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우세요. 실컷 우세요. 참지 마세요. 무작정 울다 보면지쳐서 더 이상 울 수 없게 될 거예요. 눈물이 마를 때까지우세요." 그녀는 울고 또 울며 지냈고, 두 달이 지난 뒤 제가 물었습니다. "이제 좀 괜찮으세요?" "남편에게 미안해요. 이제 울지 않는 밤도 생겼어요." 그리고 한 달이 더 지났습니다. "선생님, 이상해요. 울지 않는 날이 더 많아졌어요." 또 한 해가 지나자, 그녀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근처 들판에서 심호흡할 수 있게 됐어요. 오랜만에 마음이 평온해졌습니다."
가까운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큰 슬픔에 휩싸이게 됩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슬픔의 빛깔은 서서히변해갑니다. 그런 것을 상상하기만 해도 ‘망각‘에 대한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너무 냉정한 건 아닐까?‘ ‘그 사람을 잊고 웃고 있다니‘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잊는 것이 아닙니다. 소중한 사람이 내안에 깊이 뿌리내려 애써 떠올리지 않아도 될 만큼 나의일부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건 할머니 인생의 졸업장이야. 이제 할머니는 받으실 수 없으니, 네가 가족 대표로 받아줄래?" "이게 할머니의 졸업장이에요?" "그래. 할머니는 너와 행복하게 살다가 이제 천국으로가셨어. 하지만 너와 할머니의 추억은 영원히 사라지지않아." 유스케는 가슴을 펴고, 진지한 얼굴로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며 받아 들었습니다.
"7,000미터까지 올라가면 몸 안의 90조 개 세포가 한순간에 변화합니다. 생존에 필요한 기능에 체내 에너지가집중되죠. 그러면 그때까지 들리던 모든 소리가 사라지는느낌이 듭니다." 오직 자신만 존재하는 또 다른 차원의 세계, ‘제로 지점‘. 누군가는 이를 ‘데스존(죽음의 지대)‘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제로 지점을 넘어서자 불안이 사라지고 모든 것을 신뢰할 수 있는 충만한 마음에 휩싸였습니다. 혼자였지만아무것도 두렵지 않았고 그저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과거도 미래도 없이 오직 지금만이 존재하는 영원한 시간. 모든 것을 신뢰할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감이느껴졌습니다." 극한 상황에서 우리 몸은 연수(뇌) 등 생존에 최소한으로 필요한 장기에 산소를 우선 공급합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번뇌와 욕망이 깎여 나가고, 마지막으로 남는것이 바로 신뢰감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건강할 때 휘파람 불며 해야 해." 그 말이 유독 인상 깊었습니다.
"오늘도 좋은 날이다. 내일도 긍정적으로 나아가자." 얼마나 멋진 인생이었을까요.
조금 다른 형태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생각해 봅니다. 저는 임종 돌봄을 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 살아 있는 생명을 지탱하는 일입니다. 무언가를 끝내거나정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목표는 죽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을 위해 오늘 무엇을 할지 고민하는 것이아니라 오늘을 잘 살면 내일을 더 깊이 살 수 있습니다. 그런 준비를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물건을 쌓아두는 버릇이 있어 남편이 이따금 "옷을 다 버리면 어때?"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면 또옷을 살 수 있잖아"라면서 말입니다. 엉뚱하게 들리지만인생의 본질을 꿰뚫는 말입니다. 종활 역시 죽기 위한 준비가 아니라,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만들기 위한 과정이라 생각한다면 훨씬 긍정적인이 됩니다. 그 결과 내일은 더 충실해질 것입니다. 그렇게쌓인 하루하루를 훗날 돌아본다면 주저 없이 "좋은 인생이었다"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지하철에 타면 젊은이들은 대개 이어폰을 끼고 있습니다. 어떤 음악을 듣는지 궁금해 학생들에게 "죽을 때 어떤 곡을 듣고 싶나요?"라는 과제를 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르겠다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좋아서 듣는다기보다 타인과의 관계를 끊기 위해 이어폰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죽음을 재촉하거나 그 생각에만매몰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에리히 프롬이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에서 말한대로 ‘불멸의 착각‘에서벗어나, 해야 할 사소한 일들을 미루지 않고 방만하지 않게 살아가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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