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찾아온 가을에 들뜬 사람들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기라도 하려는 듯 요 며칠 맑았던 하늘은 어제오늘 우중충하게 흐려 있습니다. 길게 이어지던 늦더위는 사라진 듯하고 뚝 떨어진 아침저녁의 기온은 으스스한 한기마저 느끼게 합니다. 계절이 바뀌는 이 시기에 우리는 제법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연일 추락하는 대통령의 지지율을 보면서 나는 요즘 우리가 전임 정권 시절에 보았던 정치인 이재명에 대한 판단이나 생각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 국민 대다수가 인지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는 매우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성인이 될 때까지 꽤나 힘겨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스스로의 힘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사법고시를 통과하여 변호사가 되었던 것을 보면 그는 남들보다 뛰어난 의지와 목표의식이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모든 사람이 그와 같은 성과를 낼 수는 없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지닌 의지나 열정을 의심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가 가난하고 비참한 삶을 온몸으로 겪고 목격하였기에 누구보다도 서민의 삶을 잘 이해하고 그들을 위한 정책을 펼칠 것이라고 착각하였다는 점입니다. 그가 늘 입에 달고 살았던 '억강부약(抑强扶弱)'이 현실에서 구현될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는 속담을 까맣게 잊은 채 말입니다.


게다가 개인의 목표를 향한 강한 의지를 마치 어떤 신념이나 용기로 착각하였다는 점입니다. 예컨대 우리는 그가 부당한 권력에 맞서 싸우고 그 과정에서 마주칠 수 있는 어떠한 위험도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인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정의와 용기를 몸으로 체득한 사람이라고 믿었다는 게 우리의 착각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정치인 이재명은 자신이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임기응변과 대처 능력으로 위기를 돌파했을 뿐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눈치가 빠르고 머리가 좋았을 뿐이지요. 낙선을 뻔히 예감하면서도 지역주의 극복을 위해 부산 출마를 강행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 여정과는 사뭇 달랐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고집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마지막 모습에서 불안을 느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비겁을 감추기 위해 실용이라는 말로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다는 것이 작금의 현실입니다.


계속되는 지지율 하락을 지켜보는 진보 진영의 많은 사람들은 지지율 반등의 모멘텀을 모색하기 위한 여러 방안을 내놓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이 상태를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는 게 나의 생각입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전당대회 이전부터 민주당의 여러 사안에 대해 음으로 양으로 개입하여 왔고, 대부분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졌던 게 사실입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의사를 관철하기 위해 같은 진영의 지지자들을 향해 '문조000'이라는 멸칭과 조롱을 일삼는 여러 언론과 유튜버들을 부추기거나 용인하였고, 자신이 원하는 '구조적 다수'를 획득하기 위해 극우적 인물도 등용하였던 게 사실입니다.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되면서 민주당의 전통적 지지자들의 마음이 차갑게 식어갔고 '문조000'를 외치던 사람들은 민주당의 전통적 지지자들을 향한 조롱을 멈추지 않은 채 '반명' 딱지를 붙이거나 듣도 보도 못한 '신천지' 딱지를 붙이기에 이르렀습니다. 민주당의 전통적 지지자들은 이제 그야말로 실질적인 '반명' 세력이 되고 말았습니다. 머리가 좋고 눈치가 빠른 이재명 대통령이 작금의 현실을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문조000'를 외쳤던 자들을 징계한다거나 전통적 지지자들에게 사과한다는 말은 할 수 없을 듯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문조000'를 외쳤던 사람들이 '반명'으로 돌아서고 말 테니까 말입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잔꾀에 의한 지지율 하락을 지켜보면서 다른 방안을 모색할 테지요. 개헌이나 파병을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의 한 방안인 듯 보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일시적으로 자신을 지지하는 일부 유튜버의 눈을 속일 수는 있겠지만 국민 전체를 속일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이재명 대통령은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꼴이지만 우리나라의 정치 발전을 위해서 나쁜 결과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듯싶습니다. 내란의 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국민의힘과 '구조적 다수'라는 헛된 꿈을 꾸고 있는 민주당의 양당 체제를 무너뜨릴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니까 말입니다. 두 정당을 견제할 수 있는 제3의 정당이 출현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정치사에서 조금 더 발전된 민주 제도가 정착될 수만 있다면 지금의 혼란은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을 듯합니다. 하늘은 여전히 어둡고 불어오는 바람 속에는 으스스한 한기가 스민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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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균열내기 - 뒤라스, 카뮈, 에르노를 지나 다만 내가 되기 위해
신유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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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그렇게 절망할 필요가 있을까? 나의 무능함, 부도덕, 탐욕, 사악함... 오늘날 사람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한 개인이 개별적으로 평가받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나의 과거를 돌이켜 생각해 볼 때 수치심으로 얼굴을 붉히거나 낙담할 필요는 없다는 얘기이다. 개인의 능력 또한 그가 속한 공동체에 묻히고, 개인의 도덕성 역시 익명성에 묻힌다. 그러므로 현대인은 진정한 자아를 마주하지 않거나 마주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나는 비록 혼자 있을 때 사회가 용인할 수 없는 나쁜 생각을 하기도 하고, 범죄는 아니지만 종종 나쁜 짓도 하는 사람이지만 어느 날 남들 눈에 띄는 그럴듯한 댓글 한 줄을 씀으로써 나는 마치 성인 반열에 오를 만큼 선한 사람으로 대우받기도 하는 것이다. 나의 능력 역시 타인이 형성한 어떤 성과나 도움에 의해 적당히 윤색되고 부풀려지는 게 대부분이다. 나는 혼자 집 한 채를 짓거나 옷 한 벌을 완성하거나 신발 한 켤레를 만들지도 못하는데 말이다. 그렇다고 나의 무능함이나 부도덕함이 내 주변의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크기로 작동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현대인은 자신에 대해 너무 모르고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걸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신유진 작가의 산문집 <나를 균열내기>를 읽고 내게 들었던 생각이다.


"막을 쓰고, 나를 접어두는 이유는 두렵기 때문이다. 타인의 시선, 나에 대한 평가, 물론 그런 것들도 두렵지만, 내가 진짜 두려운 건 나 자신인지도 모른다. 내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 얼마큼 울퉁불퉁하고 모난 사람인지 스스로도 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모르는 것만을 두려워한다. 접힌 모서리를 펼치면 무엇이 될까. 매끄러운 막 아래 숨은 나를 꺼내면 어떤 내가 나올까. 이 표면을 부순다면 날카롭게 갈린 언어로 이 막을 내리찍을 수 있다면. 쩍, 소리를 내며 갈라지도록."  (p.6 '프롤로그' 중에서)


작가는 이 책에서 프랑스어로 글을 썼던 여러 작가를 차용하면서 그들의 작품 속에서 발견했던 자신의 고독, 광기, 슬픔, 쾌락, 수치심, 절망, 분노, 잔인한 기억 등을 떠올리며 작가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았음에 위안을 받는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삶이 스스로를 우쭐하게 만드는 특별한 사건으로 구성되는 것은 아니어서, 그보다는 오히려 강물 위의 작은 물비늘처럼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빛나던 소소하고 작은 일상들로 우리의 삶이 채워진다는 사실이다. 너무나 작고 사소해서 기억조차 할 수 없는 것들 말이다. 광활한 우주가 반짝이는 항성이나 행성들만으로 구성되는 게 아니라 눈에 띄지 않는 암흑물질로 우주의 대부분이 채워지는 것처럼.


"페렉은 '산다는 것은 최대한 부딪치지 않으려 애쓰면서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끊임없이 이동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의 말처럼 삶은 임시적 정착과 이동의 반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동하는 모든 걸음은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은 누군가의 기억이고, 그 기억이 저장된 공간은 존재의 시간이 쌓이는 장소가 된다. 시간이 삶의 다른 이름이라면, 문학은 한 인간이 세상 속에 머무는 방식, 즉 거주의 예술인 셈이다. 페렉의 책을 펼치며 '읽다'라는 동사 대신에 '살다'라는 말을 써본다. 시인의 870보처럼 페렉의 문학이라는 장소를 천천히 가로질러 본다. 서사를 쫓는 달리기를 멈추고 문장 하나하나에 발을 딛으며, 무심코 지나쳤던 작은 것들을 돌아본다. 그렇게 그의 문장을 살다 보면, 어느새 페렉의 문학이 하나의 견고한 장소가 되지 않을까. 그곳에 쌓은 시간은 오롯이 나의 것, 나만의 기억이 될 것이다."  (p.166~p.167)


이 책에 등장하는 프랑스 작가는 비단 프랑스어가 모국어인 작가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망명했던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시계공장에서 일하며 프랑스어를 배웠던 작가이고, 체코 프라하 출신의 밀란 쿤데라 역시 프랑스로 망명하여 작품 활동을 계속했던 작가이다. 그러나 책의 저자인 신유진 작가가 발견했던 것은 단순히 언어의 공통성만은 아니었다. 1부 '균열의 발견', 2부 '해체와 붕괴', 3부 '유예의 순간', 4부 '자아의 재구성'이라는 목차의 소제목에서 어렴풋이 짐작하겠지만 저자는 자신의 생각과 기억에 균열을 내고 완전한 파괴에 이르러 새롭게 자아를 재구성하는 단계까지 나아가기 위해 프랑스어로 작품 활동을 했던 여러 작가의 작품을 치열하게 읽고, 갈등하고, 음미하며, 비로소 자신의 언어로 해석하고 분석한다.


"모두가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낸다. 그러나 넘치는 고백들 속에서 정작 필요한 것은 이야기의 쓸모와 방향을 묻는 일이다. '자기 쓰기'는 거울 앞에서 시작되지만, 그 끝은 거울을 깨고, 그 자리에 창을 내는 것이어야 한다. 처음부터 열린 창이 될 수 없음을 받아들이자. 깨고 깨지는 경험이 결국 우리 안에 창을 만들 것이다. 물론 그 창 너머에 누군가의 진짜 삶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카미유 로랑스는 '로랑스'라는 거울을 깨뜨려 우리에게 '딸'이 아닌 '여자'라는 창을 내어주었다. 나는 그의 창을 바라보며 내가 부숴야 할 거울과 마주한다. 누군가의 창이 없었다면 영원히 거울 속에 갇혀 있었을 나의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한다."  (p.189)


별 기대도 없이 읽었던 책이 내게 큰 감흥을 주는 경우가 더러 있다. 탁월한 글솜씨 때문은 아니다. 작가의 열정과 책에서 쓰고자 했던 주제에 대한 깊은 이해가 책을 읽는 나로 하여금 들뜨게 하는 것이다. 그런 책을 만나면 한 문장 한 문장을 읽어나가는 일이 그저 즐겁다. 혹시 놓치는 부분이 있을까 한 글자 한 글자 손을 짚어가며 읽게 된다. 그런 더딤이 마냥 즐거운 반면 줄어드는 책의 남은 분량이 그저 안타까운 까닭에 일부러 책을 덮고 방금 전에 읽었던 부분을 찬찬히 되짚어 생각해보기도 한다. 신유진 작가의 산문집 <나를 균열내기>는 무척이나 더디게 읽었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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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하는 질문에 답장이라도 하려는 듯 요 며칠 바람이 불었습니다. 습기를 말끔히 걷어낸 건조한 햇살이 대지를 말리는 동안 푸르름을 드러낸 하늘은 한 뼘쯤 높아진 듯했습니다. 곡식이 익어가는 계절, 농촌의 농부들에겐 타들어갈 듯 건조한 햇살이 계절에 맞춰 알곡을 여물게 하고, 과일의 단맛을 더욱 깊게 하는 더없이 소중한 존재일 테지만, 나와 같은 도시내기들에겐 그저 살갗을 태우는 잉여의 열기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늘에서 맞는 끈적이지 않는 바람의 감촉은 마냥 좋았습니다.


나는 계절이 바뀌는 시기마다 익숙했던 지난 계절을 떠올리곤 합니다. 익숙하다는 건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곧 잊힌다는 것의 다른 표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새로운 계절에 익숙해지는 것처럼 나와 가까웠던 사람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날 때마다 나는 그들이 없는 세상에 조금씩 익숙해져 왔고, 새로운 세상을 의식하지 못할 만큼 익숙한 지금 나는 그들과 함께 했던 많은 기억들을 잊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게 마련'이라는 옛사람들의 말처럼 우리는 그렇게 조금씩 무뎌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다 문득, 계절이 바뀌듯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어떤 시기가 찾아오면 옅어진 죄책감에 새로운 색을 입혀 그들과의 추억을 조금씩 되살리곤 합니다. 지워질 듯 지워지지 않는 초등학교 시절에 쓴 연필 글씨처럼 한동안 잊고 지내던 추억은 뿌연 연기 속에서 매번 새로운 모습으로 되살아나곤 합니다.


나는 지금 김연수 작가 외 7인이 쓴 <계절 쓰기>를 읽고 있습니다. 김연수 작가와 전의령 인류학자는 여름을, 홍한별 번역가와 윤경희 문학평론가는 가을을, 김소연 시인과 김지승 작가는 겨울을, 허태임 식물분류학자와 은유 작가는 봄을 씀으로써 책은 사계절을 아우르게 되었습니다. 홍한별 번역가가 쓴 가을의 일부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 나의 계절도 가을이다. 낮이 점점 짧아지고 총기도 사그라진다. 심장이 덜컹거리고 감정은 둔탁하다. 가을은 시들고 이우는 계절이지만, 무성한 잎을 내주는 대신 결실을 맺는 계절이기도 하다. 찬란하지는 않지만 쓸모가 있는 계절이다. 그래야 하는데, 어느덧 시대가 바뀌었고 내가 지금껏 축적해 온 지식이 무용해져 버린 듯한 기분이 든다. 나는 글을 쓰고 싶었지만 무얼 써야 할지를 몰랐다. 그래서 시인이 되는 대신 남이 써놓은 것을 따라서 쓰는 번역가가 되었다."  (p.40)


베란다에서도 차츰 뜨거워지는 마른 햇살의 열기가 느껴집니다. 아파트 화단의 정원수에는 지금도 짝을 찾지 못한 수컷 말매미의 울음소리가 이따금 빈 하늘에 공허한 메아리로 맴돌고, 새로운 계절에 지문을 남기려는 듯 마른 잎사귀가 지면을 향해 살랑살랑 떨어집니다. 나는 이제 익숙했던 계절과 이별하고 새로운 계절에 익숙해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늘한 새벽 기온에 잠이 깨어 열린 창문을 닫기도 하고, 투명해진 햇살에 지그시 눈을 감기도 합니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조금씩 가을을 잊어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익숙해진다는 건 잊힌다는 뜻의 다른 표현이라는 걸 나는 수십 년의 세월을 살아낸 후 겨우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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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를 떠나면
크리스털 하나 김 지음, 허선영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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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신이 살아야 할 시대나 환경을 제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 그런 면으로 보면 인생이란 참으로 불공평하다. 내던져지듯 주어진 삶의 환경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환경에 걸맞은 뻔한 스토리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다가 생을 마감한다. 특별할 것도 없이 말이다. 그러나 개중에는 앞으로 전개될 자신의 뻔한 스토리를 거부한 채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자신에게 어떤 어려움이 닥칠지라도 그렇고 그렇게 전개되는 뻔한 스토리를 자신의 삶으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게 그들의 의지이자 뜻이다. 역사에 기록되는 대부분의 인물은 주로 그런 부류의 인간들이지만, 소설과 같은 픽션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작가는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뻔한 스토리를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는 어떤 인물을 소설의 주인공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어진 조건에서 뻔하디 뻔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그들이 헤쳐가는 삶의 결말이 도무지 예측이 되지 않는다. 소설 속 주인공의 삶을 그저 경이와 감탄의 시선으로 읽게 되는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크리스털 하나 김의 소설 <네가 나를 떠나면>을 읽는 독자라면 주인공 해미의 삶에서 그와 같은 느낌을 받지 않을까.


"나는 어린 미라를 보면서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자기 시대 사고방식에 매몰되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성년이 된 이후 내내 미워했던 여자. 어머니는 내가 눈앞의 일만 보느라 분노한 이후의 상황을 보지 못할 때 나를 위해 고민했다. 나는 언제나 부러졌지만, 어머니는 세상에서 부러지지 않고 살아남는 법을 아는 여자였다. 이 상황에서 어머니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p.369)


소설은 한국전쟁이 진행 중에 있었던 1951년 피난지 부산의 해미네 가족을 그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어머니와 몸이 아픈 동생 현기와 함께 부산으로 피난을 온 해미네는 운이 좋게도 어머니의 종조부가 살던 집에 들어가 살게 되었지만, 해미는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경환과 싸돌아 다니는 것 말고는 특별히 운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해미의 마음은 언제나 경환에게 있었지만 전쟁통에 삶의 질을 추구하기에 앞서 생존이 우선이었던 탓에 경환과 이어지지는 못한다. 대신에 경환의 사촌 형인 지수가 남동생의 약을 구해다 주기도 하고, 번번이 음식도 들고 오면서 해미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표시를 내는 바람에 해미는 결국 지수와의 결혼을 선택한다. 그리고 지수와 경환은 한국군에 입대한다.


"나는 지수와의 결혼, 번갯불에 콩 볶듯 올린 예식 또는 그날 밤에 지수가 군인들이 가득 찬 트럭으로 당당하게 걸어갔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너무 빨리 일어난 일들이었다. 어떤 날은 기억마저 조잡하고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어머니가 소박한 혼례용 한복을 추씨 아주머니에게 빌려 왔고, 나는 그걸 입고 우리 집 주위를 걸어 다녔다. 짧은 초록색 저고리와 풍성한 빨간 치마는 우리 일상생활에 비해 너무 강렬해 보였다. 우리 집의 헐벗은 나무 기둥과 어머니의 단호한 분위기에 대비되는 그 색깔은 우리의 진실을 드러냈다. 우리는 이제 초라해졌고, 우리의 겉모습만이 겨우 내놓을 만한 형태를 이루고 있을 뿐이었다."  (p.153)


자신이 선택한 삶이기에 해미는 지수를 사랑하려 노력한다. 딸 셋을 낳은 해미였지만 지수는 거리로, 술집으로 나돌며 대놓고 바람을 피운다. 그럼에도 지수는 아들을 낳을 때까지 해미에게 계속해서 임신을 요구한다. 해미는 지수 몰래 18개월 된 갓난쟁이 막내딸을 데리고 보육원에서 일을 시작한다. 그리고 경환에게 편지를 쓴다. 경환과 재회한 해미는 경환에게 자신을 서울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는데...


"나는 그의 집요함에, 아니 속으로는 내 어리석음에 짜증이 나서 몸을 돌렸다. 경환은 절대 날 놔주지 않을 것이다. 그와 지수는 나를 자기 거라고 주장하기만을 원했다. 마치 내가 보리나 비누나 소, 아니면 애 낳는 기계라도 되듯이. 경환은 한 번도 구속돼 본 적이 없어서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p.455)


총 5부로 이어진 이 소설은 1967년의 대한민국으로 길게 이어진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기를 바랐던 이해미의 고단하고 지난한 삶은 아프게 읽힌다. 거부할 수 없는 시대의 덫은 때로는 이를 거부하는 이의 올가미가 되어 그의 운명을 옥죈다.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그의 숨통이 조여 오는 것이다. 운명에 맞설 용기가 없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시대와 환경에 걸맞은 뻔하디 뻔한 인생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길게 이어지던 가을 장마도 이제는 그 끝에 이른 듯하다. 어둠이 내린 하늘엔 이따금 구름이 떠다니고 한 계절을 힘겹게 살아낸 개개인의 역사가 구름 저편으로 밀려나는 듯하다. 어둠의 틈새를 뚫고 귀뚜라미 소리가 들린다.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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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너 걸음 걷다가 멈추고 다시 서너 걸음 걷다가 멈춘다고 할지라도 결코 포기하거나 물러설 수 없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그와 같은 순간은 꽤나 빈번하게 찾아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개개인의 삶이 다 같은 것은 아니어서 걷고 싶을 때 걷고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는, 평생 동안 더없이 편안한 삶을 사는 사람이 왜 없겠습니까마는 무작위로 뽑히는 각자의 삶에서 로또와 다름없는 그와 같은 행운은 아무에게나 찾아오는 것은 분명 아닐 테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어떤 삶에서도 갈등이나 고민이 없는, 꽃길처럼 순탄한 길만 걸을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궂은 날씨가 길게 이어진 바람에 한여름을 방불케 하던 늦더위는 한풀 꺾인 듯합니다. 요 며칠 맑은 하늘을 볼 수 없던 까닭에 해가 짧아진 것도 미처 알지 못했던 듯합니다. 내가 아침 운동을 나서는 새벽 5시 30분만 하더라도 이제는 제법 캄캄한 어둠에 휩싸여 손전등 없이는 등산로의 장애물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불과 달포쯤 전만 하더라도 대낮처럼 환하던 길이 이제는 캄캄한 어둠 속에 있다는 게 신기한 일이지만 12월 22일의 동지까지 밤은 계속하여 조금씩 길어질 테지요. 얼마 전에 읽었던 데니스 존슨의 소설집 <예수의 아들>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등장합니다.


"베벌리 요양 병원에서는 매주 목요일에 최고령 환자들을 모아 구내식당 의자에 앉혀 놓고 우유가 담긴 종이컵과 쿠키가 담긴 종이 접시를 앞에 놓아주었다. 그들은 '기억해'라는 놀이를 했다. 그들의 정신이 누구도 가늠할 수 없는 곳으로 가 버리기 전에 삶의 소소한 것들을 붙잡게 하는 놀이였다. 모두가 각자 그날 아침에 있었던 일과 지난주에 있었던 일, 몇 분 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p.180 '베벌리 요양 병원' 중에서)


생각하기 나름이겠습니다만 무척이나 쓸쓸한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들 각자는 자신의 마지막이 절대 그와 같은 처량한 모습은 아닐 것이라고 자신을 수시로 다독이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일이지요. 언론에서는 치매 치료제도 개발되었고, 암 백신도 개발되어 그동안 불치병으로 여겼던 병들이 하나둘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는 듯 보도하지만 그것이 우리와 같은 서민들에게도 혜택이 미치려면 하세월이 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끄물끄물하던 하늘은 활짝 개지 않고 여전히 어둡습니다. 밖에 나가면 비닐 우의를 걸친 듯 탁한 습기가 온몸을 감싸고 돕니다. 낮아진 기온만큼 끈적끈적한 습도도 조금 낮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데 책은 손에서 점점 멀어져만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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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6-09-03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병원에 지속 다니는 입장에서 암백신이나 치매 치료제 신약 개발에 대한 혜택을 차지하고라도 현재 안과에서 눈에 직접 대장 항암제를 주사맞는 입장(노인 안과 질환자의 상당수가 이 주사를 맞음)데 댜장암 치료제라고 안과처방시 비 보험처리되서 수십만원의 주사비를 개인들이 부담하고 있지요.
이런 것만 보아도 서민들한테 혜택이 갈려면 아직도 길이 멀어만 보입니다.

꼼쥐 2026-09-03 20:33   좋아요 0 | URL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아무리 좋은 신약이 나온다고 해도 병을 앓는 환자가 소수라는 이유로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이죠. 그러니 신약은 그림의 떡일 뿐이고 말이죠. 안타까운 현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