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일어나서 실내가운으로 몸을 감싸고는 커튼을 손수 열어 젖혔다. 치장이 과한 밝은 분위기의 분홍색 실내로 정오의 태양이 밀려들었다. 지나간 시대의 호사였다. 창문의 이중 레이스 커튼, 결이 살아있는 분홍색 비단 벽지, 황금빛 목재, 분홍색과 흰색 베일이 드리워진 전등, 최신 비단을 씌운 고가구들. 레아는 아늑한 방도, 상당한 걸작품인 황동 세공 침대도 포기하지 않았다. 미관상 생경하고 정강이에는 가혹하지만, 절대 파손되지 않는 침대였다. 셰리의 모친은 옹호했다. "아니, 아냐, 그렇게까지 흉하지 않아. 난 이 방 맘에 들어. 시대가 느껴지잖아. 그게 이 방의 매력이라고. 라 파이바 저택 분위기야. - P20
레아는 그녀를 유심히 살피며 생각했다. ‘영락없는 마리로의 딸이로군. 은근히 제 어미의 빛나는 요소를 죄다 빼 박았어. 분칠한 듯한 부드러운 잿빛 머리칼, 무언가를 숨기는 듯한 불안한 눈빛, 말하거나 웃는 걸 억누르는 입술··· 철저히 마리로에게 필수적이었던 덕목들··· 그래서 마리로가 딸을 증오하기도 하겠는걸.‘ - P30
그들은 서로에게 잘 보이려 하지도 굳이 대화를 시도하려 하지도 않은 채 평온하게, 어떤 의미로는 행복하게 나란히 앉아 있었다. 서로를 침묵 속에 내버려두는 그 오랜 습관이 셰리에게는 무기력을, 레아에게는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 P33
하얀 뺨으로 내려앉은 속눈썹, 꼭 다문 입술, 아래쪽에서 빛을 받은 윗입술의 감미로운 아치가 양 옆의 움푹 팬 두 지점을 위로 끌어올렸다. 레아는 그가 와인 판매업자보다는 신(神)에 훨씬 가깝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녀는 몸을 일으키지 않은 채로 채 꺼지지 않은 담배를 셰리의 손가락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빼내어 재떨이에 던졌다. 잠든 이의 손이 흐늘거리더니, 잔인한 손톱으로 무장한 가느다란 손가락들이 시든 꽃잎처럼 축 늘어졌다. 결코 여성적이지 않지만 통념보다 좀 더 아름다운 손, 레아가 비굴함 없이 쾌락을 위해서, 향이 좋아서 수백 번도 더 키스한 손이었다. - P34
두 여자는 이십오 년째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한 남자가 부유하게 만들어준 뒤 떠나고 나면 다른 남자가 파산시키는 가벼운 여자들의 적대적 친교, 첫 주름과 첫 흰 머리의 위협에 직면한 경쟁자들의 심술궂은 친교. 긍정적인 여자들의 우정. 둘 다 이재에 밝으나 한 명은 인색하고 다른 한 명은 향락적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중요한 관계였다. 이후에는 보다 강력한 또 다른 관계가 두 여자 사이를 이었다. 바로 셰리였다. - P35
해가 떨어지자 정원의 내음이 시골의 내음으로 변했다. 뚜렷하고 생생한 아카시아 향을 머금은 바람 한 줄기가 들어왔다. 두 사람은 바람이 걷는 것을 보기라도 하려는 듯 일제히 뒤를 돌아보았다. 레아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장미색 아카시아야." 셰리는 대답했다. "응, 그런데 오늘 밤은 오렌지 꽃을 마신 것 같아." 레아는 그의 표현에 희미하게 감탄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행복한 희생자가 되어 향을 들이마셨다. 그녀는 등을 돌렸다. 순간 그가 자신을 부르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어쨌든 그는 그녀를 불렀고, 그녀는 그에게 다가갔다. - P46
‘잠깐, 그래··· 네 입술이 감미로운 건 부 인할 수 없는 사실이야. 이번엔 내 만족을 위해 키스할 거야, 내가 그러고 싶으니까. 그런 다음 놔줄게, 미련 없이, 아무 상관없어, 그래···.‘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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