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맨발
송수권 지음 / 고요아침 / 2003년 11월
평점 :
절판


전문학사출신으로 그냥 시를 너무 잘 써서 국립대 교수가 되신 특이한 이력이나 절창인 <산문에 기대어>같은 시들의 해설을 볼 수 있는, 송수권 시인의 소소한 뒷모습들을 알 수 있는 자전적 수필이다. 더불어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아내 수술비를 위해 쓴 책이기도 하다. 2003년도 책인데, 그 후로 사모님의 백혈병은 어찌되었는지 검색을 해도 알 길이 없다. 아마 언론에 사생활로 알려지고 싶지 않으신, 시인이라 시로만 알려지고 싶으신 선생님의 신조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뛰어난 소설가나 뛰어난 시인은 꼭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예전에 박범신선생님의 수필을 읽다가 본 모습과 송수권선생님의 모습이 왜 이렇게 닮았을까. 박선생님은 신혼시절 단칸방에서 글을 쓰면 신경이 너무 날카로워져서 물 한잔 가져다줘도 신경질을 벌컥 내서 아내가 한밤중까지 수돗가에 쪼그리고 앉아있곤 했다고 했는데, 송선생님도 단칸방에 길게 엎드려 시를 쓰면 아내가 아이 셋을 데리고 밖으로 한참이나 나가있었다고.. 아니. 시인들은 이렇게 살아야 시가 나오는가? 참 이상하다. 송수권 선생님은 교사라 멀쩡히 교편을 잡다가도 방학만 되면 처자식 버려두고 광인이 되어 비렁뱅이처럼 이곳저곳 전전하며 시를 쓰셨단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만 이러신가. 내가 사랑하고 행복해했던 시나 소설들은 다 이렇게 아내의 희생을 눌러 짜내서 쓰신 것들인가. 참. 같은 아내로서 입맛이 쓰다.--;;

 

 

뭐 그래도 송수권선생님의 시가 좋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니. 2부에 실린 좋은 시들 중 하나를 옮겨본다. 중학시절 읽었던 <메밀꽃 필 무렵>이 다시한번 마음 속에 그려지는 허생원의 달랑달랑 나귀 방울 소리가 들리는 듯한 시이다. 학교에서 배운 대로라면 "청각적 심상"을 자극하는 서정시. 풍경묘사도 뛰어나 이런 시를 읽으면 나는 눈 앞에 장면이 펼쳐져서 그만 또 빨려들어가고 만다.

 

     봉평 장날 

 

짧은 겨울해

장꾼들도 돌아가고 날은 어둑신하게 저물었다

가산의 빗돌만이 장터 마당에 

을씬하니 서 있다

한 마장쯤 길을 따라 올라가니

구색을 맞추려고 차려놓은 물방아간과 말집

그 말집 속의 허생원이 타고 다녔던 나귀

옹색하니 저 혼자서 방울을 흔들었다

국밥 대신 충주 댁에 들러 올챙이 묵

한 그릇을 먹고 나오는데

기다렸다는 듯 

흰 눈발이 촐싹였다

마방 앞에 놓인 여물 써는 빈 작두

내일 날씨라도 걱정해서일까

어디선가 자꾸만 기침 끝에 곰방대 터는 소리가 들려왔다

  - p.198, <아내의 맨발>

 

 

사실 이 시집은 아내의 맨발이라는 이름으로 된 연작시가 주를 이루고 있는데, 아마 사연을 잘 모르고 읽기 시작했던 나같은 사람은 더 뭉클할 듯하다. 1부 하늘돌에 "띄우는 편지"에 이런 부분이 있다.

 

그녀의 피 순결하던 열 몇 살 때 있었다

한 이불 속에서 사랑을 속삭이던 때 있었다

연 잎새 같은 발바닥에 간지럼 먹이며

철 없이 놀던 때 있었다

...(중략)

나이 쉰 셋

정정한 자작나무, 백혈병으로 몸을 부리고

여의도 성모병원 1205호실

1번 침대에 누워 그녀는 깊이 잠들었다,

혈소판이 깨지고 면역체계가 무너져 몇 개월째

마스크를 쓴 채, 남의 피로 연명하며 살아간다

-p.16,<아내의 맨발>  

 

아픈 아내에게 당신의 피를 먹고 자란 시인이 피 한방울 줄 수 없는 빈 껍데기 언어로 부질없이 시를 쓴다고 탄식하는 늙은 시인의 모습이 애처롭다. 아내가 죽으면 결코 시를 쓰지 않겠다고 외치는 마음이 뭉클하다. 사모님 어서 회복하셔서 송선생님과 행복하셔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게 선생님이 젊어서 잘하셨어야죠! 하는 얄미운 생각도 드는 게 사실--;;)

 

절필하지 않으셨길. 사모님은 회복되셨길. 좋은 결과를 감추고 계신 것이길 바래본다.

 

(서평 제목을 '아내의 피를 먹고 쓴 시'라고 썼더니 쓰고보니 너무 무섭네. 요새 흡혈귀이야기가 인기라던데. 사실 본 책 18쪽 '아내의 맨발 1- 연엽에게'에 나오는 표현을 둘러 쓴 것. "너의 피를 먹고 자란 시인"이란 표현인데 역시 시인과 범인의 차이. 시인이 쓰면 아련한 죄책감이고 나같은 범인이 비슷하게 쓰면 매우 흡혈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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