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은 점점 환해졌다. 무뚝뚝하고 근엄한 표정을 한 레모니 선장은 호박 묵주를 꺼내 알을 세어 가며 기도를 드렸다. 나는 그쪽을 보지도 듣지도 않으려고 애쓰면서 사라져 가는 친구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떠올리려고 했다. 그 친구가 나를 책벌레라고 불렀을 때 불쑥 치밀던 분노의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그 순간 내가 살아온 인생이 그 한마디 말로 집약된 것에 몹시 화를 내지 않았던가? 인생을 그토록 사랑하던 내가 어찌하여 책 나부랭이와 잉크로 더럽혀진 종이에 그렇게 오랫동안 처박혀 있었단 말인가!

그 이별의 날에 나를 들여다볼 기회를 친구가 준 셈이었다. 속이 시원했다. 병명을 알았으니 정복할 수 있을 것이다. 애매한 것도, 비물질적인 대상도 아니고 이름과 형태를 알았으니 싸움이 훨씬 쉬워진 셈이었다. 그의 표정이 내 안에 조용한 혁명을 일으켰다. 나는 내 원고 나부랭이를 내팽개치고 행동하는 삶으로 뛰어들 이유를 찾았다. 나는 이 새로운 인생에 책 부스러기 따위는 끼워 넣고 싶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당신은 거기 앉아 묻기만 하네그려. 지랄병이 도졌다니까 그러네. 젊은 양반, 물레방앗간 집 마누라 이야기 아시지요? 물레방앗간 집 마누라 궁둥이를 보고 철자법을 배우겠다는 생각은 당신도 안 하잖소? 물레방앗간 집 마누라 궁둥이, 인간의 이성이란 게 그런 거지 뭐."

. 산투르를 연주하게 될 줄 알면서부터 나는 전혀 딴사람이 되었어요. 기분이 안 좋거나 돈이 한 푼도 없을 때에는 산투르를 켭니다. 그러면 기운이 생기지요. 내가 산투르를 켤 때 당신이 말을 거는 건 상관없습니다만 나는 들리지 않아요. 들린다 해도 대답은 못해요. 말을 듣거나 대답을 하려고 해도 안 되는 거요."
"그건 왜요?"
"그걸 모른단 말이오? 그게 바로 정열이라는 거요."

문이 열렸다. 바닷소리가 카페 안으로 다시 쏟아져 들어왔다. 손발이 얼고 있었다. 나는 외투로 몸을 감싸고 구석으로 깊이 몸을 웅크렸다. 그 순간의 행복을 음미했다.
‘어디로 간담? 여기선 그럭저럭 지내긴 좋은데. 이 행복이 오래 계속되면 좋으련만.’

언어, 예술, 사랑, 순수, 정열의 의미가 막노동꾼의 입에서 나온 가장 단순한 언어로 내게 전달되었다. 나는 그의 손을 쳐다보았다. 곡괭이를 쥘 수도 있고 산투르를 다룰 수도 있는 손은 굳은살이 박여 터지고 일그러진 데다 힘줄이 솟아나 있었다. 그는 마치 여자 옷이라도 벗기는 것처럼 다정하고 조심스럽게 보따리를 끌러 세월이 묻어 있는 산투르를 꺼냈다. 산투르에는 여러 개의 줄이 달렸는데 줄 끝에는 놋쇠, 상아, 붉은 비단으로 된 술 장식이 매달려 있었다. 그는 큰 손으로 마치 여자를 애무하듯 조심스럽고 정열적으로 쓰다듬고는 줄을 골랐다. 그러다가 큼직한 손으로 사랑하는 여자가 감기라도 걸릴세라 옷을 입히듯 산투르를 다시 보자기로 쌌다.

하지만 산투르 말인데, 그건 좀 다른 문제요. 산투르는 짐승이오. 짐승에게는 자유가 있어야 하지요. 제임베키코,5 하시피코,6 펜토잘리7도 출 수 있죠. 그렇지만 처음부터 분명히 말해 두겠소. 마음이 내켜야 하오. 이점은 확실하게 해 둡시다. 만일 당신이 나한테 연주를 강요하면 그땐 끝장이오. 결국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 말이오."
"인간이라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자유라는 거요."

진흙 덩어리가 동그랗게 되면서 마치 당신의 말을 알아듣는 것 같지요. ‘항아리를 만들어야지, 접시를 만들어야 해. 아니 램프를 만들까, 뭐든 만들어야지.’ 사람이라는 건 이런 게 아니겠소? 자유 말이오."."

그는 바다도 잊고 레몬을 씹는 것도 잊었다. 눈빛이 다시 빛났다.
"그래서요? 당신 손가락은요?"
"아, 그게 돌림판을 돌리는데 자꾸 거치적거리더란 말이오. 이게 끼어들어 내가 만들려던 걸 망쳐 놓더란 말이지요. 그래서 어느 날 손도끼를 들고 그만……."
"아프지 않았어요?"
"무슨 말이 그렇소? 내가 목석인 줄 아시오? 나도 사람이오. 물론 아팠지요. 하지만 이게 자꾸 거치적거리니 자를 수밖에요

그땐 내가 혈기왕성할 때였지요. ‘왜’ 같은 걸 생각해 볼 여유가 없었거든요. 사물을 제대로 보고 생각하려면 나이를 먹어야 해요. 이도 좀 빠지고. 이가 하나도 없는 늙은이라면 ‘얘들아, 물면 안 돼. 못 쓴단다’ 하고 소리치기 쉽지요. 하지만 이 서른두 개가 멀쩡하다면……. 젊을 때는 사람이라고 볼 수 없어요. 사람을 잡아먹는 야수 같지요."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젊은것들은 양도 먹고 돼지도 먹고 닭도 먹지요. 하지만 사람을 처먹지 않으면 양이 안 차는 모양입니다."
그는 커피 잔에다 담배를 비벼 끄며 한마디 더 보탰다.

"
"보스, 그곳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어요. 참 웃기는 기적 말입니다. 우리는 독립군이 되어 사기 치고, 훔치고, 죽이는 짓들을 했는데, 그 때문에 게오르기오스 왕자가 크레타로 왔답니다. 그리고 자유가 찾아왔어요!"
그는 놀랍다는 듯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보았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굉장히 신비로운 일이란 말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자유를 원한다면 살인을 저지르고 사기를 쳐야 한다는 얘기 아니겠어요? 정말이지 내가 죽이고 사기 친 이야기를 다 한다면 머리끝이 쭈뼛거릴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형편없이 굴었는데도 자유가 오다니! 하느님이 벼락을 내리는 대신에 자유를 주시다니! 나는 이해가 안됩니다

어느날 내가 조그만 마을로 갔을 때의 일이에요. 아흔이 넘은 것 같은 할아버지 한 분이 바쁘게 아몬드 나무를 심고 있더구먼요. 그래서 내가 ‘할아버지, 아몬드 나무를 심고 계시네요?’ 하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오냐, 나는 죽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거든’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이렇게 대답했어요. ‘저는 제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요.’ 자, 누구 얘기가 맞다고 생각하십니까, 보스?"
그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때요, 이 말에는 꼼짝 못하겠지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똑같이 험하고 가파른 두 갈래 갈림길이 같은 봉우리에 닿을 수도 있었다.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사는 거나, 매 순간 죽음을 의식하며 사는 건 어쩌면 같은 일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왔지만 조르바가 물었을 때는 대답하지 못했다.

"보스, 인부들 신상을 자꾸 물어보고 다니지 마세요. 잘해 주면 발목 잡히기 십상이에요. 보스가 그렇게 다독거리는 게 인부들이나 일에도 방해가 된다고요. 모두가 핑계를 만들어 주는 일이에요. 그렇게 되면, 젠장, 인부들은 일을 제멋대로 하다가 결국 망쳐 버린답니다. 인부들을 보살펴 주는 일은 하느님이 하고 계신다오. 보스가 세게 나와야 인부들도 보스를 존경하고 일도 잘해요. 보스가 물렁하면? 인부들은 일을 몽땅 보스에게 미뤄 두고 나 몰라라 한단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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