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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너리 오코너 - 오르는 것은 모두 한데 모인다 외 30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2
플래너리 오코너 지음, 고정아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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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르는 것은 모두 한 데 모인다 


나는 플래너리 오코너가 쓴 단편소설의 규칙성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로테스크를 규칙이라고 들이댈 수는 없지 않은가. 읽으면서 규칙성을 찾으려는 나를 비웃듯이 이야기들은 준비되지 않은 내 뒤통수를 쳤다. 아무리 어떤 뒤통수를 칠 지 미리 알아보려고 살펴도 결말은 항시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났다. 규칙성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매혹적이었다. 어떤 인물도 얌전히 믿을 수 없었고, 그랬기에 어떤 인물도 결말이 나올 때까지 비난할 수 없었다. 

대충 읽다가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파악조차 하지 못하고 이야기가 끝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게다가  소설 안에서 사건 하나가 터지고 나면 항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곤 했다. 어떤 인물도 스스로가 바랐던 대로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 읽는 내내 뒤통수가 남아나질 않는다. 무엇 하나 놓칠까 싶어 꼼꼼히 읽어도 마찬가지였다. 꼼꼼히 읽지 않으면 내용의 흐름도 따라갈 수 없었다. 

매우 간결하게 그 장면에 필요한 이야기들만 서술되어 있었다. 문장 하나하나의 숨결을 느끼면서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섬뜩한 기분이 들고 이야기가 끝나 있었다. 인물에게 공감하도록 길게 설명을 늘어놓는 것도 아니었다. 작가는 독자가 인물에게 공감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사실 작품에서 대체적으로 선한 인물은 나오지 않고 어중간하게 속물적이거나 부적응자인 사람들이 나와서 판을 벌였고, 누군가가 죽거나 처절하게 상처받고 나서야 이야기가 끝이 났다. 그리고선 일상적으로 공유되던 의문들과 규칙이 하나씩 깨져갔다.

그러니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와 연관지어 무언가를 찾으며 읽으려 해도 섬뜩함 이외의 것은 공유할 수 없었고, 감정적으로도 단편들을 단숨에 읽는 것은 힘이 부쳤다. 당신이 싫어하더라도 진실을 마주하게 해주마. 라고 작가가 말하는 듯 했다. 부적응자들의 위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믿었던 것들에 의해 사람들은 조롱당한다. 플래너리 오코너가 형성한 사건은 상징은 명료하게 말하기 애매한 지점에 서 있다. 작가가 서술하는 시점과 공간은 작품 안에서 뚜렷하게 드러났지만 하려는 이 소설들은 그 시대에 국한되지 않고 현대에 와서도 재해석 될만한 여지를 품고 있었다. 왜냐하면 플래너리 오코너가 다룬 것들은 단순히 시대적 상황과 정치적 의견이 아니라, 인간이 품고 있는 모순 그 자체를 심연에서 끌어올려 그대로 보여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손님 같은 분들은 호크슨의 교사 봉급에 대한 공약 때문에 호크슨에게 투표하시겠지요? 당연하죠. 돈이란 많을 수록 좋으니까요. “

“돈이라고요!” 레이버가 웃었다. “썩어 빠진 주지사 아래서는 돈을 얼마를 받아도 결국 잃는 돈이 더 많다는 걸 모르시나요?” 그는 자신이 드디어 이발사와 같은 수준에 섰다는 걸 깨달았다. “그 사람은 너무 많은 부류의 사람들을 배척해요. 그 사람은 내 돈을 다먼보다 배는 더 빨아먹을 겁니다.”

“그러면 좀 어떤가요? 저는 좋은 일에는 돈을 아끼지 않습니다. 좋은 일에는 언제든지 돈을 낼 겁니다.” 이발사가 말했다. 

“호크슨이 약속한 임금 인상은 이분 같은 선생님에게는 적용되지 않아.” 방 뒤편에서 누군가 말했다. 그러더니 기업가 같은 태도의 뚱뚱한 남자가 다가왔다. “이분은 대학 선생님이시지?”

“맞아요. 이분은 호크슨이 말하는 임금 인상에 해당이 안 돼요. 하지만 다먼이 돼도 봉급은 안 올라요.” 이발사가 말했다. 

“그래도 무언가 얻겠지. 학교는 모두 다먼을 지지해. 나름대로 얻는 건 있지. 무상 교과서, 새 책상같은 것 말이야. 그게 게임의 규칙이야.”

“학교 환경 개선은 모두에게 이익이 됩니다.” 레이버가 침을 튀기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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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이 깨닫지 못하는 건 우리가 그걸 싫어한다느 거에요. 선생이 수업하는 교실에 까만 얼굴 두엇이 섞여 있는 것이 좋습니까?”

레이버는 한순간 거기 없는 어떤 것이 자신을 땅에 때려눕히는 느낌을 받았다.

(이발사 29-31p)


‘이발사’라는 단편에서는 레이버가 흑인옹호가라는 별칭을 가진 다먼을 지지한다. 단편에서 확인하면, 다먼을 지지하는 이유는 호크슨을 지지하는 다른 사람들의 이유(돈)와 비슷한데도 흑인 옹호가라는 별칭을 한껏 활용하여 흑인 이발사 고용인인 조지의 지지를 얻어내려고 연설을 한다. 하지만 여기서 모순이 발생하는데, 레이버 스스로는 백인과 흑인에게 같은 대우를 하려 하면 싫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 게다가 이발사는 아마도 이익 때문에 호크슨을 지지하지만 그 이유는 추상적이고 당위적이며, 지지하기 위해 끌어들인 이론들이 서로 모순되더라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이다. 단지 호크슨을 신뢰하고 주장을 굽히지 않을 뿐이다. 

한편 레이버가 작성한 연설문 역시 당위적인 내용일 뿐이다. 조지는 연설을 듣고 난 이후에도 여전히 호크슨을 지지한다는 말을 한다. 

이 단편만 봐도 단순히 흑인이냐 아니냐 사이에서의 편견은 시대적 배경으로서 인물의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장치로 활용될 뿐이다. 인물의 내면에서 벌어진 모순이 가져온 미묘한 균열을 겉으로 드러내서 위선을 폭로하는 과정일 뿐이다.  


‘오르는 것은 한데 모인다’라는 작품에서는 아들이 어머니의 편견(흑인은 백인과 근본적으로 급이 다르다)과 맞서싸우려 하지만 실재로는 자신도 편견에서 벗어났다기보다는 어머니를 괴롭히는 수준에서 그치는데, 그 괴롭힘이 극에 달해 어머니가 쓰러지자 그 때문에 아들 역시 죄책감에 휩싸이며 괴로워진다. 이런 모습들을 볼 때 작가가 시대적 배경을 잘 활용하여 자신을 지나치게 신뢰하는 인간들의 자기모순을 바깥으로 끄집어내지만 그 자기모순이 현대에도 마찬가지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한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단순하게 해석이 가능하지만, 플래너리 오코너가 쓴 소설중에는 한 번에 파악되지 않는 모순들도 많이 있다. 이런 것들을 어떤 시각에서 파악할 것인지가 각자 작품을 해석하는 다른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플래너리 오코너가 마치 방관자처럼 존재하는 것을 소설화할 수 있었던 능력이 한 껏 발휘된 까닭일까? 내게는 아직 그녀의 소설은 수수께끼이다. 파악되지 않은 미지의 것을 포함하고 있는, 어떻게 바라봐도 다양하게 해석이 되는 소설이다. 하지만 그녀의 방식이 소설가에게는 새로운 영감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르는 것이 모두 한 데 모인다’면, 그녀의 소설 역시 ‘오르는 것’에 속하기 때문일까. 그녀가 가리키고 있는 첨예한 지점에 다가서고 싶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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