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한 물속에서 엘렌은 삼십 년 전 학교에서 배운 크롤 수영을 한다. 그 시절 다소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던 반복 동작을 되새기는 사이 엘렌은 의문의 여지 없는 건강함을 되찾는다. 곧 관절과 어깨에 열이 오른다. 노력은 비바람이 들이치지 않는 영역을 만들어 내고, 거기서 행복이 그녀를 감싼다. 배가 홀쭉해지고 어깨가 당기는 느낌이다. 수면에 올라와 한 번씩 들이마시는 숨은 키스다. 풀장을 한 번 완주하고 엘렌은 벽에 기대어 숨을 고른다. 망설이듯 수면을 떠도는 수많은 빛의 영상들이 엘렌의 얼굴을 찌른다. 엘렌은 눈을 깜박여 속눈썹 위에 맺힌 물방울을 떨군다. 산들바람이 불고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기적과도 같은 즐거움. 육체의 존재를 알리는 모든 것이 그녀를 기쁨으로 채운다. - P230
엘렌은 50미터를 헤엄치기 위해 다시 출발했다. 벌써 다리가 아프다. 숨이 차오르니 노인네가 된 것만 같다. 하지만 우울과 무기력은 처음 10미터만 지나면 사라진다는 걸 엘렌은 안다. 추위와 마비, 늪 같은 권태를 극복해야 한다. 부조리하게 반복되는 왕복 운동을 계속하며 버텨 내야 한다. 상념들이 머리, 추억, 물결을 지나 영혼까지 전해진다. 수영은 인내의 운동, 다시 말해 권태의 운동이다. 엘렌은 타일 하나가 떨어져 나가고 없는 낡은 풀장 바닥을 뚫어져라 내려다본다. 햇살이 물에 내리꽂히고, 빛은 각도에 따라 섬광이 되었다가 그늘이 되었다가 눈부심을 낳기도 한다. 누군가 지나갈 때마다 빛의 단계가 모습을 감춘다. 엘렌은 수영을 한다. - P232
엘렌은 또래 여자애들의 시기와 중상에 이미 익숙했다. 그녀의 엉덩이, 얼굴, 스캔들을 일으키고도 남을 법한 탐스러운 머리카 락은 그녀를 여자애들 사이의 균형과 위치, 아늑함을 위협하는 존재로 만들었다. […] 사람들은 그런 엘렌을 창녀라고 부르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것은 엘렌이 위협 적인 존재이며 몸을 무기로 특정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권력자라는 뜻이었다. 여기서 창녀라는 용어는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모래처럼 나약함을 드러낼까봐 예방 차원에서라도 미리 씨를 말려 버려야 하는 부당 권력이라는 의미가 있었다. 이 경우 윤리는 이름을 밝히지 않는 정치 프로젝트 같은 것으로 엘렌이 지닌 무질서의 가능성들을 제 압했다. 엘렌이 소유한 미적 효과 축소하기, 엘렌이 예쁜 엉덩이로 남용하는 권력 꺾기. - P233
엄마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한 얼굴이었다. 잠시 후 엄마가 말했다. "이모네 집으로 가자. 오토바이는 없어. 걔네가 홀라당 태워 버렸어." 엄마가 들려준 이야기에 앙토니는 오히려 안심했다. 이미 끝나 버린 세계에도 장점은 있는 법이었다. 적어도 이 재앙이 강박을 없애 주었다고 생각했다. 이제 어떻게 지낼지, 생활은 어떻게 할지, 돈, 옷, 먹거리, 그리고 어디서 잘지 고민할 일만 남았다. 잠수부처럼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지낸 일주일을 생각하면 지금이 차라리 나았다. - P244
이제 모든 일은 돌아올 수 없는 추락으로 이어졌다. 소년은 마음 가는 대로, 빠르다는 말보다 더 빠르게, 아스팔트의 미세한 돌기로 인한 충격이 두 팔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스쿠터를 몰았다. 시야 양편에 늘어선 벽들이 잿빛 띠처럼 보였고, 소년은 자신이 움직이는 하나의 점이 되어 버린 것 같은 패닉 상태를 한껏 누렸다. 스쿠터를 몰면서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흥분 지점을 찾아 끝없이 움직인다는 사실에 만족할 뿐 다른 생각은 없었다. 배 속에서, 가슴속에서, 몸의 모든 기관에서 소년은 엔진의 한계점을 재발견했다. 그의 의지마저 포물선을 그리며 변해 갔다. 그때부터 추락은 착각이 되었고, 사고는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앙토니는 달렸다. - P249
태양이 얼굴 정면을 강타했으나 하신은 앙토니의 각진 얼굴, 굳게 쥔 주먹, 총구를 틀림없이 알아보았다. 근처의 고층 아파트들이 초연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신은 문득 두려워져서 한 번만 봐 달라고 사정하거나 그대로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비겁함은 고통보다 더 큰 대가를 요구한다는 걸 하신은 아주 어려서부터 겪어 왔다. 누군가의 주먹을 피해 도망치는 건 눈물 겨운 피해자의 운명을 자처하는 셈이었다. 나중에 후회하느니 맞서는 편이 훨씬 나았다. 지난날 백 번도 넘게 곱씹은 이 교훈이 하신을 MAC 50 앞에 우뚝 서게 했다. - P252
"너희 여기서 뭐 해? 관광객이야, 뭐야?" "아무것도요. 그냥 좀 쉬었어요." 이윽고 시릴이 경영자로서 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것이 시릴의 비밀 병기였다. 다시 말해 그는 무슨 일을 정확히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개념도 없는 주제에 케케묵은 연설과 교훈을 늘어놓고 본인보다 돈을 덜 버는 이들의 업무 내용을 헐뜯으며 경영상의 무능함을 감추었다. 그것이야말로 사장인 그의 비극이자 그를 압박하는 요인이었다. 그것이 언젠가는 자신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리라는 걸 그도 알았다. 이번엔 도전과 개인 투자의 문제였다. 시릴에게 익숙한 소니아와 두 소년은 말없이 감내했다. - P261
지중해 반대편에서 두 남자를 기다리던 엄마가 아들을 가슴 깊이 끌어안았다. 어린아이도 아닌 데다 온 가족이 뚫어져라 바라보는 가운데 엄마 품에 안겨 있자니 하신은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하신은 그 자리에 모인 가족들이 생김새도 볼품없고 마치 무덤에서 나온 사람들처럼 먼지투성이라고 생각했다. 주름투성이의 얼굴, 옷매무새, 언뜻 튼튼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지푸라기 같은 체격, 하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들 특유의 시선. - P282
하신을 두고 게으르다, 어물거린다, 엉큼하다, 거짓말을 한다고 쉼 없이 잔소리를 퍼붓는 어머니의 질책도 감수해야 했다. 어머니는 동네 사람들이 하신에 대해 수군거릴 일을 생각하고 망신을 당할까 걱정했다. 내가 모든 사람을 엿 먹이는군, 소년은 생각했다. 너 때문에 망신스러워서 미치겠구나, 어머니가 누누이 말했다. 어머니는 아들을 패고 싶었지만, 아들은 이미 너무 커 버렸다. 하신은 몇 번이고 층계참에 몸을 숨기고 울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곳에 바다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푸른색, 남성적이지도 여성적이지도 않은 난폭함, 해변, 힘없이 움직이는 이파리들, 그의 얼굴 위로 이글거리던 대기. - P289
실망은 소년을 또 다른 종류의 열정으로 이끌었다. 삶에서 모든 것은 점점 작아지다가 결국 우리의 손을 벗어나 먼지가 되어 버리므로, 소년은 부자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금전적 이익만이 유일하게 죽음을 뒤로 미룰 수 있을 것 같았다. 끊임 없이 계속되는 삶의 손실 앞서 소년은 분노를 축적했다. 그러나 테투안에서는 돈을 벌 방법이 많지 않았다. 소년은 돈을 벌 수만 있다면 모든 걸 바치기로 했다. - P290
밖으로 나왔을 때는 풍경이 조금 전과 전혀 딴판이었다. 밤이 더욱 선명해졌고, 가로등 빛이 끝이 보이지 않는 평원으로 쪽빛 따뜻한 섬광을 점점이 뿌렸다. 빨갛고 노란 자동차 불빛들이 느릿느릿 움직였고, 간판의 초록색과 파란색 불빛들은 서리라도 맞은 듯 생생하고 차가워 보였다. 옥외 광고판에서 뿌옇고 흐리멍덩한 빛이 번졌다. 이토록 수많은 불빛 앞에서 인간의 운명이란 얼마나 불투명한지, 삶이란 얼마나 헛된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 P293
이제는 125를 몰 때 어떻게 하면 자신을 지울 수 있을까 고민했다. 앙토니는 매일 다른 경로를 선택했다. 길을 고를 때는 높이 뛰어오를 때나 자신이 좋아하는 까다로운 조작을 할 때 어떤 느낌일지, 이러저러한 변수에서 어떤 짜릿함이 전해질지 고심하며 여러 가능성들을 저울질했다. 어머니 집에서 수상 클럽까지, 학교에서 아버지 집까지 가는 경로는 매일 달라졌다. 르클레르에서 발전소까지 시내를 거치는 경로는 특히 수직과 직각이 주는 환희를 마음껏 누리게 해 주었다. 이 경로를 되풀이하면서 앙토니는 동작의 정확성, 아침의 유동성, 순수한 풀림을 겨냥했다. 물질과 공기 사이의 마찰은 사라지고 행복만 남았다. - P300
주말마다 집에 돌아온 바네사는 변함없는, 그러나 바네사 자신은 원하지 않는 생활을 유지하는 데 여념 없는 부모와 그들의 따사로운 염려, 너무나 뻔한 말들을 다시 맞닥뜨렸다. 누구에게나 취향은 있는 법이었다.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세상 모든 사람이 엔지니어가 될 수는 없다. 바네사는 부모를 가슴 깊이 사랑했지만, 생의 그 어떤 번뜩임도 치명적인 실패도 모르는 생활을 영위하는 부모를 보며 부끄러움과 고통을 동시에 느꼈다. 휴가 계획을 세우고, 집을 단장하고, 저녁마다 식사를 준비하고, 빗나가는 사춘기 아이가 조금씩 자립 하도록 관심을 기울이며 함께 있어 주고·····. 쉬지 않고 이어질 그 어중간한 일상이 요구하는 끈기라든가 겸허한 희생을 바네사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바네사는 그런 것들이 TV연예 프로와 즉석 복권, 아버지의 와이셔츠와 넥타이, 넉 달에 한 번씩 머리 색을 바꾸고 자신이 사기꾼으로 여기는 정신과 의사 대신에 점쟁이를 찾는 어머니의 습성만큼이나 작고 하찮으며, 늘 환기 없고 씁쓸하고 강압적이고 굉장히 꽉 막혔다고 보았다. - P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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