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게 삶의 웃기는 측면이지. 찰리는 속으로 생각했다. 성인들이 사실은 아무도 원하지 않는 일을 꼭 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다는 게. 처음에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 실체를 부여한다. 그렇게 그 생각이 형태와 입체감을 갖추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머뭇거리는 마음을 말로 물리치고, 그 자리에 그 생각을 실천했을 때 생길 것이라고 짐작되는 좋은 점들을 하나씩 차례로 가져다 놓는다. 본능과 혹시나 하는 마음과 상식도 말로 물리친다. 그러다 보면 그들 중 누구도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공통의 목표를 향해 꼼짝없이 움직이게 된다. - P438

"이블린, 목요일에 내가 우연히 자네에게 차를 권했지. 그날 자네는 약속 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는데, 내가 복도에서 마스터키를 가진 버디를 우연히 만났어. 자네와 찰스가 함께 본 그 사진, 그게 또 오직 나만 알아볼 수 있는 장소에서 찍혔네? 그러니 고비마다 운명의 여신이 개입해서 나를 이 일에 점점 더 깊이 밀어 넣었다고 말해도 될 거야. 이 일을 정말로 할 거냐고? 지금까지 내가 해냈던 모든 일만큼 확실히 할 거야."
이렇게 자신의 확신을 표현하는 말에서 포괄적인 견해를 예술적이고 극적으로 표현하는 오랜 습관이 은연중에 드러났다. 그는 자신을 이 위험한 일에 끼어들지 않게 말리려는 이블린의 시도를 가로막기 위해 운명의 여신을 조금 끌어들였다. 그러나 이번 일을 운명으로 표현한 것은 정말로 운명이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운명의 문제였다. 그의 운명. - P448

온갖 종류의 모욕이 쏟아지는 시련이었다. 가장 먼저 가벼운 로맨스를 찍는 감독이 프렌티스와 마주칠 가능성을 피하려고 몸을 살짝 돌렸다. 그다음에는 유성영화가 나온 뒤로 일한 적이 없는 여배우가 프렌티스에게 열성적으로 손을 흔들었다. 그다음에는 익살스러운 코미디를 쓰는 작가가 동료 작가의 옆구리를 찌르더니 뭔가 심술궂은 말을 했고, 두 사람은 왁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막 명성을 얻기 시작한 신인 여배우들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지만 프렌티스에게 거의 눈길을 주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를 보고 그가 중요한 인물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뭐, 그럴 테면 그러라지. 이렇게 자만심이 꺾이고 나면, 자신의 명예를 모욕하는 것과 맞설 각오를 다질 수 있는 법이다! - P451

지난 몇 년 동안 무게와 덩치가 늘어나면서,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자신의 존재감은 줄어들었다고. 몸무게가 1킬로그램씩 늘어날 때마다 그는 조금 덜 눈에 띄게 되었다. 그러다 결국은 친구에게나 낯선 사람에게나 모두 무시 당하는 것이 거의 일상이 되었다.
프렌티스가 처음에는 이런 변화에 눈물을 조금 흘린 것이 사실이다. 한때는 관객의 갈채를 받고, 동료들이 우러러보고, 길에서 낯선 사람에게 이름이 불리는 생활을 했으니, 이렇게 명성이 이지러지는 것을 겪으며 어떻게 상실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오늘, 1939년 3월 19일, 베벌리힐스의 중심부에 있는 아시엔다에서 그는 하찮은 존재가 된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일 것이다. 이 악당의 집에 다시 들어가, 화려한 사람들 사이를 뚫고 한 번 더 나아갈 것이다. - P458

"어쨌든 그 사람은 비밀의 숲 속에 살고 있었어요. 자기 집안, 직업, 연애가 모두 비밀이었죠. 자기 아파트에 대해서도 비밀이 있었고요! 하지만 이 사람들이 무슨 이유로 입을 다물었든, 그건 모두 일종의 거짓말이었어요. 난 이제 그런 건 질렸어요.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아무리 추악해도, 불편해도, 신경에 거슬려도,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듣고 싶어요. 시선을 피하고 싶은 일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세상은 그냥 신기루가 되어버리니까요." - P575

이브는 생각했다. 그래, 산타아나나 사막의 모래가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매진하는 사람의 업적을 반드시 무위로 돌리는 건 아니지. 세상에 정의라는 것이 있다면, 장인들 한 무리가 망치와 붓과 속돌을 들고 나서서 참을성 있게 작업해야만 자부심 높은 자의 궁궐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 P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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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에서는 잘생긴 사람이 버스에서 내리면 약 30킬로미터 이내의 모든 여자들이 손톱을 날카롭게 다듬는다. 그리고 할리우드 업계의 남자들은 예쁜 여자를 만나면 경계해야 마땅하다. 뭔가 일이 진행된 뒤에야 비로소 그 여자가 무엇을 좇는지 알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흉터를 지닌 이블린 로스 같은 여자들이 스크린테스트를 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애당초 이 여자가 여기에는 왜 왔는지. - P379

풀라스키 카운티 법원의 배심원석(따지고 보면 미국의 어느 배심원석이든 상관없다)에는 갖가지 인간의 표본이 앉아 있다. 지식과 경험, 각자의 성격과 편견이 어우러진 조각보와 같다. 이렇게 제각각인 사람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납득시키기 위해 법률가는 논리나 과학뿐만 아니라 심지어 정의에도 의존할 수 없다. 사실 소크라테스도 자신이 무고하다고 아테네의 장로들을 설득하지 못했고, 갈릴레이도 교황을 설득하지 못했으며, 예수그리스도도 예루살렘 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했다. 배심원을 설득하려면, 그들을 반드시 사건의 흐름 속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그들이 단순히 시민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법원으로 불려온 것이 아님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들은 참여하기 위해 소환되었다. 배심원 각자는 재판에서 맡은 역할을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당사자다. 사람들이 가족 모임이나, 친구와의 저녁 식사 자리나 교회 신도석에서 각자 맡은 역할을 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그런 자리에 함께 앉은 이웃들의 약점과 강점이 우리 자신의 것과 불가분의 관계임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알고 있다. - P385

어느 모로 보나 3월 15일은 완벽한 하루가 될 것 같았다. 9시에 이브가 거실 옆 작은 발코니에서 아침 식사를 할 때 기온은 21도. 날은 화창하고 재스민꽃도 활짝 피었다. 10시, 프렌티스가 전화해서 애프터눈티에 초대했다. 11시, 리비가 전화해서 좋은 소식이 있다며 축하하려고 체이슨스에 2인용 테이블을 예약했다고 말했다. 리비와 통화를 마친 직후에는 셀즈닉 인터내셔널 픽처스에 근무하는 마커스 벤튼이라는 사람이 전화해서, 공통의 관심사에 대해 의논하고 싶은데 2시쯤 올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 일을 그는 그렇게 말했다. 공통의 관심사라고. 그런 전화를 받았을 때 대부분의 사람은 그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이냐고 벤튼 씨에게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브는 프렌티스에게 차를 마시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냐고 묻지 않았다. 리비에게 체이슨스에서 축하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고도 묻지 않았다. 따라서 벤튼 씨에게 셀즈닉 인터내셔널에서 의논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고 물을 이유가 없었다. 깜짝 놀랄 기회를 왜 망치겠는가. - P399

얼마든지 계획과 포부의 증거가 될 수 있었다. 아직 실현되지 않은 즐거운 일. ‘하지 말라‘가 아니라 ‘하라‘는 일들의 목록! 목록을 좌우하는 것은 생각이었다. - P403

사람의 성격이 항상 뭘 배우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야. 찰리는 속으로 생각했다. 사람들은 자존심이 너무 강하거나, 고집이 너무 세거나, 수줍음이 너무 많아서 새로운 교훈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한다. 살다 보면 시련이나 고난을 통해 교훈을 얻을 때가 많은데, 그런 교훈을 얻기 위해 치르는 대가를 가볍게 보면 안 된다. 하지만 사람이 살면서 끝내 배우지 못하는 교훈 중 적어도 절반은 마음만 달라 먹으면 쉽사리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통찰력은 나이를 먹으면 자연히 생긴다. 그때는 새로운 교훈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지만, 그 찬란함을 받아들일 시간도 기운도 없다. 따라서 우리는 대부분 스스로 만들어낸 무지 속에서 생을 마감할 운명이다. - P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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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확실하다고 해서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야. 개인의 기억은 통조림에 붙은 라벨 같은 것이니까."
[…]
"아니, 에티켓 이론이야. 통조림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사실 겉에 붙은 라벨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거야. 누군가에 대해 말할 때도 그의 본성이 아니라 드러난 태도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과거는 밀봉된 채 선반 위에 올려놓은 통조림과 같아. 그래서 우리는 라벨만 보며 얘기하는 거지. 하지만 거기 통조림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아무도 몰라."
"열어보면 되지." 그가 말했다.
"열어볼 수 없다니까. 그게 규칙이야. 과거는 통조림 속에 들어 있고, 우리에게는 따개가 없어. 그러니 누구도 과거를 바꿀 수는 없는 거야." - P78

그때 영국 학생들이 뭐라고 말했던 모양인지 갑자기 장피에르가 "아니야, 그렇지 않아"라고 말했어. "아니야, 그렇지 않아. 우리 각자의 인생은 소스 팬 안의 스파게티 면이라는 걸 잊지 말라고. 시간이 흐른다는 건 그 소스 팬을 한번 뒤섞는 것과 같아. 너희 인생의 관점에서 보자면 시간이 인과적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일 거야. 어떻게 뒤엉키든 스파게티 면의 차원에서는 한 가락이니까. 너희는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가는 일이 소스에 버무린 뒤 만들어진 스파게티 면의 형태를 따라 움직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진정한 시간여행은 그게 아니라 소스 팬을 몇 번이고 뒤섞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인데, 일개 스파게티 면의 차원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 그래서 과거로 시간여행을 한다고 해도 너희는 너희의 과거가 누군가의 미래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충격을 받을 거야. 현재를 바꾸기 위해 과거로 간 너희가 맞닥뜨릴 사람이 이미 늙어버린 연인이라면 어떤 기분이겠어? 너희가 태어나기 전의 과거로 거슬러올라가도 너희가 바꿀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면? 그런데 엔지니어로서 내가 장담하는 것이지만, 그건 거의 확실해." 장피에르가 그렇게 말했어. - P82

그리고 나는 너를 생각했어. 너를, 이제는 통조림 속으로 들어가버린, 혹은 한번 휘저어버린 소스 팬 속의, 또 다른 스파게티 면 한 가락이 되어 버린 너를. - P83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해 그 마음을 모두 이해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발밑에 광부들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광부들을 존재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 속에서 저는 여전히 아내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지만 거기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아내의 마음이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습니다.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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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부인이 두 아이와 방종이라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었어. 한 아이는 젖을 물고서 몹시 화를 내고 있었어. 글자 그대로 분노하고 있었어. 그리고 동생은 팔짝팔짝 뛰어다니며 사람들과 이리저리 부딪치면서 짜증나게 하고 있었어. 그럼 엄마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멍한 얼굴로 모나리자의 미소를 짓고 있었어. 부도덕하고 재수 없는 미소였어. 모성은 성스럽다고 확신하면서, 두 아이에게 규칙을 따르게 하지 않았어. 나머지 승객들에게 너무 경솔했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건 기독교의 자비가 진정으로 부족한 행동이 아닐까? 부인, 아이가 왜 고함치는 거죠? 살아 있 기 때문인가요? 나도 살아 있는데, 난 그걸 참고 있어야 해. 그런데 그것도 어느 정도야. 이런 삶에서는 죄 없는 순진한 사람의 인내를 악용하는 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찻잔을 가득 채우는 마지막 방울이 항상 있다는 것도 사실이야. 완전히 끝까지 가득 찬 찻잔에 한 방울이라도 더 떨어뜨리면 넘쳐 버려. - P151

그럼 경찰은? 이렇게 사건들로 가득한 나라에 경찰이 없을까? 물론 경찰은 있어. 그들은 ‘순경‘, ‘순사‘, ‘짭새‘, ‘권력의 지팡이‘, ‘범죄 사냥꾼‘, ‘초록 제복의 개새끼‘야. 그들은 투명 인간이야. 정작 필요할 때는 보이지 않거든. 유리컵보다 더 투명한 존재들이지. 그런데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날이면, 그들의 초록색 육체에 빛이 반사될 때면 어서 도망쳐야 해, 파르세로.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당신을 습격하고 두들겨 패서 다른 세상으로 보내버리거든. - P153

버스에서 죽은 사람이 또 하나 있어. 시비 걸기 좋아하던 거지였어. 국제 사면 위원회, 가톨릭교회와 공산주의뿐만 아니라 인권 위원회 사람들이 부추긴 마약 중독자 중의 하나였어. 그러니까 온종일 바수코를 피워 대면서 손에 막대기를 들고서 구걸하거나 강요하는 인간이었어.
"사장님, 뭐라도 좋으니 좀 주세요, 오늘 아침을 못 먹었어요. 배가 고파요."
나는 그런 인간들에게 이렇게 대답해. "당신을 낳은 어머니한테 먹여 달라고 해. 혹은 가난과 인간쓰레기의 번식을 목청껏 변호하는 교황에게 그렇게 말하라고 해.
거지들, 기독교인의 자비, 그따위 말은 그만! 부자들을 증오하는 것, 그건 옳아. 그러나 계속 가난하게 살면서 더 많이 낳으려고 고집하는 건······ - P153

가난의 유전자는 그것보다 더 심해, 더 지독해. 10000명 중에서 9999명이 확실하게 자기 아이들에게 전해져. 여러분은 그런 나쁜 유전자가 여러분의 아이들에게 유전되는 것에 동의해? 유전적 이유로 본다면, 가난한 사람은 번식할 권리가 없어. 세상의 부자들이여, 뭉쳐! 지금보다 더 단합해야 해. 아니면 가난이 밀어닥쳐 여러분을 휩쓸어 버릴 거야. - P155

"이봐, 내 아이야, 이 집에서, 거리를 내다보는 이 창문이 있는 이 방에서, 맑고 별이 총총 떠 있으며 미래가 유망하고 동시에 사기성이 농후한 어느 밤에 내가 태어났어."
바로 거기서 나는 죽어서 내 비문을 완성하고 싶어. 그건 라틴어 대문자로 내 이름과 동격으로, 그리고 문 이쪽으로 이렇게 말해야만 해. "유명 인사, 훌륭한 문법 학자, 뛰어난 문헌 학자, 신심이 돈독하고 자비로우며, 정중하고 공손하며, 우애 깊고 유순하며, 하나이고 같은 사람이며, 많은 사람 중의 하나이고, 지극히 올바른 이 사람은······."그리고 거기에 비명을 세운 해를 적어 놓고, 내가 태어나고 죽은 해는 적지 말아야 해. 영원성이란 두 날짜 사이에 억지로 집어넣지 말아야 해. 구속복을 입히지 말아야 해. 나는 그걸 굳게 믿는 사람이거든. 그러니 적지 마. 그냥 아무 제약도 없이 지나가도록 놔 둬. 그건 자기도 모른 채 스스로 지나가게 되는 거야. 알려진 모든 은하계, 은하수, 태양계, 지구, 콜롬비아 공화국, 안티오키 아주, 메데인시, 보스톤 동네, 페루 거리에 있는 이 집. 이곳은 내가 내 뜻과 상관없이 태어났지만, 내 손으로 죽겠다고 생각 하는 장소야. - P156

어린 시절은 가난과 같아. 해롭고 나빠. - P159

만리케 동네는(나는 이 글을 읽을 일본과 세르비아, 그리고 크로아티아 독자들을 위해 이 말을 하는 거야.) 메데인이 끝나고 코무나가 시작하는 곳 혹은 코무나가 끝나면서 메데인이 시작하는 곳에 있어. 그건 지옥의 문이라고 말하면서도 그게 입구인지 출구인지, 올라가는 방향에서 지옥이 저쪽에 있는 건지 아니면 이쪽에 있는 건지, 아니면 내려가는 방향에서 그런 건지 잘 알지 못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야. 올라가거나 내려가거나 상관없이 내 대모인 죽음의 여신은 그 치맛자락들을 배회하면서 자기 일에 열중하고, 아무에게도 멸시하는 표정을 짓지 않아. 그녀는 대자인 나, 거리낌 없이 마구 말하는 나와 같아. 그래서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해. - P162

그날 밤은 불길했어. 정신을 잃은 하늘이 쉬지 않고 밤새 비를 내렸어. 메데인 강은 넘쳐흘렀고, 그러자 180개의 개천도 넘쳐흘렀어. 이들 중 몇 개는 복개천이었어. 우리는 수많은 땀을 흘리고 수많은 돈을 횡령하면서 그 개울을 거리 아래에 묻었는데, 그것들이 성난 듯이 그들의 구속복을 찢어버리고서 아스팔트를 부수고는 옷을 제대로 입지 않는 미친 여자처럼 발광하고 실성하여 느닷없이 튀어나와 자동차들을 휩쓸면서 도시 전체를 엉망으로 만들었어. 다른 개울들, 그러니까 그들의 해방된 자매들은, 다시 말해서 제정신일 때는 온화한 비둘기처럼 상냥하고 쾌활했던 개울들이 이제 악마에 홀린 듯이 포효하고 소용돌이치며 산에서 격렬하게 흘러 내려와서, 우리를 덮쳤고 범람했으며 물에 빠뜨렸고, 나를 열병으로 헛소리하게 만들었어. 하늘은 속을 드러내고 강은 범람하고 개울은 발광하면서 하수관은 멋대로 거칠어져서 넘쳐흘렀어. 콸콸 세차게 흘러나왔고, 그 거대한 똥물의 바다가 우리 집 발코니로 올라오고 또 올라왔어. 내 말을 믿어. 난 이미 예고했어. 우리는 이 똥물로 끝나게 될 거라고. - P166

그때서야 나는 내가 알지 못하고 있던 걸 깨달았어. 그건 내가 한량없이 피곤해 있으며, 명예 따위는 눈곱만큼도 중요하지 않고, 나한테는 무처벌이나 처벌이 똑같은 것이며, 복수는 내 나이에 하기에 너무나 큰 짐이라는 사실이었어. -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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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눈이 어두워서 잘 보지 못해. 하지만 알렉시스는 아주 잘 봐.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그토록 잘 조준하겠어? 그런데 이번에는 변화를 주기 위해 이 주제에 관해 익히 잘 알려진 소나타를 윤색하면서, 그의 이마에 총알을 박아 넣지 않았어. 아니야, 그렇게 하지 않고서 대신 입에 꽂아 넣었어. 그가 욕을 내뱉었던 그 더러운 입에 쏴 버린 거야.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그가 살아서 내뱉은 마지막 말은 "보지 못하는 거야?"가 되고 말았어. 이건 그의 말을 다시 듣게 되면 알 수 있을 거야. 그는 더는 보지 못했어. 죽은 사람들은 눈을 뜨고 있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해. 우리는 그 눈들을 볼 수 있지만, 그 눈들은 보지 못하고, 그런 눈은 눈이 아니야. 시인 안토니오 마차도가 현명하고 정확하게 말했던 것처럼 말이야. - P61

만일 알렉시스가 적어도 무언가를 읽는다면······ 하지만 이 점에 있어서 이 아이는 너무나 철저해. 마치 그토록 오래 살면서도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은 위대한 레이건 대통령과 똑같아. 인쇄된 글자로 오염되지 않은 이 순수함은 또한 내가 이 아이에게서 가장 좋아하는 것이기도 해. 내가 그렇게 많은 책을 읽었는데, 내 꼴을 봐! 나를 보란 말이야. 그런데 내 아이는 서명하는 법은 알까? 물론 알고 있었어. 내가 본 필체 중에서 가장 씩씩하고 가장 삐뚤거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악마인 천사가 쓴 것처럼 이상야릇해. 여기 그 애 사진이 한 장 있는데, 사진 뒷면에 내게 바치는 글을 썼어. 간단하게 "평생 당신의 것"이라고만 썼는데, 그거면 충분해. 더 많은 것을 원할 필요가 있을까? 내 인생 전체가 그 말이면 충분하고도 남아. - P68

콜롬비아의 모든 문제는 의미의 문제야. 자, 그럼 한번 보지. ‘개새끼‘는 여기서 많은 의미가 있을 수도 있지만, 아무 의미도 없을 수도 있어. 예를 들어 "정말 개새끼처럼 추워!"라는 말은 "너무 심하게 추워!"라는 의미야. "개새끼처럼 똑똑한 놈이야."라는 말은 아주 똑똑하다는 뜻이지. 그러나 그 빌어먹을 놈이 우리에게 말했던 것처럼, 그냥 "개새끼."라고만 말하면, 그건 전혀 다른 의미야. 그건 뱀이 당신에게 내뱉는 독이야. 그런 독사들의 머리는 깨부숴야 해. 뱀이 죽느냐 우리가 죽느냐의 문제인 거야. 하느님이 그렇게 해 놓으신 거야. - P73

시뻘겋게 달군 집게도 아니고, 펄펄 끓는 솔도 아니야. 지옥의 고통은 바로 소음이야. 영혼이 불태우는 뜨거운 열이 소음이거든. - P86

죽음은 또 다른 죽음을 가져오고, 증오는 더 많은 증오를 가져와. 그렇게 되는 게 일종의 법칙이야. 빙빙 돌면서 자기 꼬리를 붙잡으려고 하는 고양이의 법칙이지. 많이 매장한다고 쏟아지는 폭력을 잠재울 수는 없어······ 오히려 폭력에 불을 붙여. 그래서 코무나에서는 산 사람의 운명이 죽은 사람들의 손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거야. 증오는 가난과 같아. 그건 아무도 빠져 나오지 못하는 모래 구덩이야. 몸부림을 칠수록 더 깊이 빠지거든. - P88

늙은이가 젊은 애를 죽이는 게 온당치 않다고 생각하지? 물론 그건 당연한 생각이야. 늙어서 하는 모든 건 타당치 않아. 죽이거나 웃거나 섹스하거나 무엇보다도 계속 살아가는 건 부적절한 행위야. 죽는 것을 제외하고 늙어서 하는 모든 건 부적절해. 늙음은 부끄럽고 천하며, 꼴사납고 혐오스러우며, 파렴치하고 구역질 나. 늙은이들은 죽을 권리 말고는 아무 권리도 없어. - P133

나는 자비롭게 옷은 그를 더 아름답게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의 아름다움을 감소시킨다고 그에게 설명했어. 그리고 모터사이클은 그에게 청부 살인자의 지위를 주고, 지프는 마약 밀매상 혹은 마약 조직원 같은 더럽고 저급한 인간쓰레기라는 걸 보여줄 뿐이라고 말했어. 그리고 오디오는 왜 필요하냐고 물었어. 우리가 안에 갖고 다니는 소리만 해도 시끄러운데 뭐하러 밖의 소리까지 원하는 거지? 그리고 냉장고 안에 넣을 것도 없을 텐데, 냉장고가 왜 필요해? 거기에 공기를 넣을 참이야? 아니면 시체를? 그러니 수프나 먹고 헛된 꿈은 잊어버리라고 말했어······. - P138

마술 상자 속을 뒤적거리고 찾으면서 깜짝 선물 속에서 갈수록 행복해 하는 고양이를 상상하도록 해. 여기에 대통령과 정부에게 전하고 싶은 게 있어. 국가는 조금 더 깨닫고 자각해서 젊은 애들에게 옷을 사주라는 거야. 그래야 생식이나 살인을 생각하지 않게 되거든. 축구장으로는 충분치 않아. - P148

사탄이여, 축복받으소서, 이 세상의 일을 걱정하지 않으시는 주님이 없는 틈에 당신이 이 세상의 잘못을 바로 잡기 위해 오셨나이다. - P149

프랑켄슈타인 박사와 그의 괴물처럼, 인간은 하느님의 손에서 빠져나와 하느님이 손쓸 수 없는 존재들이야. - P150

여기에는 죄 없는 사람이 없어. 모두가 죄 많은 사람이야. 무지와 가난, 이런 걸 이해하려고 해야 하지만······ 그런데 이해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어. 모든 게 나름대로 설명할 수 있고, 합리화할 수 있다면, 그렇게 우리는 범죄에 영합하게 되는 거야. 그럼 인권은? 인권은 무슨 인권, 그런 건 생각해 볼 가치도 없어! 그건 영합이며 방탕이고 방종이야. 자, 그럼 잘 생각해 보자고. 만일 여기 아래에 죄지은 사람들이 없다면, 그게 뭐지? 그건 범죄가 스스로 이루어진다는 게 아닐까? 범죄가 스스로 저질러지지 않고, 여기 아래에는 죄지은 사람이 없다면, 죄 있는 장본인은 저 위에 계신 분이야. 이런 범죄자들에게 자유 의지를 주신 무책임한 분이셔. 그런데 누가 그분을 벌주지? 당신이 벌주나? […]
국가는 탄압하고 총을 쏘기 위해 있는 거야. 나머지는 국민 선동, 그게 민주주의야. 더는 말할 자유, 생각할 자유, 일할 자유,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면서 버스를 만원으로 가득 채우는 자유는 없어. 그건 모두 개소리야!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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