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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차 ㅣ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4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2월
평점 :
책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이 골라서 이 제목이 무슨 뜻인가 했었다. 한 여자가 실종되고 그 지점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기에 그럼 뭔가 화류계와 관련이 있는 단어인가 했었다. 그러나 책의 첫 장을 넘기자 제목의 오싹한 뜻이 바로 나왔다.
화차 : 생전에 악행을 한 망자를 태워 지옥으로 옮기는 불수레
숨이 턱. 첫장부터 책의 분위기가 딱 잡혀버렸다. 지옥으로 가는 불수레라니. 누가 이걸 탔다는 말인가. 형사가 실종된 여인을 찾아가는 긴 과정과 결국 찾기까지 추리소설을 읽는 느낌으로 읽었다. 400여 페이지인데 깊이 생각할 필요없이 형사 혼마의 수사 과정을 따라가면 되어서 하룻밤에도 읽을 수 있는 흥미로운 책이다.
다 읽고 보니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이십년 정도 빨리 경제위기가 왔구나 싶었다. 우리나라도 몇 년전부터 개인파산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일본은 1980년대-90년대 초반에 이미 이런 상황을 겪고 지금의 장기침체로 빠져들었군 싶었다. 우리나라도 그럼 일본처럼 단계를 밟아가려나 아무튼.
교통사고로 아내를 잃은 혼마에게 변호사가 묻던 부분이 인상 깊었다.
P.130-143,<화차> 혼마씨는 지금 그런 생각을 하시는 것 아닙니까? 세키네 쇼코는 개인파산을 한 여자다. 게다가 술집에서 일하고 있었다니까 돈 낭비가 심했던 건 물론이고 사생활도 엉망이었을 게 분명하다. 그러니까 인간관계를 더듬어 가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안 그렇습니까?
(중략)
"그게 오해라는 겁니다. 현대 사회에서 카드나 은행 대출 때문에 파산에 이르는 사람들 중에는 부지런하면서 겁도 많고 마음이 약한 사람들이 오히려 더 많아요. 그런 점을 이해하려면 우선 이 업계의 구조부터 알아야 합니다.
(중략)
"그런 사람들은 도망간다거나 포기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해요. 어떻게 해서든지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고민하다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는 겁니다. 몸을 망치고, 그보다 더 심한 경우도 당하고.
(중략) .. 성실한 사람일수록 발목이 잡혀 꼼짝도 못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막다른 곳에 다다르면 가장 나쁜 형태로 끝을 보지요. 범죄를 저지르는 거죠. "
(중략) 마찬가지입니다. 다중채무자들을 싸잡아서 "인간적인 결함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판단하기는 쉽죠. 하지만 그건 자동차 사고를 낸 운전자한테 전후 사정을 전혀 들어보지 않고 '운전실력이 나빠서 그렇다. 그런 인간들한테 면허 같은 걸 줄 필요가 없다'고 잘라 말하는 것과 같은 소립니다.
신조 쿄코가 아버지의 부채로 가족이 다 흩어져 살게 되고 어린나이에 결혼을 했지만 결국 빚쟁이들에게 쫒겨 그 결혼마저도 파탄난 과정을 읽을 땐 정말 남의 일 같지 않아 한 겨울에 속옷만 입고 칼바람을 맞고 서 있는 것 같았다. 도서관에서 핏발 선 눈으로 행려자 부고란을 읽던 대목에서도. 짤막짤막하게 추리소설처럼 전개가 빨라 깊이 감정이입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마음이 오싹오싹했다.
미야베 미유키. 현대사회를 꿰뚫는 눈이 있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읽어볼만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