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추워졌다. 복지원 안의 아스팔트길들은 질척한 눈으로 덮여 있다. 하늘은 유황으로 가득하고, 얼음처럼 찬바람은 가로수길의 백양나무에 게으르게 매달린 마지막 잎사귀들을 채간다. 가로수 길은 정해진 도로 규율의 본질로서 전혀 구부러짐 없이 복지원 구내를 가로질러 간다. 소녀에게 이것은 황금시대의 시작이다. - P86

소녀는 동급생들에 대한 말 없는 헌신을 무척 만족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동급생들이 서로 싸울 때 자신의 의견은 아랑곳없이 자기를 그들의 목적에 이용할 줄 아는 아이들을 믿고 편든다. 그리고 양쪽 편 다 소녀를 이용할 줄 아는 경우에는 동시에 두 편을 다 든다. 단순히 남들이 자기한테 털어놓은 일만 간직하면 되고, 또는 외울 것만 말하면 되기 때문에 그런 일이 충분히 가능하다. 따라서 학급 안의 투쟁에서 소녀가 차지하는 위치는 언제나 명예로운 위치는 아니다. 본래 한 인간의 위치라고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 자체가 제로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굽기 전의 생선처럼 속을 완전히 비워야만 다른 사람의 못된 행동, 또는 행운이나 불행을 완전히 신용있게 간직할 충분한 공간이 남는 것이다. - P90

이제 소녀가 대체로 말이 없어진 이후. 그리고 소녀의 정신적인 중립을 완전히 신뢰할 수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 이후에는 생리적인 중립도 분명하게 나타났고, 흔들리고 때로는 넘어지기도 하면서 동시에 폐쇄적인 한 덩어리 살이 한 공간 안에서 야기하는 도발, 그런 도발은 지양된 것처럼 보인다. 이 육체는 아무런 도발도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다. 그리고 그 몸은 속으로부터 전혀 저항을 하지 않기 때문에 세게 잡아보는 것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 몸을 향한, 구역질 섞인 모든 욕망은 늪 같은 그 몸 안에서 가라앉는다. 그런 욕망은 그냥 삼켜지고, 가라앉고, 질식한다. - P94

소녀는 과거에 있었던 것에 대한 기억과 있어야 할 것에 대한 기억을 다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자기가 마치 꽁꽁 묶인 사람, 불 속에서처럼 시간 속에서 꽁꽁 묶여 이제는 아동 복지원에 한 개의 덩어리가 되어버린 사람처럼 느낀다. - P97

소녀는 자주 약속을 지키러 왔다. 그리고는, 예정되어 있듯이, 텔레비전 방에 놓여 있는, 천이 다 닳아버린 긴 의자에서 다른 아이들 틈에 끼어 앉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약속 장소에 와보면 거기엔 아무도 없고 소녀 혼자만 있는 경우도 많았다. 소녀만 모르는 사이에 약속이 취소된 것이다.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야 소녀는 이런 약속들이 가벼운 물질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약속은 실행되기도 하고, 실행되지 않기도 하며, 내일이나 모레 실행되기도 하는데, 약속 취소는 가벼운 깃털처럼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것이다. 오직 소녀의 동경이 시멘트처럼 굳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미리 가진 기쁨의 비중이 너무 컸기 때문에 소녀만이 가벼운, 어린아이다운 무심에 대해서 오랫동안 귀가 먹은 것이다.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소녀는 그것을 모욕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이해했다. 그리고 여기서는 사건들이 유실되지 않는다는 것, 어린 시절은 넓은 시간의 바다 위에서 떠돌고 있다는 것을 또한 이해했다. - P99

토요일 오후 방 친구들이 한마디 작별 인사도 없이, 마치 소녀가 자기들한테는 전혀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이, 방을 떠날 때도 그것은 소녀를 그들과 똑같은 존재로서 가장 진실하게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들이 돌아왔을 때 소녀를 다시 보게 되리라고 확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소녀가 장롱이나 침대처럼 아주 당연하게 가구 목록에 속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이 아침에 한마디 인사도 없이 하루를 시작할 때 그것은 서로 혼동할 만큼 아직 많은 날들이 자기들 앞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들이 아침에 만나는 얼굴들은 오래오래 똑같은 얼굴일 것이기 때문에 법석을 떨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얼굴들 가운데 소녀의 얼굴도 있다. - P100

잠을 깨우는 시간이면 밖은 아직도 어둡다. 당직 사감이 문을 두드린다. […] 그들의 눈은 아직 감겨 있다. 그들의 꿈속으로 규칙이 밀고 들어온다. 꿈을 꾸고 난 뒤에 드는 첫 생각은 피할 수 없이 학교에서 볼 시험에 대한 생각이다. 매일 시험이 있다. 겨울에는 무슨 시험이든지 안 보는 날이 없다. 침대 밖으로 한 발짝이라도 내딛자마자 시험의 아가리로 들어가게 된다. 이 요정들은 마음속에 거부감이 가득 차 있으면서도 몸을 일으켜 맨발을 학교 실내화에 꿰고 방을 빠져나간다. 아이들은 복도를 지나 세면실로 가서 하얀 이빨을 닦는다. 소녀는 이 아이들의 너무나 당연한 반감이 부럽다. 그 분명한 전선, 너무나 완전한 그들의 나쁜 기분, 아무도 나무랄 수 없는 반항에 대한 이 아이들의 권리가. - P112

방과 후, 정확하게 위치가 정해진 숨을 내쉰 이후 소녀는 대개 잠이 든다. 왜냐하면 방과 후 시간의 얼굴, 그 자유시간의 얼굴에 대해서는 한번도 완전한 확실성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녀는 그 얼굴을 부활시키기 위해 자기가 행복해야 할지, 힘들어 해야 할지, 아니면 무관심해야 할지, 또는 몹시 구역질을 느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이 시간은 수많은 얼굴들을 가졌고, 일체의 계획을 벗어나 있었다. 날씨라든가, 숙제, 또는 예정된 오락에 의존하고 있던 그 시간은 대부분 커다란 비밀로 남아 있었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전혀 알 수 없었다. […] 소녀는 창 밖을 내다보지 않는다. 창 앞에는 나무들이 점점 초록색을 띠어가고 있다. 소녀의 머릿속에서는 끊임없이 눈이 내린다. - P132

무릇 인식이란 점점 가속도가 붙게 마련이고, 또 모든 이해는 눈사태처럼 진행되듯이, 처음에는 도대체 아무 일도 진행되지 않다가 어느 시점부터인지 그리고 어떤 이유에선지 모르게 시작되고, 마침내 불가능한 일도 가능하다고 받아들일 용기가 일단 생기면 어느 누구도,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힘이 되듯이, 소녀가 정말 누구인가 하는 것에 대한 인식의 과정도 그렇게 진행되었다.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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