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뒷것이야. 너희들은 앞것이고" ‘아침이슬‘을 쓰고 부른 김민기가 했다는 그 말에 아침부터 울컥했다. 드라마에 영화, 예능, 다큐멘터리까지 하도 많이 봐서 웬만한 것으로는 큰 감흥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단련되어 있다고 자부했는데 다큐멘터리 한 편이그 자부의 단단함을 뚫어버렸다. 제목부터 어딘가 심상찮았다.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오래도록 대학로를지켜오며 무수한 예술인들의 ‘텃밭‘이 되어 줬던 학(學田)과 그걸 일궈온 김민기에 대한 다큐멘터리였는데, ‘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드라마 「눈이 부시게」에 나온 이 대사처럼 어느 날 돌아보면 문득 깨닫게 되는 삶의 눈부심이 있다. 늘 우리 곁있었지만 별거 아닌 것처럼 지나쳐 저 뒤편에 놓아두었던 눈부신 것들이 있었다. 세상에는 사실 곁에 있지만그 존재가 드러나지 않아 뒤에 서게 되는 것들이 참 많다. 그것들이 뒷것이 되는 건 누군가 그걸 바라봐 주고 곁을내주지 않아서가 아닐까. 솔직히 말하면 나는 김민기처럼 기꺼이 뒷것으로 살아갈 용기는 없다. 그건 조용하게세상을 바꾸는 위대한 분들의 삶이다. 대신 앞도 뒤도 아닌 곁이 되고 싶다. 세상에 주목받지 못하는 것들의 가치를 알아주고 그걸 누군가와 함께 느끼는 곁에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 책이 그랬으면 좋겠다. 지친 하루에 잠시숨 쉴 곁을 내주는.
"좋아요. 허면....... 오랑캐에게 욕을 당한 길채는?" "안아줘야지. 괴로웠을 테니."
뚱한 핑계가 그렇다. "아우 얘, 맨발로 괜찮니? 왜 하필 니트를 입었어? 젖으면 무거울 텐데. 물이 너무 차다. 그치춥다. 우리 봄에 죽자 응? 봄에" 할머니 역시 소녀와 똑같이 절망 앞에서 생을 접으려 했지만, 소녀를 만나게 되면서 그럴듯한 구실과 변명을 찾아낸 거였다. 이 추운데 맨발에 니트를 입고 들어온 소녀가 그 변명거리가 되어 주었고 그래서 그들은 함께 살아나왔다.
핑계는 우리의 삶이 결국은 예정된 죽음을 향해 가고있다는 허무함을 이겨내는 지혜이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는 물에 젖은 옷이 너무 무거워서 또 물이 너무 차서, 같은 핑계들로 죽음을 뒤로 미루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있는지도 모른다. 철학자들은 그래서 "왜 사는가?"의 질문은 답하기가 어렵지만, "왜 죽지 않는가?"에 대한 질문은 답하기가 의외로 쉽다고 말한다. 죽을 수 없는 다양한이유들(혹은 핑계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내가죽으면 강아지 밥은 누가 챙겨주지" 같은 핑계도 이유가되니 말이다. 절망은 마치 깊이 빠져드는 물과 같아서 그물이 발목을 적셔올 때 이를 직시하고 마주하는 건 현명한 방법이 아니다. 그보다는 아주 일상적인 핑계와 변명을 찾아내고 그 물가로부터 멀어짐으로써 절망을 유예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
커피라는 게 결국 그 맛을 들이면 매일 찾는 분들이 계시거든요. 근데 찾는 이유가 카페인 때문만은 아니에요. 카페가 주는 편안함 때문이기도 하죠. 주인과 나누는 일상적인 대화가 손님들을 계속오게 하는 노하우인데 거기에서 필요한 건 ‘적당한 무관심‘이에요." 적당한 무관심. 그 말에 방점이 찍혔다. 처음에는 그도 그저 친절하게만 대하고 커피가 맛있으면 된다고만생각했다고 한다.
왜 갑자기 용상이와 동휘가 떠올랐던 걸까. 공연이 끝나고 나오면서 나는 숨은그림찾기처럼 꼭꼭 숨겨져 있던「레미제라블을 찾은 것처럼 용상이와 동휘를 생각했다. TV와 영화를 보고 글을 쓰며 살고 있는 지금의 내가 그냥그렇게 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용상이와 함께 봤던 TV와 동휘와 함께 서울 거리를 활보하며 찾아가 봤던영화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곁에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내게 곁을 내준 그 친구들이 너무나 따뜻한 기억으로 새록새록 피어났다. 홀로 덩그러니 던져져뿌리가 사라진 것처럼 세상을 저주했던 장 발장의 마음은 곁을 내주고 손길을 내밀어 준 미리엘 주교 앞에서 얼마나 따뜻해졌을까.
"내 인생은 모래밭 위 사과나무 같았다. 파도는 쉬지도 않고 달려드는데 발밑에 움켜쥘 흙도 팔을 뻗어 기댈나무 한 그루가 없었다. 이제 내 옆에 사람들이 돋아나고그들과 뿌리를 섞었을 뿐인데 이토록 발밑이 단단해지다니. 이제야 곁에서 항상 꿈틀댔을 바닷바람, 모래알..... 그리고 눈물 나게 예쁜 하늘이 보였다."
"지금은 좋지만 살다 보면 또 고비가 올 거 아니야. 그럼 그 달콤했던 기억들을유리병에서 사탕 꺼내 먹는 것처럼하나씩 까먹으면서 힘들고 쓴 시간을 견디는 거지. 그러니까 우린 좋을 때그걸 잔뜩 모아둬야 하는 거라고………. 나 이제 주식이랑 지분 모으는 것보다행복한 기억들을 모으는 데 더 집중해 볼 거야. 나한테는 이제 그 유리병을 채우는 일이 제일 중요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