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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창밖에는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가 내리고 있다. 벚꽃이 다 지기 전에 산책도 하고 싶었는데, 날씨가 계속 안좋으면 만개했던 꽃들이 우수수 떨어질 것 같아 서운하다.

이제 4월이다.시간이 정말 빨리 간다. 하고 싶은 일도 많고, 해야 할 일이라고 명시된 일도 많은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일부분일 뿐. 그 이상을 하려고 덤비다가 면역력이 약해졌는지 몸살감기에 걸렸다. 골골대는데도 손에서 할 일을 놓을 수가 없다. 언젠가는 조금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겠지. 언젠가는 더 제대로 책을 읽을 수 있겠지. 하루하루 버티고 있지만 성과는 그닥 눈에 보이지 않는다. 발전은 커녕 글에서 드러나는 미숙함이나, 부적절함, 결핍된 것들만 눈에 들어와 부끄럽다. 언제쯤 경지에 오를까. 과연 그런 경지에 도달한다는 게 가능할까?

 

책상에 앉아 늘 이런 고민들을 주로 하지만, 몸이 늘 가 닿지 않는다고 마음마저 가 닿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진상규명을 요구하지 않는 게 이상한 일처럼 여겨지는 곳이 되기를 늘 꿈꾼다.  직접 몸이 갈 수 없기에,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는지 이것저것 찾아 행동할 뿐..

 문학을 읽고 생각하는 일이 쓸데없어 보일 지라도, 문학과 같은 다양한 예술이 주는 잉여로움은 어떤 게 더 인간적인지, 본질적으로 무엇이 더 사랑에 가까운지 생각하게 하는 일이라, 궁극적으로 삶을 풍요롭게 한다. 소설을 많이 읽은 사람의 공감능력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높다는 연구결과가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렇게 위안을 삼는다. 책을 읽고 글쓸 고민을 하는 것 역시도 이 사회가 좀 더 나은 사회가 되도록 어떤 형식으로든 기여하는 것이라고. 이렇게 말하고서 이게 비겁한 변명이 되지 않도록 또 열심히 노력해야 겠지만..

 

이번달 눈에 들어오는 도서목록이다.

 

 

 

 레이먼드 카버의 두번째 소설집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의 원본이다.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에 포함된 17편의 단편이 편집자의 손을 거치지 않은 상태의 오리지널 버전 그대로 실렸다.
1981년, 당시 크노프 출판사의 편집자였던 고든 리시는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편집 과정에서 카버의 원고를 대대적으로 수정했다. 일부 작품의 제목과 등장인물의 이름을 바꾸기도 하고, 거의 모든 단편의 엔딩을 바꾸거나 잘라냈으며, 분량의 70퍼센트 이상을 덜어낸 단편도 있었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작가가 의도한 바를 보려면 이 책을 보는 편이 좋겠다. 왜 편집자는 편집이 필요하다 생각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작가가 그만큼 파격적이었을까? 정서에 안맞기에 책이 안팔릴거라 생각했던 걸까? 그가 직시한 진실은 무엇일까.

 

 

 로맹 가리 장편소설. 로맹 가리는 이 작품에서 독재와 저항, 종교와 위선, 제국주의와 공산주의로 혼란한 제3국을 이방인 목사의 시선으로 들여다본다. 그곳에서 일어나는 만행의 배경을 전하고, 평범한 원주민이 독재자로 거듭나는 과정을 선진 문명과 토착 문화의 충돌 속에서 그려낸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로맹가리, 그의 소설 '가면의 생'을 읽은 기억이 난다. 그 소설도 강렬했다. 자전소설이라는 착각이 들 만큼 소설과 거리를 가깝게 느꼈고, 읽은 이후 그 충격파가 5일동안 삶을 지배했다. 사람을 우울하게 만들더라. 살아있는지 질문하도록 만들더라.

그는 이번 책에서 어떤 국가에 들어가 죽을 위기에 처한 목사의 시선으로 그 국가를 이야기한다고 한다. 목사가 처한 상황도, 제 3국이라 지칭되는 국가의 실태도 재미있다. 어떤 식의 이야기일지 궁금하다.

 

 

 p348 이제 난 육지에 있다. 이런 글 조각 하나에 불과한 것에 의지해, 붕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겨우겨우, 그런 안도감을 공유하면서 이 한 구절을 이해하고 있었지.
하지만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새로이 이해하게 되었네. 나는 지금도 실제로 붕괴 위기에 처해 있고, 어떻게든 그 위기를 버티려 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여전히 이런 글 조각 하나가 의지가 되고 있다고. 그렇게 이해하고 나니 애매한 부분이 있었던 후카세 번역과 엘리엇의 원시가 더할 나위 없이 딱 맞아떨어지더군……
여기서 내가 납득한 사실이 있네. 그건, 이제 내가 노인이 되어 매일매일 붕괴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한 구절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일세.

이 구절을 읽는데 가슴이 먹먹해졌다. 노벨상 수상자가 그냥 노벨상 수상자가 아니구나. 그가 쓴 주제에 관해 설명을 들었을 때는 막상 별 감흥이 없었는데. 이 대목를 읽고 익사라는 제목을 읽으니, 내가 익사당하는 당사자가 된 느낌이 든다. 그래서 읽어야 겠다 생각했다.

 

 

읽지 않은 책을 읽고 싶다 말하는 것은 무엇을 근거로 삼아야 할까? 주제의 의미? 문체? 표지 디자인은 분명 아니다.

인생지사,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예측할 수 없듯, 이 악마에게 소원을 빈 사람들에게 뭔가 엉뚱하고 씁쓸한 일이 벌어진다고 한다.

처절한 교훈을 얻는 것은 아니라 할 지라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하니까, 도대체 어떤 형식의 의미를 담았을지 궁금하다. 읽지 않고는 모르겠지.

 

 

 

 

 

 

 

 

P.286 : 이 작은 도시에서 나는 혼자 사는 이상한 남자다. 사람들은 내가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채 자라서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나처럼 자란 사람은 병적인 상상력을 키울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맞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결과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내가 아는 거라고는 이 해변 도시에서, 아니 이곳을 벗어난 어디에서든 그녀만큼 내 눈앞에 실재하는 존재는 없다는 사실이다. 그녀를 위해 살면서 나는, 내가 소망하는 대로 그녀를 소유할 수 없음을 알기에 하루하루를 절망으로 보낸다. 나는 환영을 향한 육욕을 품고 있다. 이런 내 욕망은 신이 내게 보내는 조롱이며 내가 품은 사악하기 그지없는 생각을 처단하려고 신이 내리는 적절한 벌이다.
_「페기 미한의 죽음」에서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를 소유하지 못하는 현실에 처해있다. 그리고 '환상'일지도 모를 그녀를 사랑하며 육욕을 품고 있는 것은 신이 내게 보내는 조롱이랜다. 인물이 공감이 간다. 그래 그가 그걸 벌로 받아들일 수는 있다. 그럼 왜 그는 '환상'을 만든걸까? 정말 환상일까? 그걸 왜 하필 '벌'로서 인식한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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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ma 2015-04-06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달엔 `익사`를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

우끼 2015-04-23 14:54   좋아요 0 | URL
:)!! 이번에 익사도 선정되었네요! 기대되요.
 
[선셋 리미티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선셋 리미티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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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것인지 죽을 것인지 정하라고 했을 때, 사는 것과 죽는 것의 의미를 저울질해서 어떤 것 하나를 선택할 ‘능력’이 나에게 있을까? 이 책은 그 답할 수 없는 질문을 가지고 끈질기게 탐구한다. 인간의 본질이 무엇이냐, 왜 인간은 어떤 것을 선택하고 행동하느냐, 등등..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삶의 양상을 바깥으로 끄집어내고 싶었던 것 같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고 무진장 애를 썼다. 그의 말마따나, “ 흑 : 질문을 하는 사람은 진실을 원한다고 생각하지. 의심하는 사람은 진실 같은 건 없다는 얘길 듣고 싶어하고. 66p” 인가보다. 작가는 흑과 백이 말하는 두가지 내용 전부가 현존하는 진실이면서 거짓이라 여기는 듯 하다. 왜냐하면 결론부분에 가서 소설(아니면 희곡?)을 혼란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혼란이라고 해봐야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깊어서 감성적으로 짓눌릴 정도는 아니다. 그래서인지 혼란스러운 결말이라 해도 곤경에 빠지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결말은 두 힘의 충돌이 빚을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결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 삶에 대한 철학적 지식이 짧은 나로서는, 뭔가 알 수 없지만(?하하)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이유 없이 그냥이라서 조금 이상하기도 하다.)


나 개인적으로는 ‘백’의 삶을 살다가 살기 위해 ‘흑’의 쪽으로 넘어왔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생각한 삶이란 것에 빗대어 이 책의 내용을 빙산의 일각만이라도 소개해보겠다.


처음 세상에 대해, 내 자신이 왜 사는지에 대해 고민해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때 내 자신이 존재하는 것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끊임없이 그 가정을 의심해왔는데, 의심할수록 알 수 있는 것은 점점 더 사라져가고 내 삶은 무용한 것이라는 결론밖에 남는 게 없었다. 나는 그렇기에 자살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흑의 입장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단순하다. 정말 살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흑 : 모든 걸 포기해버렸어. 그런데 문득 그 말을 해버렸어. 이렇게 말한거야. 날 좀 살려주세요. 그러니까 살려주시더라구. 103p”

그리고 원하는 것 대신 필요한 것을 얻었다. 원하던 것이 정말 내가 원하던 것인지 아닌지 안개처럼 뿌옇게 보였기에, 지금 당장 내게 필요한 것들을 찾아나갔다. 살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을 내가 모르는 새 소망하고, 그것을 내가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얻어냈다. “흑 : 나는 원하던 것 대신 필요한 걸 얻었소. 그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행운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119-120p”

하지만 흑이 마지막에 백을 돕지 못해 절망하면서 외쳤던 절규는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백을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백은 애초 흑과 반대지점에 있으면서 평행선이라, 맞닿기 어렵다. 애초 설득이 불가능한 것이다. 생명이 무용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어떻게 생명이 귀중하다고 설파할 것인가? 생명이 무용하기에 값지고, 그것이 물리적으로 같은 것이라는 걸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못한다. 애초 아는 바가 없고,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다. 그걸 흑은 ‘신의 뜻’이라고 표현할 뿐.

나는 그것을 생명이 살고자 하는 집단적인 힘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것 역시도 정확한 표현은 아닐 것이다. 


작가가 결론을 '백'의 견고한 주장과 실천. 그를 지켜보는 '흑'의 혼란으로 맺은 것은, 아마도 '백'의 입장이 너무 견고하다 해도 하나 힘알탱이가 없는 결론이라서(단순하게 말해 '백'의 입장은 생명을 향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선조로부터 전해받은 생명력을 견고하게 믿고 사랑을 온전히 받는 사람에게는 조금의 혼란도 주지 못하기에, '백'과 '흑'의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라고 나는 판단했다. 실재로 혼란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이성'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고 들 때는.



(To be or not to be)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이 문장으로 정리될 수 있지만, 이 하나의(?)문제가 한 권의 책(얇지만 압축적이라서 더 어려운)에 담길 정도로 길고도 혼란스러운 이야기다. 나는 그렇기에 이 책을 단번에 정리하는 그런 무시무시한 일은 못하겠다. 포기…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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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모노프]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리모노프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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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가 매력적인 이유는 그가 한 가지 목표에 ‘순수하게’ 매진했기 때문일까? 그 목표가 옳은 것이든 옳지 않은 것이든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의 지혜는 편협하고 사상은 단조로웠을지라도 자신이 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무엇 때문에 이 세상을 살고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소중한 지식은 없다고 여기며 행동했다.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돌진만 했다.

영웅이 되기 위하여 다사다난한 삶을 산 리모노프, 그가 돈키호테라 불리기에 적당하다 생각한 이유는 어찌보면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그의 생각을 관철시키려고 그의 일생을 바쳤기 때문이다. ‘영웅적인 삶을 살고 싶다’는 목표를 전면에 내세우고 ‘파시스트’가 되려고 노력하며, ‘전쟁’은 한번쯤 해봐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 모든 것들을 일생에 걸쳐 몸으로 실천한 그를 지칭할 수식어로 ‘돈키호테’보다 적절한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왜 리모노프를 매력적이라 느꼈을까? 돈키호테야 소설 속에 등장한 인물이고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면서 자신의 사상을 추구한 것은 아니니 매력적으로 느낄 수도 있다고 한다 하자. 리모노프는 실존인물이다. 게다가 그는 현안문제에 대해 정말 ‘다른’시각을 가진 사람이다. 소설을 읽고 그의 넘치는 에너지를 보고 스타로 추앙하고 좋아할 수는 있어도, 전혀 다른 배경에서 살아온 내가 이유없이 그의 사상에 동의하기는 어렵다. 동의는 커녕 그에게 권력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단순히 그가 영웅이 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매력적이라 느끼는 것은 사실을 너무 단순화시킨 것 같다. 그를 매력적으로 느낀 작가의 의도가 소설 안에 적절하게 배합되어 독자가 리모노프를 매력적인 사람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들었기에 그럴지도 모르지만, 무언가 더 말해야 할 것 같다. 

작가의 표현에 따르면 리모노프는 나르시즘적인 사고방식으로 모든 일을 결정할 때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결정한다. 명석한 두뇌와 훌륭한 신체능력을 가지고 오직 역사에 남겠다는 일념으로 명예만을 쫓는 사람인데. 이런 설명만으로는 그에게 매력을 느낄 이유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앞서 말했지만 그는 “파시스트“가 되고 싶어했다. 파시스트라니! 내가 가진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이었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국가주의, 전체주의를 의미하는 파시스트는 일당독재체제를 통해 국가를 지배하기를 바라는 사람들로서, 그 사상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못 내도록 총력을 기울이며, 일반 시민들이 쉽게 발언권을 얻을 수 없는 환경에 처해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이었다. 고위당원들만 혜택을 공유하고, 위에서 고인 물들이 썩어간다 해도 그들끼리의 리그에서만 모든 물자를 독식하는 그런 상태. 그런데 리모노프는 영웅이 되고 싶어하면서 파시스트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영웅은 모든 사람이 추앙하는 인물인데, 사람들이 반대할 만한 사상을 내세우면서 영웅이 될 수 있나?

그런 이유는 러시아 역사를 살피지 않으면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작가는 그가 파시스트가 되고 싶어한 이유는 그가 어릴 적에 느낀 러시아적인 가치를 복원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가 태어난 시기에 우크라이나는 소련에 포함된 국가로서, 공산국가였다. 모든 물자는 국가에 의해 관리되고 배포되었다. 모두가 평등하게 가난한 것처럼 보였다. 


늘 켜져 있는 가스레인지 위의 파란 불꽃이 에두아르드는 눈에 거슬렸다. 불을 끄려는 아들을 어머니는 말렸다. 따뜻하고 방에 항상 누가 함께 있는 것 같아서 든든하다고 했다. <파리에서는 이러면 수천 프랑이 나와요> 하고 그가 한마디 하자, 그녀는 아들의 외국 생활에 대해 들은 몇 안 되는 얘기 중에 이 사소한 내용이 단연코 가장 충격적인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니까 네 말은, 거기는 사람들한테 <돈을 내고> 가스를 쓰게 할 만큼 나라가 짜단 말이냐?⌟305p


옛날에는 사는 게 고생스러웠어도, 구시렁구시렁 불평은 하면서도 전반적으로 자긍심을 느꼈다. 가가린스푸트니크 인공위성, 강한 군대, 광활한 제국의 영토가 있다는 사실이, 서양보다 공정한 사회에서 산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글라스노스트> 이후로 고삐가 풀린 표현의 자유 때문에 맞은 편의 사내 같은 소박하고 순수한 사람들의 머릿속에 1917년부터 이 나라를 지배한 자들은 모두 사디스트고 살인자이며 작금의 참패를 불러 온 장본인이라는 사고가 각인되었다고 에두아르드는 판단했다. <사실, 우린 딱 제 3세계 국가, 핵무기를 가진 오트볼타(부르키나파소의 옛 명칭)꼴이오> 하고 사내는 한탄했다. 어디서 한 번 읽은 게 마음에 들었는지, 남자는 상대의 비위를 맞추겠다는 부담감 속에 같은 표현을 되풀이했다. 지난 70년동안 우리가 최고라고 세뇌를 받았지만 우리는 패배자들이었다고. <브쇼 프라이그랄리(폭삭 망했다)>. 70년 동안 열심히 노력하고 희생한 대가가 이것이라고, 똥통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고. 301p


평등한 가난함(?평등과 가난함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함부로 써도 될까 모르겠지만..)과 제국의 자부심을 그리워하는 러시아 사람들은 공산주의 국가에 향수를 느꼈다. 리모노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러시아에서 태어나 러시아의 삶을 살아본 사람이기 때문에 러시아적인 사고방식으로 사유할 수 있었다. 리모노프는 그런 의미에서 그가 추구하는 바와 러시아적 정서가 일치된, 철저하게 러시아적인 사람이다. 공산국가라는 특수한 환경에 처해있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사고방식일까? 자본주의의 물결에 휩쓸려 폭력적인 상황에 노출된 것은 러시아도, 남한도 마찬가지이지만, 애초 공산국가였던 적이 없던 남한과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식이 정말 달랐다. 


시장경제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이상적인 이행과 범죄적 이행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소. 범죄적 이행이냐 내전이냐, 둘 중 하나였으니까. 364p


인생의 한 모퉁이에서 이번엔 또 운명이 예고도 없이 그를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로 보내 준 것이었다. 전쟁을 하면 삶과 인생에 대해 두 시간이면 배울 것을 평화로울 때는 40년이 걸려야 배운다고 그는 생각했다. 전쟁은 추악하다. 사실이다, 전쟁은 미친 짓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지나치게 무기력하고 합리적인, 본능을 억누르는 문명의 삶도 결국 미친 짓이기는 매한가지 아닌가. 전쟁이 쾌락 중에서도 최고의 쾌락이라는 것은 어느 누구도 함부로 입에 담지 못하는 진실이다. 325p


인생의 한 모퉁이에서 이번엔 또 운명이 예고도 없이 그를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로 보내 준 것이었다. 전쟁을 하면 삶과 인생에 대해 두 시간이면 배울 것을 평화로울 때는 40년이 걸려야 배운다고 그는 생각했다. 전쟁은 추악하다. 사실이다, 전쟁은 미친 짓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지나치게 무기력하고 합리적인, 본능을 억누르는 문명의 삶도 결국 미친 짓이기는 매한가지 아닌가. 전쟁이 쵀락 중에서도 최고의 쾌락이라는 것은 어느 누구도 함부로 입에 담지 못하는 진실이다. 325p


전쟁의 맛, 진짜 전쟁의 맛은 사람한테는 평화의 맛처럼 자연스럽기 때문에, 평화는 좋고 전쟁은 나쁘다는 고매한 소리로 이 맛을 없애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남녀의 존재가 그렇듯 현실에서는 <음양>의 이치처럼 이 둘 모두 필요하기 때문이다. 326p


작가가 리모노프와 비슷하다고 묘사한 ‘푸틴’은 정권을 잡았다. 리모노프는 ‘파시스트’가 되고자 했으면서도 ‘푸틴’을 ‘파시스트’라며 싫어한다. 그가 바라는 것은 이토록 뒤죽박죽이다. 작가 역시도 그걸 염두해두고 리모노프가 오직 영웅이 되기 위해 목숨까지 불사할 사람이라는 표현을 썼는 지도 모른다. 그는 러시아의 혁명을 위해 당을 만들었었고, 60대 후반에(2009년-66세) 푸틴에 반대하여(맞나,,?)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 31조를 상기시키는 <전략 31>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단체를 결성’하여 활동중이라 한다. 그는 영웅이 되고자 했지만 실패했다. 사실 그가 목표로 한 바가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리모노프는 그런 그의 인생을 ‘개떡같은 인생이지, 한마디로.’라고 요약했다고 한다. 작가는 그런 그의 이야기를 그렇게 끝내기 아쉬웠다.


에두아르드라는 파시스트한테 한 가지는 인정해 줘야 한다. 그는 과거나 지금이나 항상 소수의 편에 서 있다. 뚱뚱한 사람들보다는 마른 사람들, 부자들보다는 가난한 사람들, 수두룩하게 있는 착한 사람들보다는 당당한 개차반들의 편이다. 갈팡질팡하는 듯 보이는 인생 역정이지만 그는 언제나, 정말로 언제나, 그들의 편에 서는 일관성을 보여주었다. 436p


영웅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기에 가지는 일관성인지는 잘 모르나, 처음부터 지켜온 이런 일관성은 리모노프를 진짜 영웅처럼 보이게 만든다. 나 역시도 에두아르드 리모노프의 이런 점에 반하기도 했다. 작가는 그 말에 덧붙여서 이런 말들을 곳곳에 적었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신성한 단결>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다. 나 스스로는 이유 없는 폭력을 행사할 사람이 아니라고 자신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시대가 달랐으면 상황적 여건이나 명분을 내세워 충분히 나치에 협력하거나 스탈린주의나 문화혁명에 가담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나는 지금 내가 사는 세계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가치들, 내 시대, 내 나라, 내 계층의 사람들이 영구불변하고 보편적인 최고의 가치라고 확신 하는 것들 중에서 세월이 지나면 기괴하고 추악할 뿐 아니라 명백히 잘못된 가치로 판명되는 것들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지나치게 고민하는지도 모르겠다. 리모노프류의 상종 못 할 사람들이 오늘날의 인권이나 민주주의 같은 이데올로기는 기독교 식민주의의 변형(야만인들에게 진실과 아름다움과 행복을 가져다주겠다는 똑같이 좋은 의도, 똑같은 선의, 똑같은 절대적 확신에서 출발하는)이라고 주장할 때, 나는 물론 이런 상대주의적 논리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딱히 반론할 근거도 없다. 331p


세상의 복잡다난함을 흥미롭게 관찰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견해와 상반되는 사실을 발견하면 덮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부각시킨다.334-335p


우리의 전반적인 사고체계는 미덕에 의한 등급화, 가령 마하트마 간디는 살인범인 소아 성애자 마크 뒤트루보다 훨씬 고귀한 인간상이라는 판단에 기반하고 있다. 246p


<남과 비교해 스스로 우월하다거나, 열등하다거나, 심지어 동등하다고 판단하는 인간조차 현실을 모르는 것이다>라는 생각은 지고지상의 지혜이며, 이 생각을 수용하고 소화하고 체화함으로써 이 생각이 단순한 생각에 그치지 않고 여하한 상황에서도 우리의 시선과 행동을 결정하는 좌표로 작용하게 만들기에 한 평생이라는 시간은 충분하지 않다고 믿는다. 247p


작가의 이런 생각들이 이 책을 집필하게 된 계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그렇기에 더욱더 리모노프의 삶을 실패자의 인생인 양 끝마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또한 타인의 카르마, 심지어는 자기 자신의 카르마를 판단할 때조차 오판의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생각한다.515p” 그래서 작가는 이런 질문을 한다. “이 집에서 늙어 가는 상상을 해보나요, 에두아르드(리모노프)? 투르게네프의 주인공처럼 생을 마감하는?”

그 말에 리모노프는 이렇게 답한다.


사마르칸트나 바르나울 같은 도시들에, 태양이 작열하고 먼지가 자욱한, 느리고 격렬한 도시들에, 그곳, 총안이 뚫린 사원들의 높은 담장 밑 그늘에, 걸인들이 있다. 몇 무더기의 거지들이. 이가 빠지고 상당수는 눈도 없는, 그을린 얼굴의 앙상한 노인들. 이들을 때가 까맣게 묻은 튜닉과 터번을 두르고 앞에 벨벳 조각을 펼쳐 놓고 동전을 던져 주길 기다리며 앉아 있는데, 막상 던져 줘도 고맙다는 인사 한 마디 없다. 이들이 살아온 삶은 알 길이 없지만, 무연고자 공동묘지가 종착역인 것은 분명하다. 나이도, 혹 있었다손 치더라도 이젠 재산도 없으며, 여태 이름이 있는지도 알 길이 없다. 모두 다 내려놓은 사람들이다. 넝마를 걸친 걸인들이다. 왕들이다. 519p


이 결말을 읽고 무릎을 쳤다. 암살당하지 못해서 영웅이 되고자 한 꿈이 좌절된 영웅의 이야기가 진짜 영웅의 이야기로 변모하는 순간이다. 넝마를 걸친 걸인이자 왕이라 묘사된 그들은 러시아적으로 ‘낙오자’가 된 리모노프를 묘하게 닮아있다. 

내가 겪은 일도 아닌데 리모노프의 삶이 얼마나 파란만장했으면 그 열기와 에너지가 활자 밖으로 뛰쳐나오는 것 같았다. 리모노프가 욕망에 충실하고서도 인간적인 사람이 되는 길을 착실히 밟아왔다는 점이 정말 사랑스럽다. 그의 자유로운 삶의 방식에 놀라울 뿐이었다. 

책에 나오는 저돌적인 그의 생각과 행동은 오히려 영웅적인 삶과는 거리가 먼 행동들이라 여겼지만, 책을 읽고 나서 생각컨데 인생이라는 것은 참 신비해서 욕망만을 쫓는 사람에게도 열심히 노력할 경우 평범하고도 영웅적인(?) 깨달음을 주는 건가 싶기도 했다. 러시아 바깥에 살아온 나도 그의 삶이 이해되면서 웃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나와는 전혀 다른 이세계의 사람인데도 나와 닮았다고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떤 점이 닮았다고 생각했냐면, ‘이상’이라 여겨지는 것을 향해 목숨걸고 돌진하는 점이다. 그렇게 돌진하다가 리모노프처럼 노년을 보낸다 해도 아량곳하지 않고 죽는 순간까지 노력하기를 희망하기에, 그러했다. 너무 뜬금없는 이야기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는 허영과 허세는 많아도 겁쟁이라서 리모노프처럼 영웅(?)적으로 살거나 무모하게 전쟁에 나서거나 하기보다 누구도 죽이거나 무시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펜대만 잡고 굴릴 것 같지만. 그랬다. 그렇게 따지면 리모노프보다는 카레르가 추구하는 삶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세상의 복잡다난함을 흥미롭게 관찰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견해와 상반되는 사실을 발견하면 덮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부각시킨다."라는 의견과 "<남과 비교해 스스로 우월하다거나, 열등하다거나, 심지어 동등하다고 판단하는 인간조차 현실을 모르는 것이다>라는 생각은 지고지상의 지혜이다"라는 카레르의 의견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여튼 리모노프는 재미있는 사람이다. 소설 리모노프를 읽으면서 자신의 이야기와 리모노프 이야기를 절묘하게 섞어서 도대체 어디까지가 리모노프란 사람의 진실일까 궁금했다. 묘사라기보다는 관찰일기 같은, 논평을 읽는 기분이었다. 리모노프가 가로지르는 러시아의 역사를 전반적으로 다루었기에, 아무 지식이 없는 내가 읽기에 조금 힘들었지만 재미있는 책이었다. 읽고 나서는 리모노프의 넘치는 에너지가 부럽다고 생각했다. 


 p.s. '리모노프'를 읽자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이라는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왜 그런 인물들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안에 등장했을 지 더 잘 알게 된 기분이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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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쌀쌀하지만 곧 봄이 될 것이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은 아직 많았다. 하지만 지금 해야 할 일을 할 수밖에 없어서, 기꺼운 마음으로 마음을 바로잡기로 했다. 작은 일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 이제까지 좌절했던 마음을 잘 추스려 새롭게 나아갈 수 있기를 기원하며 책을 둘러보았다.

 

출판사 책소개

2015년 제11회 세계문학상 대상 수상작. 김근우 장편소설. 서울 변두리 개천인 불광천을 배경으로 88만원 세대인 두 남녀와 남자아이가 아르바이트를 하며 서로를 알게 되고, 그들의 고용인인 노인이 등장한다. 작가는 이들을 중심으로 가짜와 진짜 사이에 갇힌 것들이 혼재하면서도 양립되어지는 과정을 그려간다.

 

세계문학상 심사위원단(박범신, 김성곤, 임철우, 은희경, 김형경, 하응백, 한창훈, 김미현, 김별아)은 이 작품을 대상 수상작으로 선정하면서 “진짜와 가짜, 돈과 가족과 꿈, 세대 간의 화해라는 주제 의식이 뚜렷하게 부각되었고 그것을 이끌어가는 입심이 만만찮았다. 마음을 흔드는 따뜻하고 뭉클한 무엇이 있었고, 적의와 경원이 아닌 연민과 이해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작품을 만나는 일은 그만큼이나 희귀한 기쁨이었다”는 찬사를 보냈다.

 

이 책은, 아직 잘 모르겠다. 출판사가 제공한 단락만으로는 아직 감이 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읽어야겠다. 세계문학상을 받은 전작이 재미있었기 때문에 읽어보고 싶다는 것도 한 몫으로 작용했다.

 

    

출판사 책소개 

인간은 신체적으로 성공했으나 사자나 거미, 혹은 구더기보다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다. 인간은 우월한 지능과 손가락과 직립 보행 능력을 가졌으니 다른 짐승들보다는 낫지 않겠느냐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내가 눕고 싶은 곳에 누울 수 없고, 내가 자고 싶은 시간에 잘 수 없는 것은 행복하지 않다고 말해야 옳은 것이다. 진정 이토록 불행한 생물이 과거에도 있었을까? 혹은 미래에도 존재할까? - <직립 보행자 협회> 중에서

 

이 한 대목을 보고 작가의 자기세계가 독특하다고 느꼈다. 도대체 이 사람은 어떤 소설을 쓸까. 무슨 철학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야기를 풀어갈까. "진정 이토록 불행한 생물"이라는 표현을 쓰며 푸념하는 모양새가 앙증맞고 귀엽다고 생각해버렸다.

 

 

P.14 : 나는 한 달 전 아르바이트를 하던 슈퍼마켓에서 같이 일하는 남자에게 가볍게 데이트나 하자는 말을 들었다. ‘이렇게 별 볼 일 없는 놈한테도 내가 쉽게 보이는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부터 우울증에 빠졌다.이게 몇 번째인지 모른다. 우울증이 언제 시작되고 끝나는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어 애매하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나름 심각한 놈이 왔구나 하고 감은 잡을 수 있었다. 아마 그 남자가 누런색 스웨터에 누런색 코듀로이 바지를 아무렇지도 않게 입고 다니는 황당한 패션 감각을 가진 인간인데다 스타킹을 뒤집어쓴 듯한 얼굴 생김새에 충격이 더 심했던 것 같다.

 

 

 

 

사랑의 어원이 무엇일지 몇가지 설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살다에서 변형된 것이라는 설이다. 그런 의미에서 살다와 사랑은 매우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처음에는 이 책의 제목을 보고 고르는 게 망설여졌다. 감성적으로 흘러가는 바람에 논리를 포기하는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텍스트를 보니 판단은 독자에게 맡기는 듯 심리상태를 보여주는 방식이 좋았다. 그리고 상대의 진심이나 의도가 무엇이든 왜곡하게 되버리는 사고흐름이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한 대목에 '공감'하고나니 제목도 달리 보였다. 그래서 선택했다.

 

 

P.19 : 도대체 두 발로 곧게 서서 걷는다는 것이, 인간이라 불리는 종족이 우리를, 확실한 균형을 잡고 네 발로 거니는 우리 모두를 통치할 권한이 있다고 믿어도 될 만큼 위대한 것인가?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들이 자신들의 머릿속에 있다는, 그들이 이성이라 부르는 그 무엇이 굉장한 것이라 착각하고 있음을.

읽고 싶다. 흥미가 인다. 비슷한 말이라도 이렇게 하면 흥미가 이는구나. 당연한 말을 하더라도, 정말 당연하게 정곡을 찌를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 정말 좋다. 읽고 싶다.

 

 

 

 

 

출판사 책소개

<우리 동네 아이들>은 나지브 마흐푸즈가 이집트 정치 상황에 실망해 절필을 선언한 이후 7년간 침묵하다가 다시 펜을 들어 집필한 첫 장편 소설이다. 이 작품에서 마흐푸즈는 정치-종교적 차이로 인한 갈등과 대립으로 불안정했던 당시의 이집트 사회를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라는 대표적 종교의 일화를 엮어 선과 악이 대립하는 한 마을의 다사다난한 역사로 재탄생시켰다.

발칸반도에 여행을 다녀왔다. 그 땅덩어리에 사는 사람들이 궁금해졌다. 역사에 관심이 생겼다. 정치 -종교적 차이로 인한 갈등과 대립에 관심이 간다. 그들은 왜 다르다는 것을 서로 주장해야만 했으며, 싸워야 했을까? 이 책 역시 정치-종교적 차이로 인한 갈등과 대립을 두고 이야기를 전개한다고 하니 참으로 어떤 이야기일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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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너리 오코너 - 오르는 것은 모두 한데 모인다 외 30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2
플래너리 오코너 지음, 고정아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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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르는 것은 모두 한 데 모인다 


나는 플래너리 오코너가 쓴 단편소설의 규칙성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로테스크를 규칙이라고 들이댈 수는 없지 않은가. 읽으면서 규칙성을 찾으려는 나를 비웃듯이 이야기들은 준비되지 않은 내 뒤통수를 쳤다. 아무리 어떤 뒤통수를 칠 지 미리 알아보려고 살펴도 결말은 항시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났다. 규칙성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매혹적이었다. 어떤 인물도 얌전히 믿을 수 없었고, 그랬기에 어떤 인물도 결말이 나올 때까지 비난할 수 없었다. 

대충 읽다가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파악조차 하지 못하고 이야기가 끝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게다가  소설 안에서 사건 하나가 터지고 나면 항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곤 했다. 어떤 인물도 스스로가 바랐던 대로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 읽는 내내 뒤통수가 남아나질 않는다. 무엇 하나 놓칠까 싶어 꼼꼼히 읽어도 마찬가지였다. 꼼꼼히 읽지 않으면 내용의 흐름도 따라갈 수 없었다. 

매우 간결하게 그 장면에 필요한 이야기들만 서술되어 있었다. 문장 하나하나의 숨결을 느끼면서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섬뜩한 기분이 들고 이야기가 끝나 있었다. 인물에게 공감하도록 길게 설명을 늘어놓는 것도 아니었다. 작가는 독자가 인물에게 공감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사실 작품에서 대체적으로 선한 인물은 나오지 않고 어중간하게 속물적이거나 부적응자인 사람들이 나와서 판을 벌였고, 누군가가 죽거나 처절하게 상처받고 나서야 이야기가 끝이 났다. 그리고선 일상적으로 공유되던 의문들과 규칙이 하나씩 깨져갔다.

그러니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와 연관지어 무언가를 찾으며 읽으려 해도 섬뜩함 이외의 것은 공유할 수 없었고, 감정적으로도 단편들을 단숨에 읽는 것은 힘이 부쳤다. 당신이 싫어하더라도 진실을 마주하게 해주마. 라고 작가가 말하는 듯 했다. 부적응자들의 위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믿었던 것들에 의해 사람들은 조롱당한다. 플래너리 오코너가 형성한 사건은 상징은 명료하게 말하기 애매한 지점에 서 있다. 작가가 서술하는 시점과 공간은 작품 안에서 뚜렷하게 드러났지만 하려는 이 소설들은 그 시대에 국한되지 않고 현대에 와서도 재해석 될만한 여지를 품고 있었다. 왜냐하면 플래너리 오코너가 다룬 것들은 단순히 시대적 상황과 정치적 의견이 아니라, 인간이 품고 있는 모순 그 자체를 심연에서 끌어올려 그대로 보여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손님 같은 분들은 호크슨의 교사 봉급에 대한 공약 때문에 호크슨에게 투표하시겠지요? 당연하죠. 돈이란 많을 수록 좋으니까요. “

“돈이라고요!” 레이버가 웃었다. “썩어 빠진 주지사 아래서는 돈을 얼마를 받아도 결국 잃는 돈이 더 많다는 걸 모르시나요?” 그는 자신이 드디어 이발사와 같은 수준에 섰다는 걸 깨달았다. “그 사람은 너무 많은 부류의 사람들을 배척해요. 그 사람은 내 돈을 다먼보다 배는 더 빨아먹을 겁니다.”

“그러면 좀 어떤가요? 저는 좋은 일에는 돈을 아끼지 않습니다. 좋은 일에는 언제든지 돈을 낼 겁니다.” 이발사가 말했다. 

“호크슨이 약속한 임금 인상은 이분 같은 선생님에게는 적용되지 않아.” 방 뒤편에서 누군가 말했다. 그러더니 기업가 같은 태도의 뚱뚱한 남자가 다가왔다. “이분은 대학 선생님이시지?”

“맞아요. 이분은 호크슨이 말하는 임금 인상에 해당이 안 돼요. 하지만 다먼이 돼도 봉급은 안 올라요.” 이발사가 말했다. 

“그래도 무언가 얻겠지. 학교는 모두 다먼을 지지해. 나름대로 얻는 건 있지. 무상 교과서, 새 책상같은 것 말이야. 그게 게임의 규칙이야.”

“학교 환경 개선은 모두에게 이익이 됩니다.” 레이버가 침을 튀기며 말했다.

.

.

.

“선생이 깨닫지 못하는 건 우리가 그걸 싫어한다느 거에요. 선생이 수업하는 교실에 까만 얼굴 두엇이 섞여 있는 것이 좋습니까?”

레이버는 한순간 거기 없는 어떤 것이 자신을 땅에 때려눕히는 느낌을 받았다.

(이발사 29-31p)


‘이발사’라는 단편에서는 레이버가 흑인옹호가라는 별칭을 가진 다먼을 지지한다. 단편에서 확인하면, 다먼을 지지하는 이유는 호크슨을 지지하는 다른 사람들의 이유(돈)와 비슷한데도 흑인 옹호가라는 별칭을 한껏 활용하여 흑인 이발사 고용인인 조지의 지지를 얻어내려고 연설을 한다. 하지만 여기서 모순이 발생하는데, 레이버 스스로는 백인과 흑인에게 같은 대우를 하려 하면 싫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 게다가 이발사는 아마도 이익 때문에 호크슨을 지지하지만 그 이유는 추상적이고 당위적이며, 지지하기 위해 끌어들인 이론들이 서로 모순되더라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이다. 단지 호크슨을 신뢰하고 주장을 굽히지 않을 뿐이다. 

한편 레이버가 작성한 연설문 역시 당위적인 내용일 뿐이다. 조지는 연설을 듣고 난 이후에도 여전히 호크슨을 지지한다는 말을 한다. 

이 단편만 봐도 단순히 흑인이냐 아니냐 사이에서의 편견은 시대적 배경으로서 인물의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장치로 활용될 뿐이다. 인물의 내면에서 벌어진 모순이 가져온 미묘한 균열을 겉으로 드러내서 위선을 폭로하는 과정일 뿐이다.  


‘오르는 것은 한데 모인다’라는 작품에서는 아들이 어머니의 편견(흑인은 백인과 근본적으로 급이 다르다)과 맞서싸우려 하지만 실재로는 자신도 편견에서 벗어났다기보다는 어머니를 괴롭히는 수준에서 그치는데, 그 괴롭힘이 극에 달해 어머니가 쓰러지자 그 때문에 아들 역시 죄책감에 휩싸이며 괴로워진다. 이런 모습들을 볼 때 작가가 시대적 배경을 잘 활용하여 자신을 지나치게 신뢰하는 인간들의 자기모순을 바깥으로 끄집어내지만 그 자기모순이 현대에도 마찬가지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한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단순하게 해석이 가능하지만, 플래너리 오코너가 쓴 소설중에는 한 번에 파악되지 않는 모순들도 많이 있다. 이런 것들을 어떤 시각에서 파악할 것인지가 각자 작품을 해석하는 다른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플래너리 오코너가 마치 방관자처럼 존재하는 것을 소설화할 수 있었던 능력이 한 껏 발휘된 까닭일까? 내게는 아직 그녀의 소설은 수수께끼이다. 파악되지 않은 미지의 것을 포함하고 있는, 어떻게 바라봐도 다양하게 해석이 되는 소설이다. 하지만 그녀의 방식이 소설가에게는 새로운 영감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르는 것이 모두 한 데 모인다’면, 그녀의 소설 역시 ‘오르는 것’에 속하기 때문일까. 그녀가 가리키고 있는 첨예한 지점에 다가서고 싶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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