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아는 평정심의 미덕에 잠겨 행복했고 모성애를 느꼈다. ‘내가 딴 사람으로 만들어줄 거야‘ 그녀는 오후의 보리수나무 그늘 아래서 벗고 있는 셰리, 아침에 하얀 담비 모포 위에서 벗고 있는 셰리, 아니면 밤에 물이 미지근해진 수영장 가에서 벗고 있는 셰리를 앞에 두고 생각하곤 했다. ‘그래, 얼마나 잘생겼어, 도덕성이 부족한 것쯤은 내가 바꿔놓으면 될 일이지.‘ - P51

파트롱이 긴 속눈썹을 내리깔며 인정했다. 그는 레아의 숨김없는 관능에 대한 암시와 웃음을, 그녀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때 던지는 그 집요한 눈웃음을 거북해하면서 견뎠다. - P51

"아무 말도 하지 마, 그래, 날 증오하겠지. 차라리 이리 와서 키스해 줘. 이 아름다운 괴물, 저주받은 천사, 애송이 머저리야···."
셰리는 목소리에 압도당하고 내용에 모욕감을 느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파트롱은 커플을 앞에 두고서 순수한 입술로 새로운 진실을 꽃피웠다.
"육체적으로만 놓고 보면 당신은 두말 할 것 없이 탁월해요. 그런데요, 셰리, 당신을 볼 때면 어쩔 수 없이 이런 생각이 든단 말이죠. ‘이 친구는 내가 여자라면 한 십 년 후에나 다시 찾을 것 같아.‘"
셰리는 정인에게 기울였던 고개를 거두며 암시적으로 물었다.
"들었어? 누누, 코치님이 십 년 후라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레아는 듣는 둥 마는 둥 그의 질문은 귓전으로 흘리고서 자신에게 원기를 되살려주는 젊은 육체의 뺨, 다리, 엉덩이 등을 한 손으로 되는 대로 토닥이며 유모의 불경스런 즐거움을 누렸다.
파트롱은 셰리에게 질문했다.
"고약을 떨면서 어떤 만족감을 느끼는 거죠?" - P55

그녀는 이제껏 전혀 아쉽지 않았던 것들을 난생 처음으로 헛되이 기다렸다. 그것은 젊은 연인의 신뢰와, 무방비 상태의 느긋함과, 고백과, 진심과, 조심성 없는 감정의 토로였다. 젊은 연인이 거의 부모에 대한 청소년의 감사와 흡사한 감정으로 성숙하고 든든한 여자 친구의 따뜻한 품안에서 밤새도록 눈물과 고백과 원망을 주저없이 쏟아내는 시간들 말이다. - P56

만일 다정함이 의도치 않은 고함과 굳게 낀 팔짱에서도 간파되는 것이라면. 하지만 ‘악의‘는 언행과 숨기는 경계심에 의해 늘 드러났다. 얼마나 많은 새벽녘에 레아는 만족하고 차분해져서 눈을 게슴츠레 뜬 그를, 그러면서도 매일 아침과 매순간의 포옹으로 전날보다 더 아름답게 재창조되기라도 한 듯 입술엔 생기를 되찾은 그를 품에 안고 있었던가. 얼마나 많은 순간에 그녀는 정복당했고, 그때마다 정복욕과 고백하고 싶은 쾌락에 휩싸여 그의 이마를 자신의 이마로 누르며 속삭였던가.
"말해. 말해. 말하라고···." - P57

셰리는 잠든 척했다. 우울감과 숨죽인 분노에 사로잡혀 보다 편하게 이를 악물고 두 눈을 감기 위해서. 그에게 기대어 누운 그녀는 어쨌든 그의 소리를 들었다, 희열에 들떠서 들었다. 미세한 떨림을, 저 멀리에서 요동치는, 포로처럼 온몸으로 부인하는 공포와 감사와 사랑의 울림을. - P58

그는 태양빛을 환히 받으며 몸을 뒤로 누이고 목을 활처럼 젖히고는 두 눈을 한껏 크게 떴다. 두 눈동자는 일견 까맣게 보였지만 레아는 실은 짙은 적갈색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무수한 아름다움 중에서 보다 진귀한 것을 적시하고 선별하기라도 하듯 검지로 그의 눈썹과 눈꺼풀과 입술 가장자리를 차례로 스쳤다. 그녀가 조금은 경멸하는 이 연인의 얼굴은 이따금 일종의 경의를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생각했다.
‘이 정도까지 아름다운 건 고결한 거야.‘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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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일어나서 실내가운으로 몸을 감싸고는 커튼을 손수 열어 젖혔다. 치장이 과한 밝은 분위기의 분홍색 실내로 정오의 태양이 밀려들었다. 지나간 시대의 호사였다. 창문의 이중 레이스 커튼, 결이 살아있는 분홍색 비단 벽지, 황금빛 목재, 분홍색과 흰색 베일이 드리워진 전등, 최신 비단을 씌운 고가구들. 레아는 아늑한 방도, 상당한 걸작품인 황동 세공 침대도 포기하지 않았다. 미관상 생경하고 정강이에는 가혹하지만, 절대 파손되지 않는 침대였다.
셰리의 모친은 옹호했다. "아니, 아냐, 그렇게까지 흉하지 않아. 난 이 방 맘에 들어. 시대가 느껴지잖아. 그게 이 방의 매력이라고. 라 파이바 저택 분위기야. - P20

레아는 그녀를 유심히 살피며 생각했다. ‘영락없는 마리로의 딸이로군. 은근히 제 어미의 빛나는 요소를 죄다 빼 박았어. 분칠한 듯한 부드러운 잿빛 머리칼, 무언가를 숨기는 듯한 불안한 눈빛, 말하거나 웃는 걸 억누르는 입술··· 철저히 마리로에게 필수적이었던 덕목들··· 그래서 마리로가 딸을 증오하기도 하겠는걸.‘ - P30

그들은 서로에게 잘 보이려 하지도 굳이 대화를 시도하려 하지도 않은 채 평온하게, 어떤 의미로는 행복하게 나란히 앉아 있었다. 서로를 침묵 속에 내버려두는 그 오랜 습관이 셰리에게는 무기력을, 레아에게는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 P33

하얀 뺨으로 내려앉은 속눈썹, 꼭 다문 입술, 아래쪽에서 빛을 받은 윗입술의 감미로운 아치가 양 옆의 움푹 팬 두 지점을 위로 끌어올렸다. 레아는 그가 와인 판매업자보다는 신(神)에 훨씬 가깝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녀는 몸을 일으키지 않은 채로 채 꺼지지 않은 담배를 셰리의 손가락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빼내어 재떨이에 던졌다. 잠든 이의 손이 흐늘거리더니, 잔인한 손톱으로 무장한 가느다란 손가락들이 시든 꽃잎처럼 축 늘어졌다. 결코 여성적이지 않지만 통념보다 좀 더 아름다운 손, 레아가 비굴함 없이 쾌락을 위해서, 향이 좋아서 수백 번도 더 키스한 손이었다. - P34

두 여자는 이십오 년째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한 남자가 부유하게 만들어준 뒤 떠나고 나면 다른 남자가 파산시키는 가벼운 여자들의 적대적 친교, 첫 주름과 첫 흰 머리의 위협에 직면한 경쟁자들의 심술궂은 친교. 긍정적인 여자들의 우정. 둘 다 이재에 밝으나 한 명은 인색하고 다른 한 명은 향락적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중요한 관계였다. 이후에는 보다 강력한 또 다른 관계가 두 여자 사이를 이었다. 바로 셰리였다. - P35

해가 떨어지자 정원의 내음이 시골의 내음으로 변했다. 뚜렷하고 생생한 아카시아 향을 머금은 바람 한 줄기가 들어왔다. 두 사람은 바람이 걷는 것을 보기라도 하려는 듯 일제히 뒤를 돌아보았다. 레아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장미색 아카시아야."
셰리는 대답했다.
"응, 그런데 오늘 밤은 오렌지 꽃을 마신 것 같아."
레아는 그의 표현에 희미하게 감탄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행복한 희생자가 되어 향을 들이마셨다. 그녀는 등을 돌렸다. 순간 그가 자신을 부르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어쨌든 그는 그녀를 불렀고, 그녀는 그에게 다가갔다. - P46

‘잠깐, 그래··· 네 입술이 감미로운 건 부 인할 수 없는 사실이야. 이번엔 내 만족을 위해 키스할 거야, 내가 그러고 싶으니까. 그런 다음 놔줄게, 미련 없이, 아무 상관없어, 그래···.‘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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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서 우리 가족은 유리처럼 부서졌다. - P142

이제 호텔에서 나와 밤비는 우리만의 독방을 받는다.
낯선 도시에서 홀로 남겨지는 것이 나는 두려웠다. 그러면 누구에게 의지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나는 혼자 거리로 나가면 안 된다. 그러면 길을 잃어버리고 만다. 나는 집들의 위치, 거리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 한다. 나는 집들과 거리가 항상 철거되고 새로 세워진다는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 P147

나는 거꾸로 자란다.
어머니는 매년 나를 더 어리게 만들려 애쓴다.

나는 여전히 보호받아야 하는 어린아이라고 어머니는 말한다.
아이라고! 아이가 이런 모습이야? - P161

더 이상 자고 싶지 않다.
나는 서두르고만 싶다.
항상 서두르고만 싶다.
어머니는 내게 매우 다정하다 나는 그게 싫다. 나는 자꾸만 미안하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어머니는 내 안에 들어왔다 나가기를 반복한다.
나는 사진 속 어머니를 닮았다.
나는 나 없는 나와 같다. -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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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히츠 선생님 안으로 들어간다.

히츠 선생님 내부에는 선반장이 가득 들어찼고 선반장에는 작은 메모장과 연필을 든 조그마한 경찰관들이 웅크리고 있다.
그들의 직업은 연필깎이다.
연필을 가장 빨리 닳게 만드는 자가 선반의 위 칸으로 올라갈 수 있다.
가장 근면한 자는 연필깎이 왕이 되어 자신이 만든 쓰레기를 다른 자들 머리 위로 버릴 수 있다. - P121

겁이 나면, 심장을 입안에 넣고 미소를 짓는 거야. 어머니는 말한다. - P136

입 밖으로 나온 말은 현실이 될 거라고, 예전에 언니는 말했다. 언니는 내가 어머니 때문에 불안하더라도 그 감정을 말로 꺼내지 못하게 했다.
사고가 날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자주 생각하지 않았다면,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까? - P139

민주주의국가에서 우리가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나는 결코 고향을 떠나지 않았을 거야! 엄마가 말한다. 네 아버지는 우리가 낙원으로 가는 거라고 했어.
뭐, 낙원이라고!
여기는 개가 사람보다 더 소중한 나라야! 상점 선반에 개 사료가 가득하다고 가족에게 편지를 쓰면, 다들 내가 드디어 미쳐 버렸다고 생각하겠지!
이 나라 욕실에서는 어디든 따뜻한 물이 나오고, 사람들 가슴에는 냉장고가 들어 있어!
하지만 신이 잠든 건 아니라서, 가난한 사람들의 눈물로 바다를 만드실 거야. 우리가 천국에 가면 거기서 목욕할 테지. 물에서 나오면 피부가 24캐럿 순금이 되어 있을걸!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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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항상 잠만 잔다면 정말 좋겠다. - P80

한 마리 짐승이 내 배 속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 짐승은 이미 내 다리를 먹어 치운 상태였다.
이 집은 시설이라고 언니가 말한다. 여기서는 매우 살이 쪄야만 한다, 안 그랬다가는 산에 짓눌려 버릴 테니까. 또 몸을 따뜻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피부가 아주 많이 필요하기도 하다. - P93

언니는 읽기와 쓰기, 산수를 배운다. 내 수업은 노래하기와 그림 그리기다.
나는 노래할 때마다 눈물이 난다.
나는 기쁨을 견딜 수 없다.
노래를 부르고 나면 우리는 동물이 그려진 종이를 한 장씩 받는다. 우리는 동물을 색칠해야 한다. 그런 다음 외국어로 동물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배운다.

똑같은 것이 모든 언어마다 다르게 불린다. - P97

아이는 폴렌타 속에서 끓는다. 다른 아이들을 괴롭히기 때문이다. 고아들을 붙잡아서 나무줄기에 묶고 뼈만 남긴 채 살을 다 빨아 먹는다.
아이는 너무 뚱뚱해서 항상 배가 고프다.
아이는 뼈다귀가 가득한 숲에 산다. 사방 어디서나 아이가 뼈를 갉아먹는 소리가 들린다.
밤이 되면 아이는 흙을 덮고, 숲 전체가 떨릴 정도로 불안한 잠을 잔다. - P104

모든 언어마다 신의 이야기가 다른 건 당연하다고 언니는 말한다.
악마는 이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악마는 신의 조수이며 폴렌타만큼이나 뜨거운 지옥에서 산다.
지옥은 천국 뒤편에 있다.

인간은 악마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선하다.

나는 침대 옆 탁자에 세면용 천을 놓는다.
이건 지옥이다.
내가 지옥에 빨리 익숙해지면 아마 우리는 곧 여기서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 P105

음식이 맛없다고 하면, 히츠 선생님은 항상 굶주리고 있는 아프리카의 불쌍한 아이들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나는 선생님이 한 번도 루마니아에 가 보지 않았음을 알아차린다. 가 봤다면 늘 똑같은 이야기만 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렇다고 아프리카에 가 본 것 같지도 않다. - P106

서커스 단원들은 전부 다 친척이거나 서로 사랑하는 사이고, 다들 한 트레일러에서 같이 자고 같은 접시의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연 속에서 산다고. 오 얼마나 아름다운가!
서커스 단원들이 하루 종일 리허설에 매달린다는 것을, 프로그램 내용을 언제든지 남에게 도용당할 위험, 어느 날 저녁에 천장에서 떨어져서 다음 날 이미 죽은 목숨이 될 위험까지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아이들은 상상도 못 한다.
이 모두를 그냥 재미라고 생각한다.
어머니가 추락하면, 어머니는 재미로 죽지 않는다. - P116

내가 영화배우가 될 거라고 하면 아이들은 웃는다.
[…]
히츠 선생님은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매번 얼굴이 새빨개지면서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만 내뱉는다: 모든 사람은 평등해, 그 누구도 남보다 더 특별할 수는 없어.
가장 중요한 건 근면과 겸손이야.
신은 게으른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
인간은 세상을 돌보기 위해 태어났어.
그 누구에게도 짐이 되어서는 안 돼.
그러므로 반드시 직업을 가져야 하고 기부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돈을 벌어야 해.
그리고 항상 집을 깨끗하게 청소해야 해.
그러면 마음의 평화가 오니까.

하지만 선생님은 또, 우리가 신의 형상이라고도 말한다.

우리가 신의 형상이라면, 우리도 신처럼 유명해질 수 있다.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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