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렇게 비참한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만 보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만들어 보기 때문이다. ‘보여줄‘ 것을 그리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익숙한 땅을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 P185

그런 소설이 있다. 끝났는데 끝난 것 같지 않거나, 그렇게 끝나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소설. 독자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다. 독자 역시 고립되어 있지 않고 감정의 진공상태에 있지도 않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 있는 이야기를 바꿀 수는 없다. 독자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다. 독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있는 이야기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다시 짓는 것이다. 잠든 이야기를 깨우고 끝난 이야기를 살리는 것이다. 즉 작가가 되는 것이다. 그 길밖에 없다. 이미 있는 이야기는 바꿀 수 없지만, 그건 권한 밖이지만, 다르게 다시 하는 건 할 수 있다. 그걸 막을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다. - P190

독자는 변덕이 권한이고 속성인 왕과 같다. 독자는 독자의 자리, 그 권능의 자리를 버리지 않는 한 이야기를 바꿀 수 없다. 바꿀 수는 없지만 그만하라고 소리지르고 말도 안 된다고 호통칠 수는 있다. 기꺼이 듣다가 어느 순간 지루해하고 짜증 낼 수는 있다. 설령 그로 인해 그 이야기꾼/작가가 죽음에 이른다고 하더라도, 이 권능을 가진 왕/독자의 변덕을 막을 수 없다. 탓할 수 없다. 변덕을 부리는 것은, 왕에게는, 변덕을 부리지 않는 것과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이야기꾼/작가에게 보 장된 것은 순전히 자의적, 자발적으로 이야기를 할 권리이고, 왕/독자에게 보장된 것은 이야기를 듣거나 듣지 않을 권리이다. 왕/독자에게 보장되지 않은 것은 이야기꾼/작가의 이야기를 바꾸거나 바꾸라고 요구하는 것이고, 이야기꾼/작가에게 보장되지 않은 것은 왕/독자의 변덕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다. - P195

사실의 토대 없이 신념이 만들어지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이를 묻는 것은 순진한 일이다. 에드거 앨런 포를 인용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사람들은 사실을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사실을 말하면 죽는다.‘ 사실은 사람을 짜증나게 하고 화나게 한다. 그래서 사실을 부정한다. 사실을 공격한다. 사실을 직시하면 자신들의 신념을 반성하고 교정하게 할 가능성이 높은데(왜냐하면 그들의 확신은 사실에 근거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은 확신에 따라 살아온 이제까지의 그들의 삶을 부정해야 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 P200

사실은, 사실 중요하지 않다. 사실은, 자기들의 확신을 보장 해주고 강화시켜줄 수 있을 때만 중요하다. 이미 가지고 있는 확신을 보장해주고 강화시켜줄 수 있는 사실만을 수용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배제한다. 혹은 자기 확신을 보장해주고 강화시켜줄 수 있는 방향으로 수정하여, 왜곡하여 받아들인다. 그렇지 않은 사실은 부정한다. 말하자면 확신에 의해 사실이 비틀어진다. 확신은 사실을 부정하기도 하고 왜곡하기도 하고 창작하기도 한다. 희망, 혹은 증오, 혹은 두려움에 의해 무언가가 덧붙거나 떨어져나간다. 거대한 초록이 사라지고 눈꼽 만한 회색 얼룩이 도드라진다. - P200

폴 틸리히는 불편함이 ‘회피‘의 이유라고 지적한다. "당신이 진리를 회피하려 하는 것은 그것이 너무 심오해서가 아니라 너무 불편하기 때문입니다."(『흔들리는 터전』) 익숙한 방에서 나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 불편한 일이다. 익숙한 방에서 나오지 않는 것은 그 방의 공기가 편하기 때문이다. 그 방 안의 공기가 편한 것은 자신이나 자신과 다름없는 사람들의 호흡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방은 하나의 세계다. 그러나 극복되어야 할 세계이다. - P201

역주행은 위험하다. 그러나 정말로 위험한 것은 역주행을 하면서도 자기가 역주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거꾸로 가면서 바로 가고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역주행 가능성을 아예 상정하지 않는 것이다.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깜짝 놀라 후진해서 돌아나오지 않는다. 도리어 자기가 옳다는 확신에 차서 바로 가고 있는 사람들을 잘못 가고 있다고 비난한다. - P202

확신하는 사람은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다. 확신이 만들어 제공한 ‘사실‘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구태여 다른 사실‘을 찾을 이유가 없고, 그러니 의심할 리 없다. 확신하는 사람은 반성하지 않는 사람이다. 잘못 가는 사람이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 혹은 자기가 잘못 가고 있지 않은지 의심하는 사람이 반성한다. 잘못 갈 가능성을 염두에 둔 사람에게만 반성할 가능성이 존재 한다. 자기를 의심하는 사람만이 반성한다. 자기를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반성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에게는 반성이라는 옵션이 없다. 그들은 반성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 자기와 다른 쪽으로 가는 사람들을 비난한다. 바로 가는 많은 사람을 비난한다. 바로 가는 많은 사람을 잘못 가고 있다고 비난한다. 투철할수록 더 심하게 비난한다. - P203

너무, 지나치게 사람을, ‘자아‘를 부추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역주행 운전자의 그처럼 투철한 확신이 면허 취소 수준의 음주에서 비롯했다는 건 꽤 의미심장하다. 그는 만취했고, 분별력을 잃었고, 혹시 자기가 잘못 가고 있는지 돌아볼(의심해 볼) 여유를 빼앗겼고, 오직 맹목의 확신에 사로잡혔다. 자기 자신의 오류 가능성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그렇다. 만취한 사람과 같다. 제어 불능의 이 상태는 정상이 아니다. 정상이 아닌데 다반사가 되었다. - P204

"이념은 저항에 굴복하지 않는 광신자, 저항을 염두에 두지 않는 광신자를 필요로 한다"라는 문장으로 본회퍼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삶에 대해 말하면서 지나친 자기 확신의 위험을 경고했다.(『나를 따르라』) 어떤 선한 뜻도, 그것이 설령 진리라고 하더라도 강요의 방법으로 이루어선 안 된다고 그는 가르친다. 그럴 때 그 진리는 이념이 되고 만다고 그는 강조한다. 이념은 이념들이고, 결국 진리에서 떨어져나간다. 광신자가 된다. 그에 의하면 광신은 종교적 행동이 아니라 이념, 즉 신념의 행동이다. 광신은 사실을 묻지 않고 성찰도 의심도 하지 않는다. 광신자들을 필요로 하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이념이다. 광신이라는 종교적 열정에 의해 유지되는 것은 이념이다, 종교는 아니다. 그것은 신이 광신적 믿음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광신적 믿음을 필요로 하고 요구하는 것은 인간이다, 인간이 만든 신념이다. - P205

광신자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는데, 그것은 광신자들이 저항에 굴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저항을 염두에 두지도 않기 때문이다. 다른 힘을 염두에도 두지 않는 이들, 다른 길을 의식조차 하지 않는 이들을 이길 힘은 없다. 이념을 가진 이들의 믿음이 항상 더 강하고 투철하다. - P206

많은 경우 종교는 이념에 이용당한다. 이념이 제 일을 하기 위해 종교적 명분을 앞세우거나 종교로 위장하는 일은 드물지 않다.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 뜻을 이루려고 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이념이 하는 일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세상의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서라도 말씀을 강요하려 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이념으로 만드는 셈이 될 것이다." 종교가 그렇게 할 때 종교는 이념이 되고 만다. 자기가 바르게 가는지 반성하지 않고 자기와 다른 방향으로 가는 사람을 비난하는 데만 열정을 쏟게 된다. 술 취한 사람과 다름없게 된다. 종교의 탈을 쓴 광신자들의 집단을 종교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없다. 그런 집단의 우두머리를 선동꾼이라면 모를까, 종교인이라고 할 수 없다. -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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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도보 1분 거리에 목욕탕, 우동집, 중국집, 떡 가게, 채소 가게, 빵집, 이발소, 미용실, 문방구, 과자 가게, 오코노미야키 가게, 찻집, 전파상, 세탁소 등이 있어 편리했다. 지나가는 말로도 절대 고상하다고는 할 수 없는, 일본인과 한국조선인이 공존하던 동네였다. 나는 그 거리에서 당당하게 본명을 쓰고 어머니가 직접 만든 치마저고리를 평상복으로 입고 다녔다. 밖에서도 주위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큰 소리로 ‘어머니! 아버지! 오빠!‘를 불러대는 아이였다. 어머니는 어린 나에게 곧잘 "조선인인 영희를 놀리거나 괴롭히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건 그 사람이 이상한 거야. 네가 나쁜 게 아냐. 언제나 당당하게 굴어"라고 일러주었다. "그러려면 예의 바르게 인사 똑바로 하고, 옷도 깨끗이 입고 다녀야지. 어머니가 늘 블라우스랑 양말을 새하얗게 빨고, 손수건은 다림질하는 이유가 다 그래서란다. 조선인은 더럽다, 그런 소리 들으면 안 돼"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 P19

피부색도 언어도 다른 사람들이 우리 아버지를 보고 마치 자신의 부모를 보는 것 같다고 해서 적잖이 놀랐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민 1세의 고생을 보고 자란 2세, 3세의 연대감을 느꼈다. 여러 이유로 고국을 떠나 새로운 땅에서 생활의 기반을 다지며 권리를 쟁취해온 이민 1세들의 모습을, 2세들은 알고 있다. 식민지지배나 전쟁, 내전, 독재 체제를 경험한 세대에게 지배자, 침략자, 적, 원수였던 나라의 인간과 부부의 연을 맺는다는 것은 도덕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일 터이다. 개인의 연애와 결혼에 국가 간 문제를 적용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지만, 부모와 조부모가 살았던 시대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다고, 우리 부모도 그랬다고 관객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 P26

나는 가족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직계가족에서도 벗어나고 싶은데 타인과 새로운 가족을 만들라니, 제정신인가. 아버지의 딸, 오빠들의 여동생, 여성, 재일코리안 같은 명사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가족을 향해 카메라를 든 이유도, 도망치기보다 그들을 제대로 마주 본 다음에 해방되고 싶어서였다. 영화 하나 만들었다고 무엇에서 해방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손목 발목에 주렁주렁 차고 있는 그것들에서 자유로워지려면 그것들의 정체를 알아내야 했다. 알아야만 비로소 벗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 P31

오빠들과의 추억이 서린 집이라고 하기에는 함께 보낸 시간이 너무 짧았다. 너무도 짧아서 특별할 것 없는 일상도 가슴에 박힐 만큼 소중한 기억이 됐다. 조총련 커뮤니티에서는 ‘영광의 귀국‘을 한 오빠들을 칭송하며 남은 가족들의 상실감을 ‘명예‘로 메울 것을 강요했다. 어린 마음에도 오빠들이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 된다고 스스로를 달래며 외로움을 견뎠다. 주변 어른들은 ‘민족 차별이 만연하는 일본에서 고생하는 것보다 차별 없는 조국에서 고생하는 게 낫다. 5년쯤 지나면 조국 통일이 이루어지고 남북도 일본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을 것이다 라며 꿈같은 소리를 했다. 당시에 그런 말은 확실히 꿈같은 이야기였지만, 재일코리안을 둘러싼 일본 상황 역시 악몽 같았다. - P48

가족과 마주하기. 딸이라는 역할에 갇힌 상태에서 이 소박하고도 장대한 과업에 임하기란 심히 어려웠다. 캠코더라는 장치의 힘을 빌려 속내를 숨긴 관찰자, 인터뷰어, 감독이라는 역할을 스스로 부여함으로써 발을 내디딜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가족을 찍는다는 것은 결국 내가 어디서 왔는지 파헤치는 행위다. 고통을 수반하는 딸의 행위에 한 번도 그만두라는 말 없이 렌즈를 받아들이는 데 얼마큼의 각오가 필요했을까. 영화를 촬영하는 동안에는 자각하지 못했다.
부모님과 내가 식탁을 사이에 두고 웃는 얼굴로 대화를 나누게 되기까지 이런 작은 역사가 존재했다.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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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금 두렵다: 다음 순간은 미지의 것이기에 나를 완전히 맡기기가 두렵다. 다음 순간을, 그걸 만드는 건 나일까? 아니면 그것 자신일까? 우리는 우리의 숨결을 통해 함께 그것을 만든다. 투우장에 선 투우사의 솜씨로. - P11

황홀경 속에서 반짝이는 것, 기쁨, 기쁨은 시간의 성분이고 순간의 본질이다. 그리고 순간 속에 순간의 있음이 있다. 나의 있음을 붙잡고 싶다. - P12

내 주제는 ‘순간‘일까? 내 인생의 주제.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애쓰는 나는 무수한 시간을 흘러가는 순간들의 수만큼 나눈다. 나 자신처럼, 혹은 너무도 부서지기 쉬운 찰나들처럼 조각내는 것이다—나는 오직 시간과 함께 태어나고 시간과 더불어 성장하는 삶만을 다짐한다: 나는 오직 시간 그 자체 속에서만 충분한 공간을 가질 수 있다. - P12

나는 둥글고 돌돌 말리고 따뜻한 것, 그러나 가끔은 새로운 순간들처럼, 늘 떨리는 시냇물처럼 차가운 것을 쓰고 있다. 내가 이 캔버스에 그려 놓은 것을 말로 옮길 수 있을까? 소리 없는 말이 음악의 소리에서 암시를 얻을 때처럼. - P13

내가 어떻게 음악을 듣는지, 거기에 대해서는 당신에게 아직 말해 주지 않았다—전축에 가만히 손을 올려 놓으면 손이 진동하면서 온몸으로 파동을 보낸다: 그렇게 나는 진동이 품은 전기電氣를, 현실이라는 영역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토대를, 내 손 안에서 떨리는 세상을 듣는다. - P14

내가 ‘나‘라고 말하는 건 감히 ‘당신‘이나 ‘우리‘ 혹은 ‘누군가‘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겸허해지라고 강요 당한 나는 나 자신을 개인으로, 하찮은 존재로 만들고, 하지만 나는 (당신)이다.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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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과 불안 때문에 사람들은 보고 파악하고 규정하려 한다. 어떻게든 자기 눈앞에 두려고 한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신의 법을 받고 있을 때 산 아래서는 사람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신으로 만족할 수 없어서, 불안해서 보이는 우상을 만든다. - P172

신성과 경이는 느낄 수는 있으나, 느낄 수 있을 뿐 손에 잡히지 않기 때문에 불편하다. 압도적이면서 매혹적인데 실체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 빠진다. ‘성스러움‘의 의미에 대해 루돌프 오토는 그것이 두렵기만 한 것이 아니라, "독특한 힘으로 끌어당기며, 매료하며, 매혹하는 어떤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우리를 겸허하게 만드는가 하면 동시에 우리를 고양시키며, 우리의 마음을 제약하는가 하면 또 스스로를 초월하게 하며, 공포와 유사한 감정을 유발시키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행복한 감정을 자아내기도 한다."(『성스러움의 의미』) 두려움과 매혹, 이 상반된 감정의 동시적 습격을 인간은 감당할 수 없다. 수용할 수 없으므로 추방하거나 수용하기 위해 축소한다. 손에 잡히게 바꾼다. 생각의 범주나 시력이 미치는 범위 안에 두려고 한다. 불가사의와 불가시는 밀려난다. - P172

이해할 수 없이 크고 파악할 수 없이 큰 것을 이해하고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해와 파악의 범주 안으로 욱여넣어야 한다. 그러면 이해 할 수 없고 파악할 수 없는 것은 빠지고 이해할 수 있고 파악할 수 있는 것이 담긴다. 훼손과 손실이 불가피하다. 훼손되지 않아야 할 것들이 훼손되고 손실되면 안 되는 것들이 손실된다. 집어넣을 수 없는 것은 집어넣을 수 없다. 보이지 않는 것은 보게 할 수 없다. 우주를 집어넣으려면 우주보다 큰 자루가 필요하다. 신을 집어넣으려면 신보다 큰 자루가 있어야 한다. 그런 것은 없다. 그러니까 집어넣을 수 없는 것은 그대로 두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지 않는 채로 보아야 한다. - P174

예배는 이벤트가 된다. 경이와 신비 대신 형식과 순서와 기능이 중요해진다. 보이는 것이 중요하고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견고한 교리와 세련된 형식을 갖춘 종교는 종교인을 예배라는 이름의 잘 기획된 행사에 참여하는, 동원된 일원으로 만든다. - P175

존재는 인식에 우선한다. 우리의 앎과 모름에 따라 어떤 존재가 있거나 없는 것은 아니다. 누구, 혹은 무엇의 있고 없음은 우리의 앎, 혹은 모름에 좌우되지 않는다. 있는 것은 우리의 앎과 상관없이 있고, 없는 것은 우리의 모름과 상관없이 없다. - P179

제도화된, 굳은, 안전한 종교 안에서 많은 경우 신은 인간이 추구하는 욕망(이를테면 권력이나 출세나 부의 축적 같은)의 대체재, 혹은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는 지렛대가 된다. 신은 쉽게 이용당한다. 몸은 예배당에 있지만, 권력이나 출세나 부의 축적 같은 욕망과 접속해 있다면, 그 욕망을 위해 병 속에 들어가 웅크린, 축소된 신을 이용하고 있다면, 그것을 예배라고 할 수 있을까. 물리적 공간에 제한되지 않는 신과의 만남이 물리적 공간의 참여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주장만큼 이상한 것도 없다. - P182

공동체는 집단이 아니라 고유한 ‘한 명‘들의 모임이다. 몰입과 흡수, 예속이 신앙의 지표가 되는 순간 인간은 고유성을 잃고 사유할 줄 모르는 기계, 프로그래밍된 내용에 따라 열광할 뿐인 기계가 된다. 기계의 부품이 된다. 제도화된, 굳은, 안전한 종교가 신 앞의 유일한 존재인 사람의 지위를 빼앗는 일이 무의식, 무의지중에 발생한다. 집단은 ‘개별성을 삼키는 육체의 집합체‘이다.(알랭 핑켈크로트, 『사랑의 지혜』) 맹신은 믿음의 최상급이 아니라 믿음의 반대말이다.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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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친절은 말하는 이의 성정이나 의도가 아니라 결과적 현상이다. 누군가의 말이 잘 전달되지 않는 것은 말하는 사람이 잘못 말하거나 듣는 사람이 잘못 들어서일 때도 있지만, 두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기 때문일 경우가 더 많다. 같은 발음의 한 단어는 그 단어에 대해 발화자와 청취자가 가지고 있는 이해에 따라 다르게 전달된다. 특정 단어에 대한 이해는 삶의 경험에 의해 주로 형성되는데, 그 경험이 상이할 때 말은 허공을 떠돈다. 어떤 사람에게 아버지는 악몽이고, 사랑은 끔찍한 것이다. - P158

말하는 사람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을 파악할 수 없다. 신이 파악되지 않는 존재인 것은 인간이 그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무한한 신의 말이 유한한 인간의 언어를 통해 전달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손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본회퍼는 다른 책 (『창조와 타락』)에서 이 사실을 비교적 분명하게 밝혔다. "성서 저자의 언어가 인간의 언어라는 점에서, 그가 자신의 시대. 자신의 인식, 자신의 한계에 예속되어 있다는 사실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이 언어(자신의 시대, 인식, 한계에 예속되어 있는 인간의 언어)를 통해서 자신의 창조에 대해 말씀하신다는 사실에도 이론의 여지가 없다." - P158

성서는 많은 인간 저자에 의해 쓰였다.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쓴 것이다. 어떤 책은 누가 썼는지 분명하고 어떤 책은 불분명하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의 언어로, ‘자신의 시대와 인식의 한계 아래서‘ 썼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데 그들이 쓰려고 한 것은 인간의 언어로는 쓸 수 없는 ‘신의 말‘이다. 인간의 언어로는 쓸 수 없는 신의 말은 인간의 언어를 통해 말해지지 않으면 인간에게 들려질 수 없다. 두 차원에는 절대적 차이, 철저한 불연속성이 존재한다고 우리는 이해한다. 아무리 잘 옮겨도 축나는 걸 막을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의 언어로 쓰인 ‘신의 말‘은 본래 뜻이 손실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신의 말이므로 인간은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고 받아들이기도 어렵다. - P159

여백은 신의 말과 인간의 말이 맞부딪치는 자리이다. 여백은 침묵이 아니라 소란이다. 어떤 말로도 옮겨지지 못해 유보된 말들이 발굴되기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는 공간이다. - P160

들은/ 맡은 말이 없는데도 사신 노릇을 하는 이들에 대해 카프카는 신랄하다. 세상에는 파발꾼들이 넘쳐나는데, 그들에게는 귓속말을 해줄 왕이 없다. 그들에게 말을 맡긴 왕이 없다면, 없는데도 말을 전한다면 그들은 무엇을 전하는 것일까? 카프카는 그들이 의미 없는 말들을 서로에게 외쳐댈 뿐이라고 말한다.(「파발꾼」) 이들은 자신들의 삶을 비참하다고 느낀다. 이들이 비참한 것은 메시지 없이 메신저 노릇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 P165

전하는 자는 말하는 자가 되려는 유혹을 이겨야 한다.
그의 말은 뿌려진 씨앗과 같을 것이다. 어떤 씨앗은 싹이 났다가 물기가 없어 말라버릴 것이다. 어떤 씨앗은 땅에 떨어지자마자 새의 먹이가 될 것이다. 어떤 씨앗은 결실할 것이다. 그러나 결실은 사신이 하는 일이 아니고 사신의 몫도 아니다. 그의 일은 씨를 뿌리는 것이지 결실하는 것이 아니다. 결실의 많고 적음에 그의 영광이나 수치가 걸려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영광과 수치는 씨/말을 뿌리기/ 옮기기에 대한 그의 성실 함에 달려 있을 뿐이다. 결실의 많고 적음은 우연한 행운이거나 어쩔 수 없는 불운이다. 우연한 행운이나 어쩔 수 없는 불운으로 영광과 수치를 가늠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인간의 일이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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