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 열린책들 파트리크 쥐스킨트 리뉴얼 시리즈
파트리크 쥐스킨트 저자, 장자크 상페 그림, 박종대 역자 / 열린책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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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도 어찌 저리 태연하고도하고 창백하고 무표정할 수 있을까! 자신감에 넘치는길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구경꾼들은 눈가가 촉촉해지고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낀다. 자신들은 그렇게 두고 싶지만 감히 두지 못하는 수를 이 젊은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실행에 옮기고 있지 않은가! 물론 젊은이가 왜 저렇게 두는지는 이해가 안 된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어쩌면 그들도 저 친구가 지금 목숨을 건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음을 예감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 젊은이처럼 두고 싶다. 저렇게 당당하고, 승리의 자신감에 넘치고, 나폴레옹처럼 영웅적으로 싸우고 싶다. 장처럼 소심하게망설이듯이 질질 끌며 두고 싶지는 않다. 이유는 분명하다.
그들 자신이 실전에서는 장과 똑같이 두기 때문이다. 다만장이 그들보다 더 잘 둘 뿐이다. 장의 게임은 이성적이다. 정석적이고 정연하면서도 상대의 진을 빼놓기에 충분할 만큼질기고 무미건조하다. 반면에 흑은 한 수 한 수가 기적이다.
이방인은 비숍을 G7으로 진출시키려고 퀸을 아무렇지도 않게 희생하는데, 대체 그런 수를 어디서 볼 수 있겠는가? 그들은 이 행동에 가슴 깊이 감동한다. 이제 이방인은 자신이 원H
하는 대로 둘 것이고, 그들은 그의 그런 수를 하나하나 끝까지 따라갈 것이다. 그 과정이 황홀한 기쁨이든 쓰라린 고통이든 간에, 그는 이제 그들의 영웅이고, 그들은 그를 사랑한다 .

지금껏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바로 전 판을 머릿속으로하나 복기하기 시작한다. 당연히 실수는 없었다. 단 한 치도 없었다. 그럼에도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장 형편없는 시을 한 것 같다. 정상적으로 두었다면 초반에 진작 상대를 인통으로 몰아넣어 게임을 끝냈어야 했다. 퀸을 갬비트로 허되이 허비해 버리는 그런 한심한 수를 두는 인간은 체스의〈체 자도 모르는 신출내기가 분명했다. 지금까지 장은 그런초보자들을 기분에 따라 어떤 때는 슬슬 봐주면서, 어떤 때는 인정사정없이 잔인하게 요리하곤 했는데, 어떤 경우든 때가 되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신속하게 짓밟아 버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상대의 진짜 약점을 간파하는 촉수가작동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아니면 자신이 너무 비겁했을까? 저 거만한 사기꾼 자식을 그에 걸맞게 간단하게 처치해버릴 용기가 없었던 것일까?
아니다, 실상은 더 나빴다. 그는 상대가 그렇게 한심한 초짜라고는 차마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훨씬 더 나빴던 것은 판이 거의 끝나갈 무렵까지도 그 낯선놈이 아예 자신의 상대가 되지 않는 인간이라고는 믿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다. 그 인간의 자신감과 천재성, 젊은 패기는절대 극복할 수 없을 것처럼 비쳤다. 그가 과도할 정도로 그렇게 신중하게 둔 것도 사실 그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그의 행동을 설명하기엔 충분치 않다.

... 그와 함께 자신이 수년 전부터 그렇게 기다려온 패배를 마침내 그 인간이 최대한 강렬하고 기발한 방식 이로 맛보게 해주기를 소망했다고 말이다. 그래야 자신은 언제나 최고여야 하고 어떤 상대든 무너뜨려야 하는 짐을 벗어던질 수 있고, 그래야 질투로 찌든 그 망할 놈의 구경꾼들에게즐거움을 안겨 줄 수 있고, 그래야 스스로 평온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는 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번 승리는그의 삶에서 가장 역겨운 승리였다. 왜냐하면 그는 이 승리를 피하려고 체스를 두는 내내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욕보였고, 그로써 천하의 그 한심한 풋내기에게 항복 선언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체스 챔피언 장이 이 일로 무슨 커다란 정신적 깨달음을얻은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옆구리에 체스판을 끼고 손에는기물 상자를 들고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면서 분명히 깨달은 것은 하나 있다. 오늘 실제로 패배한 사람이 자신이라는것이다. 그것도 복수할 기회가 영영 없고, 미래의 어떤 빛나는 승리로도 만회할 수 없기에 더더욱 비참하고 결정적인 패배였다. 그래서 그는 평소에 무슨 거창한 결심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이날만큼은 한 가지 굳은 결심을 했다. 체스를 영원히 그만두겠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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