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 30분의 등산로는 그야말로 어둠입니다. 캄캄하여 지척을 분간하기도 힘들 정도. 손전등은 어느새 필수품이 되었습니다. 아침에 산을 오르는데 기척도 없이 앉아 있던 고양이 한 마리 때문에 기겁을 하고 놀랐습니다. 놀란 것은 고양이도 마찬가지인 듯했습니다. 등산로 한켠의 어둠 속에서 조용히 잠을 청하던 고양이는 갑작스러운 손전등 불빛에 놀라 풀숲 어딘가로 냅다 달아났고 나는 예상치 못했던 동물의 등장에 화들짝 놀랐던 것입니다. 고양이의 몸동작이 어찌나 빠르던지 마음을 턱 놓은 채 걷고 있던 나는 고양이의 형체만 겨우 눈에 담을 수 있었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한동안 그 자리에 붙박인 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엊그제 내린 비로 등산로는 적당히 젖어 있었고, 잎과 함께 떨어진 도토리로 어지러웠습니다. 나는 주섬주섬 도토리를 주워서 풀숲으로 던졌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등산로에 떨어진 얼마 되지도 않는 도토리마저 다람쥐나 청설모의 차지가 되지 못한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욕심이란 끝이 없어서 숲에 사는 작은 동물들의 먹이마저 그 대상이 된다는 건 꽤나 서글픈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등산로에 버려진 쓰레기와 도토리를 줍느라 걸음은 마냥 더디게 나아갔습니다. 가뜩이나 바쁜 아침에 나의 오지랖은 쓰레기를 줍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도토리와 밤을 주워 숲으로 던지는 데까지 미치는 바람에 까딱 잘못하면 아침도 거른 채 출근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다정도 병인 양하여'가 아니라 '오지랖도 병인 양하여' 나는 이 가을에 아침도 거르게 생겼습니다.
영국 작가 로라 패쉬비가 쓴 산문집 <평범한 날들을 근사하게 기록하는 법>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등장합니다.
"당신의 목소리는 지문만큼이나 고유하고 절대 지울 수 없어 당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보여 줍니다. 당신을 아는 사람이면 목소리만으로도 즉시 당신임을 알아차리는 것처럼 당신만의 목소리도 글이나 이미지 등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 구별해 낼 수 있어요. 개인적 스타일뿐 아니라 성격과 인품까지 드러내는 당신만의 고유한 색깔이 갈수록 뚜렷해지기 때문이죠. 이렇게 고유하고 한결같은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연습이 필요하고 귀 기울이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p.149)
아니나 다를까 운동을 마치고 산을 내려오는데 어떤 아주머니 한 분이 한 손에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손전등을 비춰가며 등산로에서 도토리를 줍고 있었습니다. 낮에는 바라보는 시선도 많고, 감시원의 단속에 걸릴 수도 있는 까닭에 어둠이 가시지도 않은 이른 새벽에 도토리를 줍는 것입니다. 나는 저절로 한숨이 나오는 걸 억지로 참으면서 서둘러 산을 내려왔습니다. 사람들의 욕심에 파랗게 질린 탓인지 아침 기온은 하루가 다르게 낮아지고 있습니다. 도토리가 떨어지는 날도 며칠 남지 않았을 듯합니다. 나는 그때까지 등산로의 도토리를 지키기 위해 더 열심히 산을 올라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