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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ㅣ 밀란 쿤데라 전집 6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처음 읽는 동안 불편했던 것은 지칠줄 모르는 토마시의 바람기였다. 그가 자신의 사랑은 애정행각과 무관하다고 아무리 주장할지라도 그렇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소설은 소설일 뿐 윤리로 재단해서는 안되는 것을 알지만, 테레자를 사랑한다면서도 끊임없이 새 여자들을 만나고 관계를 갖는 게 나는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랑에 대한 기만이 아닌가 했다. 혹은 밀란 쿤데라가 제시하는 사랑은 뭔가 다른가 했다. 이 여자를 왜 이렇게 외롭게 하나, 현실에서 이런 사랑을 본다면 나는 정말 기필코 반대해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읽다보니 점점 객관적인 거리를 잃어버리고 결국은 테레자의 슬픔이 내게로 옮아와 나마저 슬퍼지고, 그 외로움에 깊이 빠져들어 버렸다.
p282,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그녀는 오늘따라 유난히 쓸쓸하고 우울해 보이는 강물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강 한가운데서 이상한 물체, 붉은 물체를 발견했다. 그렇다, 벤치였다, 프라하 공원에 무수히 널린 철재 다리 나무 벤치였다.(중략) 그녀는 저게 뭐냐고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왜 프라하 공원의 벤치가 물에 떠내려 가느냐고. 그러나 사람들은 무심한 표정으로 지나쳤다. 그들에겐 그들의 덧없는 도시 한가운데로 강물이 수 세기 동안 흐르건 말건 아무 상관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다시 물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한히 슬퍼졌다. 그녀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이별이라는 것을 알았다. 여러 색깔을 거느리며 사라지는 인생에 대한 작별.
변심한 애인을 계속 만나는 것만큼 비참한 일이 있을까. 빨리 헤어지고 싶었다. 내가 테레자가 되어 어서 토마시와 쿨하게 헤어지고 싶었다. 너도 나도 가볍게 삽시다, 하고 싶었다. 그러나 마지막장을 덮고보니 그가 테레자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겠구나. 사랑이구나., 사랑이구나 ! 멈출 수 없는 여성편력이 그에게 어떤 면에서 중독이었다면, 그래서 그것은 정말 그의 말대로 그냥 두고. 그걸 배제한다면, 처음부터 사랑이었구나. 바구니에 담겨 강물에 띄워진 아기처럼 그의 인생에 흘러들어온 그녀. 외과과장의 좌골 신경통에서 피어난 꽃과 같은 그녀. 여섯개의 우연이 합쳐서 그에게 온 그녀. 계속해서 삶의 장소가 옮겨지는 현실이 아무리 시궁창같았어도, 촉망받는 외과전문의에서 유리창 닦는 노동자로 다시 트럭운전사가 된다해도 그녀와 함께 있길 원했던 마음부터 애초에 사랑이었는데 나는 왜 몰랐을까. 왜 의심했을까. 어쩔수 없이 나도 여자로서 테레자와 같은 시선을 가졌던 것같다. 테레자와 함께 상처받은 마음으로 끊임없이 토마시의 사랑을 의심하고 좌절했다.
그러니 테레자의 고백에 내 마음도 더불어 부끄러워지는 것을 어쩔수가 없었다. 나와 테레자가 피해자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어쩌면 우리가 가해자였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마음이 떨렸다.
p. 500,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그녀는 트럭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나무 뒤로 몸을 숨겼지만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의 가슴이 회한으로 묵직해졌다. 그가 취리히를 떠나 프라하로 돌아온 것은 그녀 때문이었다. 그가 프라하를 떠난 것도 그녀때문이다. 여기에서도 그녀는 계속해서 그를 괴롭혔고 죽어가는 카레닌 앞에서도 차마 털어놓을 수 없는 의심을 하며 그를 괴롭힌 것이다.
그는 그가 자기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다고 속으로 항상 그를 비난했다. (중략)
이제 그녀는 자기가 얼마나 부당했는지 깨달았다. 그녀가 진정으로 토마시를 많이 사랑했다면 그와 함께 외국에 남아야 했다! 거기에서라면 토마시는 행복했을 테고 새로운 인생이 열렸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그를 떠났고 그곳을 떠났던 것이다! 물론 그녀는 그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사랑의 감정으로 그렇게 행동했다고 확신했더랬다. 그러나 이 사랑이 계략과는 다른 어떤 것이었을까? 사실 그녀는 그가 귀국해서 자기에게 오리라는 것을 알았다! 요정이 농부를 소용돌이 속에 끌어들여 빠뜨려 죽이듯 그녀는 그를 불러들여 더욱 낮은 곳으로 끌고 갔다. 그녀는 그가 위경련을 앓는 틈을 타 시골에 가서 정착하자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녀는 얼마나 교활했던가! 그녀는 그를 시련에 빠뜨렸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사랑하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자기를 따라오라고 불렀고 결국 그를 이 곳까지 불러들인 셈이다. 머리가 세고, 지치고, 외과의사의 메스를 다시는 쥘 수 없을 정도로 손가락이 굳어버린 토마시. 그들은 막다른 곳에 다다랐다. 이곳에서 어디로 또 갈 수 있겠는가?
작가는 책의 앞부분에서 무거움과 가벼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랑으로 풀어가자면, 토마시에게는 가벼운 하룻밤의 사랑들이 있고 그의 존재를 흔들고 몰아가는 사랑인 테레자도 있다. 제목에서 작가의 숨은 마음을 찾을 수 있을까? 밀란 쿤데라는 단 한번밖에 살 수 없어 무의미한 존재의 "가벼움"을 "참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걸까?
토마시의 삶의 축. 그 한쪽 끝에 테레사가 있다. 첫만남부터 그녀는 바구니에 담겨 난폭한 강에 띄워진 아기같았다. 그가 보호해주지 않으면 안될 것만 같은, 불멸의 사랑이라도 약속할것만 같은. 그의 손을 꼭 붙잡고 잠드는. 토마시의 삶의 다른 한쪽 끝에는 수많은 여자들이 있다. 토마시는 끊임없이 여러 가벼운 만남을 갖지만 무거운 추 쪽으로 양팔저울이 내려앉듯이 스르륵 스르륵 깊이 깊이 미끄러져간다. 트럭사고로 죽은 둘의 마지막 모습은 흡사 강물 속으로 가라앉는 작은 배처럼 느껴졌다. 무거운 돌을 안고 깊은 곳에 안착하려 자신들을 내려놓는 것만 같았다. 불의의 사고였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이 마치 그 둘이 선택한 결말인 것만 같았고, 죽음으로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함께한 사랑을 선택했으므로 이것이 마치 해피엔딩인것만 같아 이상했다. 가벼움과 무거움이 공존해서 때론 이것이 어느 쪽에 가까운지 알쏭달쏭하다. 마음의 고민은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p.16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그는 마당의 더러운 벽면을 바라 보면서 그것이 정신병인지 사랑인지 분간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진정한 남자라면 당장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상황이지만 그는 머뭇거리면서 자기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 (그녀가 죽으면 자기도 따라 죽으리라 확신하고 여자 발치에 무릎을 꿇은 순간)으로부터 모든 의미를 박탈하는 자신을 책망했다.
그는 한없이 자책하다가 결국 자기가 진정으로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무엇을 희구해야만 하는가를 안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사람은 한 번 밖에 살지 못하고 전생과 현생을 비교할 수도 없으며 현생과 비교하여 후생을 바로잡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작가 자신도 삶이 이렇게 뒤엉켜 어떤 것이 무거움이고 가벼움인지 ,혹은 어떤 것이 더 가치있고 선택할만한 것인지 판단을 미룬채 독자에게 던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선택한다면, 내게 선택하라면 나는 아마 무거움을 선택하지 않을까. 여럿을 의미없이 만나는 것보다 한 사람을 깊이 만나는 것을 선택할 것 같다. 토마시도 사실 그런 게 아닐까. 테레자와의 시골행을 선택한 것이나 취리히에서 프라하로 돌아온 것도. 그 자신이 가벼움을 선호하고 변호하지만 결국은 무거움으로 기울어질 수 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 작가도 그런 의도로 쓴 게 아닐까 조심조심 짐작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