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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균열내기 - 뒤라스, 카뮈, 에르노를 지나 다만 내가 되기 위해
신유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평점 :
나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그렇게 절망할 필요가 있을까? 나의 무능함, 부도덕, 탐욕, 사악함... 오늘날 사람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한 개인이 개별적으로 평가받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나의 과거를 돌이켜 생각해 볼 때 수치심으로 얼굴을 붉히거나 낙담할 필요는 없다는 얘기이다. 개인의 능력 또한 그가 속한 공동체에 묻히고, 개인의 도덕성 역시 익명성에 묻힌다. 그러므로 현대인은 진정한 자아를 마주하지 않거나 마주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나는 비록 혼자 있을 때 사회가 용인할 수 없는 나쁜 생각을 하기도 하고, 범죄는 아니지만 종종 나쁜 짓도 하는 사람이지만 어느 날 남들 눈에 띄는 그럴듯한 댓글 한 줄을 씀으로써 나는 마치 성인 반열에 오를 만큼 선한 사람으로 대우받기도 하는 것이다. 나의 능력 역시 타인이 형성한 어떤 성과나 도움에 의해 적당히 윤색되고 부풀려지는 게 대부분이다. 나는 혼자 집 한 채를 짓거나 옷 한 벌을 완성하거나 신발 한 켤레를 만들지도 못하는데 말이다. 그렇다고 나의 무능함이나 부도덕함이 내 주변의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크기로 작동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현대인은 자신에 대해 너무 모르고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걸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신유진 작가의 산문집 <나를 균열내기>를 읽고 내게 들었던 생각이다.
"막을 쓰고, 나를 접어두는 이유는 두렵기 때문이다. 타인의 시선, 나에 대한 평가, 물론 그런 것들도 두렵지만, 내가 진짜 두려운 건 나 자신인지도 모른다. 내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 얼마큼 울퉁불퉁하고 모난 사람인지 스스로도 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모르는 것만을 두려워한다. 접힌 모서리를 펼치면 무엇이 될까. 매끄러운 막 아래 숨은 나를 꺼내면 어떤 내가 나올까. 이 표면을 부순다면 날카롭게 갈린 언어로 이 막을 내리찍을 수 있다면. 쩍, 소리를 내며 갈라지도록." (p.6 '프롤로그' 중에서)
작가는 이 책에서 프랑스어로 글을 썼던 여러 작가를 차용하면서 그들의 작품 속에서 발견했던 자신의 고독, 광기, 슬픔, 쾌락, 수치심, 절망, 분노, 잔인한 기억 등을 떠올리며 작가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았음에 위안을 받는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삶이 스스로를 우쭐하게 만드는 특별한 사건으로 구성되는 것은 아니어서, 그보다는 오히려 강물 위의 작은 물비늘처럼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빛나던 소소하고 작은 일상들로 우리의 삶이 채워진다는 사실이다. 너무나 작고 사소해서 기억조차 할 수 없는 것들 말이다. 광활한 우주가 반짝이는 항성이나 행성들만으로 구성되는 게 아니라 눈에 띄지 않는 암흑물질로 우주의 대부분이 채워지는 것처럼.
"페렉은 '산다는 것은 최대한 부딪치지 않으려 애쓰면서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끊임없이 이동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의 말처럼 삶은 임시적 정착과 이동의 반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동하는 모든 걸음은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은 누군가의 기억이고, 그 기억이 저장된 공간은 존재의 시간이 쌓이는 장소가 된다. 시간이 삶의 다른 이름이라면, 문학은 한 인간이 세상 속에 머무는 방식, 즉 거주의 예술인 셈이다. 페렉의 책을 펼치며 '읽다'라는 동사 대신에 '살다'라는 말을 써본다. 시인의 870보처럼 페렉의 문학이라는 장소를 천천히 가로질러 본다. 서사를 쫓는 달리기를 멈추고 문장 하나하나에 발을 딛으며, 무심코 지나쳤던 작은 것들을 돌아본다. 그렇게 그의 문장을 살다 보면, 어느새 페렉의 문학이 하나의 견고한 장소가 되지 않을까. 그곳에 쌓은 시간은 오롯이 나의 것, 나만의 기억이 될 것이다." (p.166~p.167)
이 책에 등장하는 프랑스 작가는 비단 프랑스어가 모국어인 작가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망명했던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시계공장에서 일하며 프랑스어를 배웠던 작가이고, 체코 프라하 출신의 밀란 쿤데라 역시 프랑스로 망명하여 작품 활동을 계속했던 작가이다. 그러나 책의 저자인 신유진 작가가 발견했던 것은 단순히 언어의 공통성만은 아니었다. 1부 '균열의 발견', 2부 '해체와 붕괴', 3부 '유예의 순간', 4부 '자아의 재구성'이라는 목차의 소제목에서 어렴풋이 짐작하겠지만 저자는 자신의 생각과 기억에 균열을 내고 완전한 파괴에 이르러 새롭게 자아를 재구성하는 단계까지 나아가기 위해 프랑스어로 작품 활동을 했던 여러 작가의 작품을 치열하게 읽고, 갈등하고, 음미하며, 비로소 자신의 언어로 해석하고 분석한다.
"모두가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낸다. 그러나 넘치는 고백들 속에서 정작 필요한 것은 이야기의 쓸모와 방향을 묻는 일이다. '자기 쓰기'는 거울 앞에서 시작되지만, 그 끝은 거울을 깨고, 그 자리에 창을 내는 것이어야 한다. 처음부터 열린 창이 될 수 없음을 받아들이자. 깨고 깨지는 경험이 결국 우리 안에 창을 만들 것이다. 물론 그 창 너머에 누군가의 진짜 삶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카미유 로랑스는 '로랑스'라는 거울을 깨뜨려 우리에게 '딸'이 아닌 '여자'라는 창을 내어주었다. 나는 그의 창을 바라보며 내가 부숴야 할 거울과 마주한다. 누군가의 창이 없었다면 영원히 거울 속에 갇혀 있었을 나의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한다." (p.189)
별 기대도 없이 읽었던 책이 내게 큰 감흥을 주는 경우가 더러 있다. 탁월한 글솜씨 때문은 아니다. 작가의 열정과 책에서 쓰고자 했던 주제에 대한 깊은 이해가 책을 읽는 나로 하여금 들뜨게 하는 것이다. 그런 책을 만나면 한 문장 한 문장을 읽어나가는 일이 그저 즐겁다. 혹시 놓치는 부분이 있을까 한 글자 한 글자 손을 짚어가며 읽게 된다. 그런 더딤이 마냥 즐거운 반면 줄어드는 책의 남은 분량이 그저 안타까운 까닭에 일부러 책을 덮고 방금 전에 읽었던 부분을 찬찬히 되짚어 생각해보기도 한다. 신유진 작가의 산문집 <나를 균열내기>는 무척이나 더디게 읽었던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