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전쟁 동안 쉽지 않은 일들을 겪었지만 삶을 사랑했어. 아마 전쟁을 겪으면서 전보다 더 삶을 사랑하게 되었을 거야. 죽은 사람을 많이 본 어머니는 그만큼 더 삶에 밀착하게 된 거야. 그리고 나는 아버지에 관해서 언젠가부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어. 아버지는 비록 살아나기는 했지만 전쟁을 겪으면서 죽은 사람들 쪽에 속하게 된 거라고. 죽음에 엄습당한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살갗을 갖게 된 거야. 다른 사람들의 살갗은 살아있는 것을 두르고 있지만, 아버지의 경우 살갗은 살아있는 것들을 막아내는 역할을 했어. 어머니가 손을 잡으려 하면 아버지가 늘 움찔하며 손을 치웠던 것이 기억나. 아버지는 언제까지고 후퇴만 거듭하고 있었어. 그게 아버지의 지병이었던 것 같아.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도 아버지는 어머니가 손을 잡으려 하면 손을 치웠어." - P127
아버지와 나는 복도의 십자가상 아래 앉아 있다. 우리 주위에는 옷장에서 꺼낸 온갖 물건이 늘어져 있다. 우리는 옷가지와 상자, 서류철, 책, 꽃병, 낡은 그릇들 사이에 앉아 있다. 우리는 넘겨보고 열어보고 밀쳐놓고 집어보고 펼쳐보고 밀쳐놓고 보여주고 구겨버리고 찢어버리고 밀쳐놓는다. 모든 것이 먼지투성이다. 할머니가 사진을 묶었던 고무 밴드는 이제 바싹 말라버려 사진들을 빼내려고 하면 툭 끊어진다. 종이상자들은 무게 때문에 찌그러졌다. 조그만 상자들은 열쇠가 없고 외투에는 좀이 슬었고 트렁크에서는 냄새가 난다. […] 우리는 넘겨보고 열어보고 밀쳐놓고 집어보고 펼쳐보고 밀쳐놓고 보여주고 구겨버리고 찢어버리고 밀쳐놓는다. - P128
나는 내 할머니였던 할머 니가 처음에는 남자가, 그 다음에는 동물로, 그 다음에는 기존의 모든 것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을 본다. 나는 할머니가 말하는 것을 듣는다. 할머니의 목소리는 더 이상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원했지만 그건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 존재가 말하는 것을 듣는다. "모든 것이 너무 많았고, 모든 것이 너무 적었다." 내가 알지 못 하는 어떤 존재의 목소리가 말한다. "나는 금양모피를 찾으러 가는 중이야." - P141
내 애인이 나를 깨물며 말한다. "언젠가 너는 더 젊은 남자를 찾게 될 거야." "말도 안 돼요." 내가 말한다. 내 애인이 나를 깨물며 말한다. "너에게서 모든 게 성장하는 걸 보면 정말 멋져." 그가 말한다. "언젠가 너는 더 젊은 남자를 찾게 될 거야" "허튼소리 말아요." 내가 말한다. "난 알아." 그가 말한다. "그건 정상적인 거야. 그리고 나는 삶 안으로 사라질 거야." "삶 안으로 사라진다고요?" 내가 묻는다. "그래." 그가 말한다. "나는 나가버릴 거야. 삶 안으로 말이야. 그리고 사라질 거야." "아름답군요." 내가 말한다. "그렇지 않아. 이건 아주 끔찍한 거야. 하지만 너는 아직 이해하지 못해." 그가 말한다."너는 너무 어려." - P141
내가 엄마와 점점 닮아간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내가 엄마처럼 말한다고 한다. 마치 엄마가 내 몸을 입은 것처럼. 내 살갗을 걸치고 말하는 것처럼. 그러는 동안 나는 어디 있는 것인지 나도 모른다. 나는 엄마처럼 기침하고 엄마처럼 웃는다. 그리고 누군가 내 마음을 다치게 하면 나는 꼭 엄마처럼 무지막지한 말들을 쏟아낸다. 나는 나이를 먹었고, 엄마는 다시 사지를 쭉 뻗고 있을 만한 널찍한 살갗 속에 있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어디 있는 것이지 나도 모른다. - P144
몇 주, 몇 달 동안 나는 누군가 찾아오기를 기다린다. 꼼짝 않고 앉아 있던 나는 바닥에 쓰러진다. 쓰러지는 나에게 솨 하는 소리가 들려 온다. 눈처럼 하얀 그 소리, 과거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그 소리가. 솨 하는 그 소리에 내 두 귀가 아주 밝아진다. 그리고 문득 나는 깨닫는다. 고요가 들어서는 그 한순간을 채우기에는 과거의 모든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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