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든 작든 어떤 윤리적 딜레마에 봉착할 때마다 자신에게 묻도록 우리 삶의 총체적 난국을 다음 네 가지 질문으로 요약하고자 한다.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왜 그렇게 하는 것일까?

더 잘할 수는 없을까?

그것은 왜 더 나은 행동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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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든다. 하지만 그런 예감을 나는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어떤 아름다움은 소유될 수 없는 것이니까. 어떤 아름다움은 소유하지 않아 존재하는 것이니까.

놀이도 순진무구함도 필요하고
꽃들도 흐드러지게 피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세상은 우리에게 너무 작을지 몰라
그리고 사는 낙도 없겠지.
—헤르만 헤세

어째서 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죄다 하찮고 세상의 눈으로 보면 쓸모없는 것들뿐인 걸까. 하지만 이제 나는 쓸모없는 것들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촘촘한 결로 세분되는 행복의 감각들을 기억하며 살고 싶다. 결국은 그런 것들이 우리를 살게 할 것이므로.

혼자 밥 먹는 날엔 가능한 한 육류를 섭취하지 않기, 치즈를 끊을 수는 없으니까 다른 때라도 유제품을 덜 섭취하기, 난방을 줄이고 물건을 사기 전에 대체할 수 있는 것들을 찾기, 용도를 다하기 전엔 가급적 이미 가지고 있는 물건과 비슷한 물건을 사지 않기… 여전히 매일 많은 쓰레기를 배출하며 살고 있고, 나라는 존재가 이 지구에 유해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래도 나는 나의 선택들이 이 세상에 조금이나마 덜 해를 끼치길 바라는 마음으로 아주 작은 것이라도 실천하려 노력하고 있다. 예전에는 이런 일을 공개적으로 쓰는 것이 매우 부끄러웠다. 나의 실천은 모두 하찮은 것이고—나는 여전히 육식을 포기하지 못했고, 비행기를 타야 하는 여행 역시 포기할 수 없다. 마감이 급할 때면 플라스틱 용기에 담겨 올 걸 알면서도 음식을 배달시킨다

내 삶의 태도는 ‘완벽’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완벽이란 말은 얼마나 폭력적인지.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게으름의 면죄부가 되어선 안 되겠지만 완벽한 것만 의미가 있다는 생각은 결국 그 누구도 행동할 수 없게 만드는 나쁜 속삭임이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완벽할 수는 없으니까. 인간은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존재들이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팔짱 끼고 앉아 ‘당신은 이런저런 잘못을 저질렀으니, 당신의 행동들은 결국 무의미해’라고 먼 곳에서 지적만 하는 건 언제나 너무도 쉽다.

내 마음은 언제나, 사람들이 여러가지 면과 선으로 이루어진 존재들이고 매일매일 흔들린다는 걸 아는 사람들 쪽으로 흐른다. 나는 우리가 어딘가로 향해 나아갈 때, 우리의 궤적은 일정한 보폭으로 이루어진 단호한 행진의 걸음이 아니라 앞으로 갔다 멈추고 심지어 때로는 뒤로 가기도 하는 춤의 스텝을 닮아 있을 수밖에 없다고 믿고 있다.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만 아주 천천히 나아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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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사람들이 문지방 앞의 전투에서 실패함으로써 그 한 발짝을 넘어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지 못하고 이땅을 떠나는 것이 현실이다. 독일의 영성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말한 ‘돌파’, 즉 ‘브레이크스루’(Breakthrough)가 그 문지방을 통과했을 때, 이뤄지기 마련이다. 그러니 문지방에서 가장치열한 영적 전투가 벌어지는 것이다.

문지방을 넘기란 쉽지 않지만 반드시 그 문지방을 넘어야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며 새로운 생명, 즉 뉴 라이프(New Life)가탄생된다. 영정 속 이어령에게 "박사님, 정말 그 문지방을 넘어가셨나요?"라고 여쭤보았다. 한 개인의 영적 여정은 누구도 판단할 수 없고, 함부로 말할 수 없다. 오직 그분만이 알 것이다.

물론 소원, 즉 사모함은 중요합니다. ‘사모함이 재산‘이라는 생각을 늘 했습니다. 사모함, 갈망을 통해서 인간은 다른 세상으로 들어갈 수 있으니까요. 저와 오랜세월을 함께 한 소설가 김승옥(‘무진기행‘ 작가)씨가 하나님을 믿게 된 이후에 이렇게 고백했어요.
"내가 목숨 바쳐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알고 나니까마음이 그렇게 편안해질 수가 없었다. 목표가 있는 자는 준비를 하게 되고 따라서 부지런해진다."
‘목숨 바쳐 가야 할 길‘을 아는 자는 정말 행복한 사람 아닙니까? 저도 지성과 지상에서의 목표가 아니라영성과 영원의 차원에서 목숨 바쳐 가야 할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이런 치열한 과정을 거치다 보면 마침내 자신이 들어가야 할 문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드디어 자신이 머무를 방을 찾게 된 사람에게 필요한 덕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존중입니다. 현관 마루에서 함께 있다 자기와는 달리 다른 방을 선택한 사람도 있고, 여전히 현관 마루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들의 판단과 결정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바른 결정을 내리지 못해 엉뚱한 방에서 허우적거리거나, 혹은 현관 마루에서 한 발짝도 떼지 못한다고 판단될 때, 여러분이 할 일은 하나입니다. 그들을위해 기도하며 하나님의 빛이 그들에게도 비치기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결코 인간적 잣대로 그들을 판단하는우를 범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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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곡>에서 ‘지옥inferno (인페르노)‘은 9개의 원으로 이루어져 제1원은 넓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좁아지는 마치 팽이 같은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지옥의 심층부로 내려갈수록 죄는 깊어지고 커집니다. 반대로올라갈수록 죄는 가벼워집니다. 지옥의 구조는 단테의 여행에서 매우 중요한데, 오르기 전에 먼저 내려가야 한다는 진리를 배우게 됩니다.다시 말해 지옥으로의 하강은 신神을 향해 상승하기 위한 훈련입니다.
‘내려감‘은 절대자를 향한 길이며 회개의 걸음입니다. 내려가야만 다시올라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신의 공의와 사랑의 균형을 지옥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플라톤에 따르면 인간의 영혼은 원래 이데아의 세계에 거주하며 살았습니다. 그 영혼들은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이데아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자기 안에 지니고 있었어요. 그러나 영혼이 육체와 결합하여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감각에 의해 획득되는 정보에 의해 영혼은 오염되기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데아의 세계에 대한 지식을 잃어버리게 되었죠.그래서 인간은 동굴 속에 갇혀 쇠사슬에 묶인 채로 동굴의 벽에 비친 그림자를 ‘실재‘로 착각하며 살아가게 되었어요. 이것이 플라톤의 생각입니다.
플라톤의 인간은 내부에 이데아의 세계에 관한 정보를 이미 지니고 있기에, 감각적 정보에서 벗어나는 능력을 길러 영혼 속에 든 이데아의 세계를 회상해 내게 되면 진정한 진리를 얻을 수 있지요. 이것을 일명 상기설(想起說)이라고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관념론자인 스승에 대비되는 자연주의적인 철학자로, 현실적, 경험적인 면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사물의 본질이 개개의사물과 분리되어 이데아의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개 사물 속에 내재되어 있다는 실재론 주장했어요. 모든 사물은 지니고 있는 목적(형상)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변화해 가는 존재로 보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성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오랫동안 도덕적 습관을 훈련시키고 이성적 능력을 계발시켜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것입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교육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동양에선 가위바위보를 합니다. 가위바위보의 동양은 니체의원회귀‘와 인도의 윤회 ‘처럼 순환하죠.
가위바위보는 확률적으로도 우연성을 바탕으로 한 겨루기여서 절대 승자는 없고 승부가 거의 균등하다고 합니다. 삼항 순환인 것이죠이 삼항 순환을 이야기하자면 피시스 Physis, 노모스 Nomos, 세미오시스 Semiosis를 이야기 안 할 수 없네요. 각각을 자연계, 법칙계, 기호계라고 설명할 수있어요.

피시스는 자연법칙입니다. 세계 어디든 물은 0도에서 얼고 100도에서 끓지요. 그러나 법률이나 제도의 노모스는 국가와 시대에 따라 다르고 바뀝니다. 피시스와 노모스 중간에 있는 세미오시스는 언어와 같이 하룻밤 사이에 바뀌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영구불변의 자연법칙도 아닙니다. 세미오시스는 상상력의 세계, 예술의 세계를 뜻해요.

피시스의 관점에서 보면 중국은 대륙, 일본은 섬, 한국은 반도의 나라입니다. 대륙(중국)은 개체를 초월하는 생명력을 갖고 세계를 감싸 안는다는점에서 가위바위보의 ‘보‘에 가깝죠.
일본은 무사가 지배하는 나라여서 주먹은 힘을 상징합니다. ‘바위‘와 비교할 수 있어요. 대륙과 비교해 여유보다는 긴장, 확대보다는 축소지향인것이죠.

한반도의 ‘가위‘가 있어야 비로소 다이내믹한 순환운동이 일어납니다. 바위도 섬도 아닌, 또는 대륙이기도 하고 바다의 섬이기도 한 독특한 다양성과 통합성이 ‘반도 문화‘를 이루었다고 봐요.
가위가 정상적으로 움직이면 동아시아는 선형적인 이항대립의 시스템에서 벗어나 원형적인 순환과 생성의 시스템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비유로 이야기하자면, 대립하는 물과 불 사이에 가마솥이 있으면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어요. 한국이 가마솥 역할을 수행하던 시기에는 동아시아에평화가 찾아오고 아름다운 문화의 꽃이 피어났죠 가위가 제 역할을 못하면 동북아는 불행했어요.
현재 북한은 중국의 대륙문화의 연장선상에 있어 대륙의 나라로 변했고,남한은 인공적인 섬나라가 되어 해양 문화의 영역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한반도 분단은 한민족의 비극을 넘어 동북아시아 전체의 비극이기도 합니다.

콧물도 나면서 배도 아픈 병이 어떤 병인지 나는 의사가 아니라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선입견 때문에 3초를 더 듣지 않아서 의사는 환자의 증상하나를 놓치고 오진을 하게 되는 겁니다. 이게 패러독스, 아이러니예요재미난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요. 평생 동안 영화를 딱 몇 편밖에 보지 못한 시골 사람이 영화관 간 거예요.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사자가 나와서 울부짖는 것 같은 MGM 영화사의 로고 영상, 그러니까 그 영화 제작사의 상표가 나오니까 이 시골 사람이 이렇게 말하더래요
"어, 이거 나 본 영환데."하고는 영화관에서 나와 버렸다는 이야기예요

전에도 MGM 영화사에서만든 영화를 보고 동일한 영상을 본 적이 있는 모양이지요. 이 이야기에사람들은 웃겠지만, 사실 대부분의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이 이와 같습니다. 물건을 보지 않고 상표만 보고 어떤 물건을 구매할 때가 있어요그런 사람들이 있으니 가짜 물건에 상표만 붙여놓고 파는 사람들도 있어요

어니스트 헤밍웨이 Ermest Hemingway (1899~1961)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간이바로 스테레오타입 Stereotype의 고정관념에 빠진 경직되고 정형화된 인물입니다. 의미를 추론할 줄 모르는 무지몽매한 인간이죠. 소설에 등장하는 인간은 신을 부르기는 하지만 신의 도움에 의존하거나 기대지 않습니다. 세상에 버려진 미아迷兒 같은 존재들입니다.

노인과 바다》에서 산티아고 노인은 거대한 마를린치과의 물고기)과 24시간의 사투 후에 "나는 신앙심이 없어. 성모 마리아보다는 우리하나님 아버지가 말하기에 더 수월하지"라고 생각하면서 그냥 기계적으로 하늘에 도움을 청할 뿐입니다. 48시간 후에 그는 "이제 저놈이 너무나멋있게 저에게 다가옵니다. 하나님, 제가 저놈과의 싸움을 해낼 수 있도록도와주십시오. 나중에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백 번이나 부르겠으며 성모마리아님도 백 번이나 부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싸움 중이라서) 말할수 없습니다. (..…) 나중에 말하겠습니다"라고 합니다. ‘
이것은 신의 능력을 믿지 않는 자의 말투죠 노인은 무엇이 자신을 패배하게 했는가를 자문한 후 "아무것도 없어 ・・・ . 내가 너무 멀리 갔었어"

일종의 인지부조화이자 자기합리화입니다. 먹을 수 없는 포도에 대해, "저 포도는 신 포도일 거야"라고 체념하며 합리화하는 식이죠헤밍웨이에게 인간은 패배할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알면서 회피하지 않고 대결하는 인물입니다. 상어와의 무망無望한 대결을 그저 감내하고 외롭게 싸울 뿐입니다. 그래서 비극적입니다. 정말 신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리는 심정으로 간절하게 싸웠다면, 버텼다면 자신에게 닥친 비극은 반전되지 않았을까요? 고통을 그저 되새김질하는 것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에서 말이죠. 세계적으로 가장 공명이 잘 되는 명품 바이올린은 ‘무릎 꿇은 나무‘로 만든 악기라고 합니다. 이 나무는 로키산맥의 해발 3000m 높이의 수목 한계선인 지대에서 자라는데 눈보라가 얼마나 심한지 생존을위해 무릎 꿇고 사는 삶을 배웠다고 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반전인가요?

무릎 꿇은 나무‘를 생각하니 정호승 시인의 <나무에 대하여>라는 시가떠오릅니다. 시인은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가 더 아름답고 더 사랑스러우며 함박눈도 더 많이 쌓인다고 말합니다. 고통의 무게를 견딜 줄 알기에 굽은 나무는 그림자가 구부러지는 것도 싫어하지 않아요 눈에 보이는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세속적인 편견,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그 너머에존재하는 실체와 마주하고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밤길 홀로 걸을 때에도 그림자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하고, 홀로 잠잘 때에도이불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獨行不愧影 獨寢不愧衾.
남이 보든 안 보든 스스로 삼간다는 이 신독 • 신기독, ‘나와 하늘‘이서로 연결돼 있음을 뜻합니다.
‘나(개인)와 사회‘, 다시 말해 ‘사회 법률 제도‘가 나와 연결된 것이 아니라 ‘나와 하늘‘이 직접 연결돼 있습니다. ‘나와 하늘‘이 주고받는 것이지 중간에 ‘사회와 법률‘이 개입할 순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손가락질을 받아도 법을 어겨 혹독한 처벌을 받아도 ‘나와 하늘‘ 앞에 떳떳한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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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반세기 동안은 이성의 각성으로 잠시 억눌러져 있었을 뿐이다. 어떤 계기이든이성의 갑옷이 스르르 벗겨지는 날에는 그 본능이 꿈틀대며불쑥 올라온다. 그래서 이런 부족 본능이 제일 좋아하는 것은 방심이며 가장 사랑하는 것은 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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