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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를 떠나면
크리스털 하나 김 지음, 허선영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6년 8월
평점 :
우리는 자신이 살아야 할 시대나 환경을 제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 그런 면으로 보면 인생이란 참으로 불공평하다. 내던져지듯 주어진 삶의 환경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환경에 걸맞은 뻔한 스토리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다가 생을 마감한다. 특별할 것도 없이 말이다. 그러나 개중에는 앞으로 전개될 자신의 뻔한 스토리를 거부한 채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자신에게 어떤 어려움이 닥칠지라도 그렇고 그렇게 전개되는 뻔한 스토리를 자신의 삶으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게 그들의 의지이자 뜻이다. 역사에 기록되는 대부분의 인물은 주로 그런 부류의 인간들이지만, 소설과 같은 픽션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작가는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뻔한 스토리를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는 어떤 인물을 소설의 주인공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어진 조건에서 뻔하디 뻔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그들이 헤쳐가는 삶의 결말이 도무지 예측이 되지 않는다. 소설 속 주인공의 삶을 그저 경이와 감탄의 시선으로 읽게 되는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크리스털 하나 김의 소설 <네가 나를 떠나면>을 읽는 독자라면 주인공 해미의 삶에서 그와 같은 느낌을 받지 않을까.
"나는 어린 미라를 보면서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자기 시대 사고방식에 매몰되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성년이 된 이후 내내 미워했던 여자. 어머니는 내가 눈앞의 일만 보느라 분노한 이후의 상황을 보지 못할 때 나를 위해 고민했다. 나는 언제나 부러졌지만, 어머니는 세상에서 부러지지 않고 살아남는 법을 아는 여자였다. 이 상황에서 어머니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p.369)
소설은 한국전쟁이 진행 중에 있었던 1951년 피난지 부산의 해미네 가족을 그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어머니와 몸이 아픈 동생 현기와 함께 부산으로 피난을 온 해미네는 운이 좋게도 어머니의 종조부가 살던 집에 들어가 살게 되었지만, 해미는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경환과 싸돌아 다니는 것 말고는 특별히 운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해미의 마음은 언제나 경환에게 있었지만 전쟁통에 삶의 질을 추구하기에 앞서 생존이 우선이었던 탓에 경환과 이어지지는 못한다. 대신에 경환의 사촌 형인 지수가 남동생의 약을 구해다 주기도 하고, 번번이 음식도 들고 오면서 해미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표시를 내는 바람에 해미는 결국 지수와의 결혼을 선택한다. 그리고 지수와 경환은 한국군에 입대한다.
"나는 지수와의 결혼, 번갯불에 콩 볶듯 올린 예식 또는 그날 밤에 지수가 군인들이 가득 찬 트럭으로 당당하게 걸어갔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너무 빨리 일어난 일들이었다. 어떤 날은 기억마저 조잡하고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어머니가 소박한 혼례용 한복을 추씨 아주머니에게 빌려 왔고, 나는 그걸 입고 우리 집 주위를 걸어 다녔다. 짧은 초록색 저고리와 풍성한 빨간 치마는 우리 일상생활에 비해 너무 강렬해 보였다. 우리 집의 헐벗은 나무 기둥과 어머니의 단호한 분위기에 대비되는 그 색깔은 우리의 진실을 드러냈다. 우리는 이제 초라해졌고, 우리의 겉모습만이 겨우 내놓을 만한 형태를 이루고 있을 뿐이었다." (p.153)
자신이 선택한 삶이기에 해미는 지수를 사랑하려 노력한다. 딸 셋을 낳은 해미였지만 지수는 거리로, 술집으로 나돌며 대놓고 바람을 피운다. 그럼에도 지수는 아들을 낳을 때까지 해미에게 계속해서 임신을 요구한다. 해미는 지수 몰래 18개월 된 갓난쟁이 막내딸을 데리고 보육원에서 일을 시작한다. 그리고 경환에게 편지를 쓴다. 경환과 재회한 해미는 경환에게 자신을 서울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는데...
"나는 그의 집요함에, 아니 속으로는 내 어리석음에 짜증이 나서 몸을 돌렸다. 경환은 절대 날 놔주지 않을 것이다. 그와 지수는 나를 자기 거라고 주장하기만을 원했다. 마치 내가 보리나 비누나 소, 아니면 애 낳는 기계라도 되듯이. 경환은 한 번도 구속돼 본 적이 없어서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p.455)
총 5부로 이어진 이 소설은 1967년의 대한민국으로 길게 이어진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기를 바랐던 이해미의 고단하고 지난한 삶은 아프게 읽힌다. 거부할 수 없는 시대의 덫은 때로는 이를 거부하는 이의 올가미가 되어 그의 운명을 옥죈다.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그의 숨통이 조여 오는 것이다. 운명에 맞설 용기가 없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시대와 환경에 걸맞은 뻔하디 뻔한 인생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길게 이어지던 가을 장마도 이제는 그 끝에 이른 듯하다. 어둠이 내린 하늘엔 이따금 구름이 떠다니고 한 계절을 힘겹게 살아낸 개개인의 역사가 구름 저편으로 밀려나는 듯하다. 어둠의 틈새를 뚫고 귀뚜라미 소리가 들린다. 가을이다.