 아주 밝아진다. 그리고 문득 나는 깨닫는다. 고요가 들어서는 그 한순간을 채우기에는 과거의 모든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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