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함에 대하여 - 홍세화 사회비평에세이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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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동 집회가 부럽더라. 왜 노동자들이 죽는 문제로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촛불을 들고 나오지 못할까. 우리도 어떻게 하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싶었다. 어쩌면 더 심각한 문제이지 않나. 한 해에 몇천 명의 노동자들이 일하다가 죽는 거니까. 그리고 그게 매년 반복되니까. 만일 노동자가 죽는 일로 그만큼 사람들이 모이면 분명 사회가 달라질 것 같은데 말이다."(〈오마이뉴스)권두섭 민주노총 법률원 대표변호사의 안타까운 술회가 내가슴을 적신다. 산재 사망자가 단 한 사람이라도 줄어들도록 단한 사람이라도 더 "우리가 김용균이다!"라고 외칠 수 있기 바란다.

오만함도 층위가 있다. 조금이라도 겸연쩍어할 줄 아는 오만함이 있는가 하면, 오랫동안 내면의 절제나 외부의 견제가 작동하지 않아 공격성까지 띠는, 뻔뻔한 오만함도 있다. 가령 세월호 참사 초기에 ‘악어의 눈물이라도 흘렸던 박근혜 대통령도두 차례의 선거 이후에 언제 그랬느냐는 모습으로 바뀌지 않았던가.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독재로 치닫는다. 그렇다면 삼성 엑스파일 사건과 불법·탈법적 유산 상속을 비롯하여 온갖 작태가『삼성을 생각한다』에서 드러났음에도 어떤 대가도 치르지 않았던 삼성의 오만함은 어느 층위에 있을까? 외롭고 어려운 싸움을벌이는 반올림에 우리가 연대해야 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신문은 사회의 거울이라고 했던가. 매일 한겨레〉〈르몽드〉를 읽으면서, 이 땅의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에 대해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움과 함께 분노와 슬픔을 느낀다. 한나라에서는 청춘들이 거리로 나와 "일보다는 사랑을 하자"고 외치는 반면, 다른 한 나라에서는 수학여행을 가다가 한꺼번에 수장되고 일하다가 직업병으로 죽어도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큰소리를 친다. 적반하장도 유분수라 했거늘…. 청춘들이거리에 쏟아져 나오지 않기 때문인가.

"광신자들이 열성을 부리는 것도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지혜로운 사람들이 열성을 보이지 않는 것 또한 수치스러운 일이다. 신중해야 하지만 소극적이어선 안 된다."
볼테르는 광신자가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들에게 이 말을던졌다. 애당초 광신자들에게서는 수치심을 기대할 수 없고, 수치심을 느낄 줄 모른다면 지혜로운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글은 "개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동성애를 반대한다"고 공언하는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아니라 정의와 공정의 촛불 정권을 자임한 집권 세력을 향한 것이다.

내가 ‘적극적인 앨라이 (Ally, 성소수자들LGBTQ이 겪는 차별에반대하고 평등 사회를 위해 연대하는 사람)‘가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이 땅에 만연한 무지와 편견, 차별과 배제에 시달리는 성소수자에게 동시대인으로서 미안함이 앞서기 때문이다. 또한 ‘한 사람이라도 자유롭지 못한 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선한 사람의 무관심이 악을 키운다"는 18세기 영국의 보수주의 정치가 에드먼드 버크의말을 내 가슴에 새기고 있기 때문이다.
무릇 잘못된 언행을 비난할 수는 있지만, 존재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마땅한 기독교인을 비롯하여, 인간의 사랑을 음란‘으로 덧칠하면서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야말로 적반하장이다.

여기서 수오지심(羞惡之心)과 측은지심(側隱之心)을 인간의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꼽은 맹자의 말을 강조하려는 것은 아니다. 또 한 인디언 부족의 기도문("오, 위대한 영이여! 내가 상대방의 모카신을 신고 1마일을 걷기 전에는 상대방을 판단하지 않도록 지켜주소서")에 담긴 역지사지(易地思之)를 본받아 예멘인들의 자리에서 생각해보라고 설득하려는 것도 아니다. 부부 간에도 서로 설득되지 않아서 다른 생각을 가진 채로 평생 살아가는데, 남을 설득하는 일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다만 함께 나누고 싶은 질문이 있다. "만나보지도 겪어보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혐오감정을 가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그것이다. 내가 시대 변화에 둔감한 순진한 로맨티시스트여서일까. "알지 못한 채 사랑한다"는 말은 어렴풋이나마 이해되는 반면, "알지 못한 채 혐오한다"는 말은 잘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스스로 인종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주 드물다. 다만 인종주의적 언행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이다. 나와 다른인종, 종교, 문화를 가진 대상을 차별·배제 억압하고, 마침내는혐오의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순서일 듯싶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과정이 생략된 채 바로 혐오하는 것일까. 기억력이 나쁘지 않은 사람이라면 3년 전에 세 살짜리 시리아 어린이 알란 쿠르디가 터키 해변에 시신으로 떠밀려온 사진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때 품었던 측은지심은, 가령 그의 아버지나 아저씨가 제주도 난민으로 들어왔을 때는 혐오감정으로 돌변하는 것인가. 아니면 화면으로 만나는 것과 직접 대면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인가. 마치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바리케이드의 소년 가브로슈에겐 환호하지만 거리에서 만나는 불량(이라고 규정된) 소년들은혐오하는 것처럼.

혐오.
우리는 우리 각자의 눈으로 사물과 현상을 본다. 예멘 출신 난민을 향한 혐오감정은 그들에게 투사된 우리 자신의 모습인 것이다. 거기에 담겨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한편에는 ‘지디피(GDP) 인종주의‘가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 지적했듯이,
백인과 결합한 가족은 ‘글로벌 가족’, 비백인과 결합한 가족은
‘다문화 가정‘이라고 부르게 하는 것이 바로 지디피 인종주의다.
한국의 현대사 속에서 교묘히 결합한 물신주의와 인종주의는지디피 인종주의로 발전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보다 지디피가 높은 나라 사람들에겐 받는 것 없이 올려다보고 지디피가 낮
은 사람들에게는 주는 것 없이 내려다 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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