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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바꾼 만남 -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 ㅣ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1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평점 :
강진으로 유배된 다산 정약용과 그의 제자로 평생을 산 황상의 이야기. 사제 간에 주고 받은 여러 한시들과 한문편지들을 정민 교수님이 풀어 놓은 책이다.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으로는 아무래도 삼근계를 받던 장면을 꼽아야겠다. 유배지에서 살 집이 없어서 주막 뒷방에 살면서도 서당을 연 정약용과 열다섯살 소년 황상의 대화.
p35.
"너는 좀 남거라, 이를 말이 있다. ..지금보다 더 노력해야지. 게을러선 못쓴다."
소년이 어렵게 입을 연다.
"선생님! 그런데 제게 세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너무 둔하고, 둘째는 앞뒤가 꼭 막혔으며, 셋째는 답답합니다. 저 같은 아이도 정말 공부할 수가 있나요?"
"그렇구나. 내 이야기를 좀 들어보렴. 배우는 사람은 보통 세가지 큰 문제가 있다. 너는 그 세가지 중 하나도 없구나.
첫째는 민첩하게 금세 외우는 것이다. 이런 아이들은 가르치면 한 번만 읽고도 바로 외우지. 정작 문제는 제 머리를 믿고 대충 소홀이 넘어가는 데 있다. 완전히 제 것으로 만들지 못하지.
둘째, 예리하게 글을 잘 짓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질문의 의도와 문제의 핵심을 금세 파악해낸다. 바로 알아듣고 글을 빨리 짓는 것은 좋은데, 다만 재주를 못 이겨 들떠 날리는 게 문제다. 자꾸 튀려고만 하고, 진중하고 듬직한 맛이 없다. 셋째, 깨달음이 재빠른 것이다. 대번에 깨닫지만 투철하지 않고 대충하고 마니까 오래가지 못한다.
내 생각을 말해줄까? 공부는 꼭 너 같은 사람이 해야 한다. 둔하다고 했지? 송곳은 구멍을 쉬 뚫어도 곧 다시 막히고 만다. 둔탁한 끝으로는 구멍을 뚫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한번 구멍이 뻥 뚫리면 절대로 막히는 법이 없다. ...(중략) 구멍은 어떻게 뚫어야 할까? 부지런히 하면 된다. 막힌 것을 틔우는 것은? 부지런히 하면 된다. 연마하는 것은 어찌해야 하지? 부지런히 하면 된다. 어찌해야 부지런히 할 수 있겠니? 마음을 확고하게 다잡으면 된다. 그렇게 할 수 있겠지? 어기지 않고 할 수 있겠지?
내 아이들이 지혜롭고 명철하면 좋겠지만, 그보다는 성실하고 꿋꿋하길 더 바라게 되는 요즘. 똑똑하기 보다는 오히려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히 공부하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무릎을 치며 탄복한다. 공부는 똑똑해야 잘하는 것이 아님을 늦은 나이에 깨닫게 된다. 실제로 열 다섯에 이렇게 운명적인 만남을 가진 후 제자 황상은 팔십 평생을 부지런히 초서하고 읽고 짓는데 몰두하며 산다.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뛰어난 책들을 하도 많이 지어서 해배가 되었을때 서울로 가지고 가야 하는 책만 수레로 한 가득이었다고 했다. 연구하고 기록하는 자세가 남달랐던 것은 그 제자에게도 대물림되어 황상이 쓴 시 중에 이런 시도 있다.
p.91
"이름 모를 새는 없다. 네가 그 이름을 모를 뿐이지. 모르면 찾아야 한다. 찾아 알면 다시는 잊지 않게 되는 법. 떠도는 지식을 네 것으로 만들려면, 그때그때 찾고 확인해야 한다."
내 어릴 적에 어떤 선생님이 이런 건 시험에 안나온다고 공부 안해도 된다고 하셨던 적이 있는데, 그 말씀을 너무 철썩같이 믿고선 조금만 어려운 내용이 나오면 이런 건 몰라도 된다며 당당하게 뛰어넘겼던 적이 많았다. 그런 못된 태도는 오랫동안 내게 남아 여러 분야에서 악영향을 미쳤다. 이제라도 그게 잘못이었음을 깨달아 나도 마음을 고쳐먹는다.
이왕 공부 태도에 대해 이야기했으니 정약용이 초의스님에게 다그치며 공부하라고 한 내용도 재미있어 적어본다.
p.143
"임금의 엄명을 받았다고 생각해라. 뒤에서 장수가 칼을 뽑아들고 돌격 명령을 내렸다고 여겨라. 호랑이나 이무기가 너를 잡아먹으려고 쫒아온다면 어찌하겠니? 공부는 그런 다급한 마음으로 해야한다. 조금의 방심없이 몰두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마나다. "
정약용은 뛰어난 재주를 가졌으면서도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지 과골삼천, 즉 하도 앉아 공부만 해서 복사뼈가 세번이나 구멍이 났다고 한다. 황상은 자기의 복사뼈는 아직도 건재하다며 칠십이 넘은 나이에도 앉아서 부지런히 경전을 옮겨적고 시를 지어낸다. 정말 그 스승에 그 제자라 할만하다. 스승과 제자의 만남은 정말 그 둘의 삶을 바꾼 만남이었다.
공부태도 쪽으로 리뷰를 써서 좀 치우쳤지만, 이 책의 한시들을 읽으면서 옛 사람들은 어쩌면 이렇게 감성적이고 시적이었을까 싶은 적이 많았다. 유배라는 극단적 상황에서 쓴 시들이 절절하고 눈물나는 경우는 다반사. 몇 년만에 맏아들을 다시 만나 지은 시나 잠 못 이루는 밤 아내를 그리며 쓴 시들은 읽으면서 나까지도 마음이 애끓어 책을 몇번이나 덮었다 다시 펼치곤 했다. 한자 실력만 좀 있었으면 더 깊이 읽었으련만.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